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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봉호도(峰虎圖): 삼백년간 무수한 논쟁을 불러온 그림

by 중은우시 2021. 2. 12.

글: 취초인문세계(聚焦人文世界)

 

峰虎圖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는 한폭의 괴화(怪畵)가 소장되어 있어, 300여년동안 무수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그림을 둘러싸고 주로 3가지 의문이 있다: 첫째, 화가는 왜 호랑이를 그리면서 꼬리를 만 상갓집 개같은 모습으로 그렸을까? 둘째, 그림의 제목이 왜 '봉호도(峰虎圖)'일까? 셋째, 이런 그림이 어떻게 명작이 되어 고궁박물원에 소장될 수 있었을까?

 

먼저 이 그림을 살펴보자.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피골이 상접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으며, 눈빛에서는 두려움이 크게 나타나 있다. 호랑이를 왜 이런 모습으로 그렸을까?

 

그림의 오른쪽 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땡벌이 한 마리 그려져 있다. 원래 위풍당당한 산중대왕이 산에서 땡벌을 당해내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며 꼬리를 말아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진 낭패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당당한 백수의 왕인 대충(大蟲)이 자그마한 소충(小蟲)인 땡벌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호랑이에게는 위풍당당한 일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만물은 상생상극한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도 너무 자신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 괴화의 작자는 청나라때의 걸출한 회화대사 화암(華嵒)이다. 화암(1682-1756)은 자가 덕숭(德嵩)이며, 고친 후의 자는 추악(秋岳)이다. 호는 백사도인(白沙道人), 신라산인(新羅山人), 동원생(東園生), 포의생(布衣生), 이구거사(離垢居士)등이 있다. 노년에는 스스로 '표봉자(飄篷者)'라 칭했다.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초충화에 능했는데, 특히 동물을 잘 그렸다. 서예도 잘하고, 시도 잘 써서, 당시 "시,서,화의 삼절'이라고 불렸다. 양주화파(揚州畵派)의 대표인물중 하나이다.

 

화암은 맹호를 왜 이렇게 가련한 모습으로 그렸을까, 혹시 자신의 처지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화암은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나중에는 잡안이 가난하여 공부를 포기하고, 세상에서 냉대를 받는다. 강희42년(1703년), 화씨일족은 사당을 짓는데, 향신(鄕紳)들은 그를 멸시하여 그가 벽화를 그리는 것에 반대한다. 결국 화암은 몰래 사당에 들어가서 "고산운학(高山雲鶴)", "수국부우(水國浮牛)", "청송현애(靑松懸崖)"와 "의마제시(倚馬題詩)"의 네폭의 벽화를 완성한 후, 화를 참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항주로 간다. 이곳에서 그는 인생의 첫 서광을 맞이한다. 비록 그는 성격이 내향적이고, 말을 잘하지도 못했지만, 그림과 시문의 재주를 가지고 항주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36살때, 화암은 북상하여 북경으로 갔으나, 뜻을 펴지 못한다. 재희(載熙)의 <습고재화서(習苦齎畵絮)>에 따르면, "화추악은 스스로 그림이 뛰어나다고 여겨, 경사를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묻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모조화를 파는 사람을 만났는데, 거기에 자신의 그림이 있었다. 화암은 그것을 보고 너무 실망하여 북경을 떠난다." 비록 재능이 출중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은 화암의 내성적인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는 경성에서도 냉대를 받는다. 내성적인 성격외에 화암에게는 오만함과 자부심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영합하거나 아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그린 그림은 경성에서 헐값으로 골동서화점에 팔 수밖에 없었다.

 

중말년에 화암은 계속 항주, 양주를 빈번하게 왕래하며 그림을 그려 팔면서 살았다. 1756년, 화암은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며 세상을 떠난다. 향년 74세이다.

 

우리는 다시 <봉호도> 그림으로 되돌아가보자. 이 호랑이의 모습을 보면 한눈에 화암의 심후한 예술적 조예와 정묘한 포착능력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 이 '산중지왕'의 오른쪽 위에 있는 큰 땡벌을 보게 되면, 이 호랑이는 그저 병든호랑이처럼 보인다.

 

다만 <봉호도>는 단지 기괴한 호랑이를 그린 것이라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화암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고향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경성에서도 벽에 부닥치고 일생동안 빈곤 속에서 여러 불행한 처지를 당한다. 그는 자신의 일생의 기구함과 감정을 그대로 그림 속에 담았다. 그래서 이렇게 생동적인 <봉호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럼, 왜 <봉호도>라고 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산 속의 호랑이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산봉우리같아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그마한 땡벌의 봉(蜂)이 봉우리의 봉(峰)과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정말 묘한 제목이다.

 

그리고 어떻게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들어가게 되고, 전세의 보물이 되었는지는 아마도 그것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 속에 호랑이는 흉맹한 동물이다. '산중지왕'이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화암의 붓 아래에서 호랑이는 기운을 잃고, 들판의 땡벌에게 '패배'한 모습이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무기력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완전히 패주의 자태는 없다. 이런 묘사는 아마도 전통적인 그림수법과는 맞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화암은 다른 사람들이 관찰하지 못하는 광경까지 관찰했고, 멋지게 그것을 그려냈다. 이는 확실히 보통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유일무이한 경전적인 작품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