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무한적야사(無限的野史)
천명에 이르는 개국소장(開國少將) 중에서 왕동흥은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17살때 홍군에 들어가서, 장정,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거치면서 여러번 구사일생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왕동흥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전투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택동주석의 경위를 맡았기 때문이다.
1947년부터, 왕동흥은 계속 모택동주석의 경위를 맡고, 중앙경위단(中央警衛團)을 장악한다. 그는 일을 열심히 했고, 여러번 특수한 임무도 훌륭하게 완수한다. 그리하여 모주석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건국후, 왕동흥은 소장의 계급을 받았으며, 관료로서의 승진도 순조로웠다. 말년에는 정치국에 들어가, 상임위원에 당선되어 일약 당내서열5위의 풍운인물이 된다.
그러나 고처불승한(高處不勝寒, 높은 곳에 있으면 추위를 이기기 어렵다. 소동파의 사에 나오는 문구임)이다. 1980년, 왕동흥은 모든 직무를 사임하고, 점점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왕동흥과 함께 정계를 떠난 인물은 4명이 더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각각 누구이고, 어떤 최후를 맞았을까? 한명 한명 살펴보기로 한다.
진석련(陳錫聯), 1915년생, 호북 홍안현 사람. 그는 14살때 홍군에 참가하고, 혁명의 시기에 수많은 전투를 겪고, 공훈이 탁월했다. 40세에 상장(上將)의 계급을 달고 포병사령원이 된다. 그러나 진석련의 성공은 어기에 거치지 않았다. 그는 그후에 심양군구사령원, 북경군구사령원을 거쳐 부총리에 이른다. 그는 한때 예젠잉(葉劍英)을 대신하여 삼군을 지휘하여 권력이 아주 컸다.
그러나, 1980년이 되어, 진석련은 모든 직무를 사임하고 집에서 쉰다. 2년후, 그는 중앙고문위원회 상임위원에 선임되어, 계속 국가건설에 관심을 가진다. 1999년, 진석련은 북경에서 병사하니 향년 89세이다.
기등규(紀登奎). 1923년생, 산서 무향 사람. 그는 15살때 혁명에 참여하여, 항일전쟁, 해방전쟁을 겪었다. 위의 몇 사람과 비교하면 그는 승진이 비교적 느렸다. 건국후에 비로소 허창지위부서기 겸 선전부장이 된다. 그러나, 기등규는 재능이 있었다. 모주석이 허창을 지나갈 때 특별히 그의 보고를 받았고, 아주 만족했다. 그후 기등규는 바로 발탁되어 승진을 거듭한다. 28세에 지위서기가 되고, 나중에는 심지어 정치국에 들어와 부총리가 된다. 권력이 막강한 인물로 성장한 것이다.
1980년, 롤러코스트를 타고난 후에 모든 것이 조용해진다. 기등규는 모든 직무를 사임한다. 3년후, 그는 농촌발전연구중심에 배치되어 일하며 정부급(장관급)의 대우를 받는다. 1988녀8ㄴ, 기등규는 병으로 사망하니, 향년65세이다.
오덕(吳德). 1913년생. 하북 풍윤 사람. 그는 학생시기에 진보사상에 심취하여, 19세에 혁명에 가담한다. 주로 노동운동에 종사했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거친다. 건국후 오덕은 지방의 최고관리가 된다. 평원성위서기, 길림성위서기를 각각 맡는다. 1966년, 오덕은 북경으로 와서, 북경군구 정치위원이 된다. 나중에는 정치국에 들어가 전인대 부위원장이 된다.
1980년, 오덕은 모든 직무를 사임한다. 그는 진석련과 마찬가지로 나중에 중앙고문위원회에 들어가서 그가 할 수 있는 몇가지 일을 한다. 1995년, 오덕은 북경에서 병사한다. 향년 82세이다.
진영귀(陳永貴). 1915년생. 산서성 석양현 사람. 그의 어린 시절은 아주 기구했다. 6살때 부친은 목을 매어 자살하고, 모친은 일찌감치 개가했다. 그래서 남의 집에서 양을 기르는 것을 봐주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았다. 석양현이 해방된 후, 진영귀는 가난한 농민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 자신의 토지도 갖게 되고, 몇칸의 집도 가진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며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
1952년, 37살의 진영귀는 대채촌(大寨村) 당지부서기에 당선된다. 그는 촌민을 이끌고 제방을 수리하고, 계단논을 일궈 대채촌의 가난한 면모를 일신한다. 나중에 대채촌의 일이 널리 보도되게 된다. '농업은 대채를 배우자'는 붐이 전국에서 일어난다. 진영귀는 이렇게 하여 모두의 주목을 받는 스타가 된다. 1975년, 진영귀는 북경으로 가서 부총리가 되어, 농업을 주관한다.
그러나 5년후인 1980년, 가정연산승포제(家庭聯産承包制)가 보급되면서, 진영귀는 모든 직무에서 사임한다. 한동안 아무 일없이 지낸 후, 그는 일을 어레인지해달라는 서신을 보냈고, 결국 동교농장(東郊農場)의 고문으로 가서 계속 농사를 짓는다. 1986년, 진영귀는 북경에서 병사하니, 향년 7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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