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왜 청나라의 황후들은 곤녕궁(坤寧宮)에 거처하지 않았을까?

중은우시 2020. 2. 26. 16:01

글: 역사순간(歷史瞬間)


항간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청나라때 황후가 곤녕궁에 거처하지 않은 것은 망자(亡者)의 회기(晦氣), 즉 죽은 사람의 나쁜 기운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주황후(周皇后)는 이곳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기실 청나라가 북경으로 들어온 후, 이미 3명의 황후가 곤녕궁에 거주했었다.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 커얼친친왕 우커샨의 손녀이자 순치제의 외조카, 순치제의 제2대황후),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소어투의 조카딸, 강희제의 제1대황후), 효소인황후(孝昭仁皇后, 어비룽의 딸, 강희제의 제2대황후). 강희제의 이 두 황후는 곤녕궁에 거처했을 뿐아니라, 곤녕궁에서 죽었다. 사서에서는 '훙(薨)'이라고 적는다. 나머지 한 황후는 황후로 반나절을 지낸 효의인황후(孝懿仁皇后)인데, 이전에 황귀비(皇貴妃)로 있을 때 승건궁(承乾宮)에 거주했고, 황후로 책봉되기 전에 이미 병마에 시달리고 있어서 궁을 옮길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곤녕궁에 거처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


황후가 곤녕궁에 거처하지 않기 시작한 것은 옹정제때부터이다. 옹정제 자신이 건청궁(乾淸宮)에서 거처하지 않고 양심전(養心殿)으로 옮겨서 지냈다. 효경헌황후(孝敬憲皇后) 우라나라씨(烏拉那拉氏) 즉 <견환전>의 그 황후인데, 당연히 운명은 TV드라마에서와는 달랐다. 양심전의 후침궁(後寢宮) 동이방(東耳房) 체순당(體順堂)에 거처한다. 명나라때는 융희관(隆禧館)으로 불렸다. 옹정제가 수리한 후에 이름을 짓지 않았는데, 함풍제때부터 수리전(綏履殿)으로 불리고, 광서초년때 체순당으로 개칭된다. 그리고 서태후가 그 편액을 썼다. 옹정이후 황후들은 아예 동서육궁(東西六宮)에 거처를 정했다. '중궁(中宮)마마'라는 명칭과는 명실상부하지 않게 도었다. 예를 들어, 건륭제의 원배(元配)인 효현순황후(孝賢順皇后) 푸차(富察)씨는 장춘궁(長春宮)에 거처하고, 두번째 황후인 우라나라씨는 황후의 지위에 있고 폐후되지는 않았지만, 황귀비의 예로 안장되어 황후의 시호가 없다. 그는 바로 <환주거거>의 그 황후의 원형인데, 생전에 양심전 곁에 있는 체순당에 거처했다. 여기서 한마디 하자면, TV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곤녕궁에 거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후 가경제의 효숙예황후(孝淑睿皇后)는 육경궁(毓慶宮)에 거주했고, 도광제의 효전성황후(孝全成皇后), 함풍제의 효정현황후(孝貞顯皇后, 즉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안태후, 동태후이다)는 모두 종수궁(鍾粹宮)에 거주했다. 즉 곤녕궁에 거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청나라때 황후의 예법규정에서의 중궁위치는 여전히 곤녕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와 황후의 대혼(大婚)때의 동방(洞房)은 반드시 곤녕궁에 설치되었고, 부부가 3일을 함께 지낸 후, 비로소 침전으로 옮겨서 생활했다. 그곳은 바로 곤녕궁 동수간(東首間)과 동차간(東次間)이다. 소위 동난각(東暖閣)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점에서명나라와는 크게 달랐다. 명나라때 황제는 대혼동방이 황제의 침궁, 즉 건청궁이었다. 그러나 청나라황제는 대부분 성년이 된 후에 등극하였으므로, 청나라때는 곤녕궁을 동방으로 삼은 것은 단지 강희제, 동치제, 광서제의 세 황제 뿐이다.


또 다른 소년천자 순치제는 즉위13년간 모두 위육궁(位育宮, 지금의 고궁 보화전)에 거주한다. 그의 두번에 걸친 대혼은 모두 곤녕궁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순치13년에 이르러 곤녕궁의 수리가 완료되고, 그의 둘째 황후인 보르지지터씨가 곤녕궁으로 옮겨가서 거주하게 되었다. 순치제 본인은 순치12년이후 남원행궁(南苑行宮)에 장기거주하여, 더욱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왜 강희제이후, 청나라황후는 더 이상 이전이 예법에 따라 곤녕궁에 거주하지 않게 되었을까? 원인은 아마도 거기서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고, 오히려 청나라때의 정치특색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강희제는 효소인황후가 사망한 후, 곤녕궁이 30여년간 비어 있게 된다. 이 노황제는 효의인황후(반나절황후)가 사망한 후에도 황후를 책봉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희23년, 창춘원(暢春園)을 건설한 후,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 머문다. 말년에는 더더욱 중대한 전례의식이 있을 때만 자금성으로 돌아오곤 했다. 강희61년 십일월 십삼일 강희제는 창춘원 청계서옥(淸溪書屋)에서 붕어한다.


그후, 옹정제는 더 이상 창춘원에 머물지 않고, 그곳을 제사, 추모의 장소로 삼는다. 자신은 원명원(圓明園)을 새로 지은 후, 점점 확장하여 일상적인 기거와 업무를 처리하는 장소로 된다. 이때부터 청나라의 독특한 '궁원체제(宮苑體制)'가 형성된다.


원명원 전문가인 장은음(張恩蔭)의 통계에 따르면, 1707년부터 1860년까지, 원명원은 153년간 존속했는데, 옹정, 건륭, 가경, 도광, 함풍의 다섯황제가 매년 원명원에 원거(園居)한 시간은 자금성에서 '궁거(宮居)'한 시간보다 훨씬 길다. 그중 옹정, 도광, 함풍은 매년 원거시간이 200일이상이고, 도광제의 원거시간은 가장 짧은 해가 201일, 가장 긴 해가 354일이었다.


건륭제는 매년 원거한 시간이 대체로 4개월여였고, 그가 궁거한 110여일보다 약간 길었다. 나머지 시간동안 이 황제는 북상하여 피서산장에 머물거나 남하하여 강남으로 갔다. 매년 원거시간이 가장 짧았던 황제는 가경제이다. 그는 부친 건륭제와 대체로 비슷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후궁은 자연히 황제를 따라다니며 활동하게 된다. 건륭의 원배 효현순황후 푸차씨는 심지어 남순을 따라갔다가 도중에 사망한다. 그러므로, '대혼'과 같은 융중한 의식활도은 부득이 예법에 따라 곤녕궁에서 거행했지만, 나머지 시간동안 황후의 기거는 반드시 곤녕궁의 동난각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하물며 동난각의 옆은 바로 도살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