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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진회(秦檜)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모습

by 중은우시 2020. 3. 17.

글: 안건회(晏建懷)


남송(南宋)의 야사필기(野史筆記)에는 진회의 언행에 관한 기록이 넘쳐나고, 그를 나쁘게 쓰는 글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일부 그가 은혜를 갚는 류의 에피소드도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에게 진회의 또 다른 일면을 알려주고 있다.


왕명청(王明淸)의 <휘진여화(揮塵餘話)>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강(靖康) 초년, 당시 어사(御史)를 맡고 있던 진회는 병으로 조정에 사직을 청하고, 고향인 건강(建康) 상원현(上元縣)(지금의 남경시)으로 돌아간다. 현성(縣城)에서 집을 하나 빌려서 거주했는데, 당시 상원현령으로 있던 장사언(張師言)은 진어사가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는 말을 듣고, 그의 집을 방문하여 안부를 묻는다. 장사언은 예의바르게 진회에게 사는게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당시는 한여름이었는데 진회가 이렇게 대답한다: "집은 괜찮은데, 단지 서향이어서 더위를 견디기 힘듭니다. 만일 가림막이라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원래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해본 것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다음날 아침 일찍, 진회는 집밖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일어나서 나가보니, 가림막이 눈앞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진회는 급히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았고, 그 장인(匠人)은 이렇게 대답한다: "현관아에서 마침 가림막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제 장현령께서 당신의 집이 너무 덥다는 말을 듣고 우리에게 그쪽 일을 잠시 멈추고, 먼저 당신의 집에 가림막부터 설치하라고 하셨습니다." 진회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한다. 그는 비록 나이가 어려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관직을 사임해서 아무런 직위나 힘도 없는데, 장사언이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잘 대해주는 것을 보고는 깊이 감동받은 것이다. 나중에 진회가 재상이 된 후, 장사언에 일찌기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던 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보답할까를 고민한다. 당시 장사언은 이미 나이가 칠십이 넘었다. 규정에 따르면 발탁대상이 아니고, 바로 퇴임할 나이였다. 진회는 잠시 고민하다가 간부명부에서 장사언의 나이를 10살 줄여버린다. 그리고 그를 초주지주(楚州知州)로 보낸다.


주밀(周密)의 <제동야언(齊東野言)>에도 진회가 조영(曹泳)에게 보답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조영은 무관출신이고, 전공이 있어 조정의 관직을 얻었으며 당시 감황암주세(監黃巖酒稅)의 직을 맡고 있었다. 임기를 마친 후, 관례에 따라 다른 보직으로 옮겨가야 했다. 진회는 당시 재상으로 있었으며, 관리의 임면, 승진, 전보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명부에 조영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를 부른다. 그리고 조영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에 돌연 이렇게 말한다. "조공, 당신은 나의 대은인입니다!" 조영은 깜짝 놀랐고,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어리둥절해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진회가 급히 말을 잇는다: "당신은 아마도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그러자 조영이 대답한다: "소인은 정말 어디에서 재상을 만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회는 집안으로 걸어들어가서, 필기본을 하나 집어서 거지고 나와 조영에게 보여준다. 그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0년0일, 00전오천(錢五千), 조영수재(曹泳秀才絹二疋)" 원래, 진회가 수재(秀才)로 있을 때, 궁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돈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돈을 빌리려 했다. 그런데 그 부자는 단지 5천을 빌려주었다. 그 돈으로는 급한 불을 끄기에 부족하여 진회는 좀더 빌려달라고 했지만, 부자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때, 조영은 그 부자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있었다. 급여가 그다지 많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진회의 사정이 안타깝다고 여겨서 주머니에서 2겸(縑, 실 2줄로 엮어서 만든 얇은 비단. 예전에 보수나 사례로 지급하는 경우가 많았고, 돈을 대신하여 쓰였다)을 꺼내 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내가 아이를 가르치면서 받은 약간의 보수인데, 드리겠습니다." 조영은 그 때의 진수재가 지금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진재상이 된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진회는 다시 아들과 손자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은인에게 감사인사를 드리도록 시킨다. 그러면서 조영은 인의충후(仁義忠厚)한 어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송나라때는 숭문억무(崇文抑武)의 정책을 서서 문인의 지위가 높고 무관의 지위는 낮았다. 그래서 진회는 조영을 문관으로 바꿔주고, 다시 그를 양절전운부사(兩浙轉運副使), 호부시랑(戶部侍郞), 임안지부(臨安知府)로 발탁한다.


이 두 건의 사례를 보면, 진회는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사학자들이 이 일을 기록한 것은 진회가 대권을 독점하고 마음대로 처리하였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사람을 기용하는데 있어서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편파적으로 진행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우리에게 진회의 인간적인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도 피가 흐르고 살이 있으며 심지어 따뜻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악비묘의 앞에 그 쇠로 만들어놓은 역사의 화보에 정형화된 것처럼 냉혹무정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