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선진(先秦, 구석시시대-기원전221년)는 진왕조가 건립되기 이전의 역사시대를 가리킨다. 선진은 하, 상, 서주, 및 춘추, 전국등의 역사시기를 거친다. 좁은 의미의 선진사 연구범위는 중국이 문명시대로 진입한 때로부터 진왕조가 건립되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주로 하, 상, 서주, 춘추, 전국의 몇몇시기의 역사이다. 선진시기에 하왕조이건, 상왕조이건, 주왕조이건 여러 제후국들이 존재했다. 그중 본문에서 얘기할 설국은 하왕조때부터 시작하여, 주왕조대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설국은 하, 상, 주 삼대에 걸친 제후국이다. 존속기간이 1500여년에 달한다. 산동성 등주시(滕州市) 관교진(官橋鎭)과 장왕진(張汪鎭)의 사이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염제(炎帝)의 후예이다. 설국의 군주는 원래 성이 임(任)이다, 설국이 멸망한 후에는 제나라의 규성(嬀姓, 田氏)이 점거한다. 즉 전국사공자중 한 명인 맹상군이 차지하여 설지를 봉지로 삼는다. 설국에 있어서, 존속기간이 1500여년에 달했으므로 중국고대역사상 존속기간이 가장 긴 제후국중 하나이다. 그리고 설국이 멸망한 후, 설국의 사람들은 설을 성씨로 삼는다. 즉 설국은 설씨성의 중요기원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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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말하면 설(薛)은 임성(任姓)의 고국(古國)이다. 제준(帝俊, 즉 帝嚳)의 후예이다. 일설에 따르면, 황제계통의 전욱(顓頊)의 후예이다. <좌전>등 사료에 따르면 임성(任姓)은 태호(太曍)의 후대이다. 설국은 고대 황하하류의 역사가 유구한 나라이다. <산해경.해내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제준이 옹호(禺號)를 낳고, 옹호는 음량(淫梁)을 낳고, 음량은 번옹(番禺)을 낳고, 그가 배(舟)를 만들기 시작한다. 번옹은 해중(奚仲)을 낳고, 해중은 길광(吉光)을 낳으며 길광은 나무로 수레를 만들기 시작한다."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은 이 중장과 후세의 해중이 배와 수레를 만든 시조라는 것은 서로 보완이 되는 증거로 보고 있다. <좌전>은 "설의 황조(皇祖)인 해중은 설에 살면서 하거정(夏車正)이 된다." 그리하여 후인들은 해중을 중국에서 수레를 만들기 시작한 비조로 본다. 또 다른 <통지.씨족>에 따르면 "전욱의 막내아들 양(陽)을 이곳에 봉했다. 그래서 이를 성으로 삼는다. 하왕조때 양의 제12세손 해중도 역시 설에 봉해진다." 그리하여, 아주 명확하게도, 설국이라는 제후국은 하왕조때 시작한다. 즉 기원전20세기경이다. 하우(夏禹)가 재위할 때, 해중은 거정이 된다. 나중에 수레라는 운송도구를 만들었기 때문에 설을 봉지로 받는다. 그의 작위는 후작(侯爵)이다.
설국의 고성(故城)은 산동성 조장시(棗莊市) 등주시 관교진과 장왕진의 사이에 있다. 산동남부지역에서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된 고성유적지이다. 2차례의 대규모 고고발굴을 통해, 설국고성유적지의 현상과 지하에 매장된 상황은 비교적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드러난다. 성의 유적지의 평면은 동서방향이고,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성벽은 동서로 약 3.4킬로미터이고, 남북으로는 2.3킬로미터의 너비이다. 성안에도 성이 있다. 내성의 성벽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외성의 성벽은 여전히 끊어졌다 이어지면서 내성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잔존하는 성벽이 바닥은 너비가 20-30미터이고, 높이는 약 7미터이다. 성문은 8개가 있으며, 그중 남문이 3개, 동문, 북문은 각 2개, 서문은 1개이다. 남동문과 동남문은 소성(小城)의 성문이고, 나머지 성문은 대성(大城)의 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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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중의 12세손인 중훼(仲虺)는 상왕 탕(湯)의 좌상(左相)이 된다. 그리고 임성 설국을 환성(歡城, 虺城)에서 설지로 옮긴다. 상왕조말기 중훼의 후손인 임성(任成)이 다시 나라를 지(摯, 지금의 하남성 여남 동남쪽)로 옮긴다. 주문왕의 부친인 계력(季歷)은 임성의 딸인 태임(太任)을 처로 삼아 주문왕(周文王)을 낳는다. 그리하여, 아주 분명하게도 상왕조말기에서 서주초기까지, 설국과 주왕실과는 인척관계에 있다. 이는 서주건립후, 설국이 여전히 계속 존속할 수 있게 해준다.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정벌한 후, 상왕조가 멸망한다. 그후 주무왕은 임성의 후예인 임진(任畛)을 설후(薛侯)에 봉한다. 그리하여, 주왕조때, 설국은 후작의 제후국이었다. 공후백자남의 5등급 작위로 보면, 설국의 작위는 비교적 높은 편이다. 에를 들어, 노(魯), 제(齊), 위(衛), 진(晋), 연(燕)등 희성(姬姓) 제후국의 국군의 작위가 바로 후작이었다. 주평왕이 낙읍으로 동천한 후, 즉 춘추시기로 접어든 후, 제환공, 진문공등이 중원의 패주를 놓고 다투었다. 이로 인하여 설국등 약소제후국은 갈수록 크게 생존압력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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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춘추시기에, 설국의 존재감은 비교적 낮았다. 모두의 관심은 제(齊(, 진(晋), 초(楚), 진(秦)등 대국들에게 쏠린다. 설국에 있어서, 주변에는 제, 노, 정(鄭), 송(宋)등 대국이 존재했다. 그리하여, 공간을 확장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강역이 주변제후국들에 의해 잠식된다. 개략 춘추말기에서 전국초기에 이르러 설국은 정식 멸망한다. 설국의 멸망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설국이 제나라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으로 기원전418년 제나라가 임성설국을 점령하고 전씨읍(田氏邑)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초나라가 설국을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설국이 멸망한 후 설국에서 도망온 공자등(公子登)은 초나라에서 관리로 지낸다. 초회황(楚懷王)은 패(沛)의 땅을 공자등에게 식읍으로 준다. 공자등은 일족을 이끌고 퍠로 이주하며, 조상이 원래 봉지로 받았던 지방을 씨로 삼아 설씨가 된다.
이에 대하여,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은 만일 설국이 초국에 멸망당했다면, 공자등이 초나라에서 관리를 지내는 것이 원수인 적국을 섬기는 것이니 정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나중에 제나라의 전영(田嬰)의 봉지가 되는데, 설국이 제나라에 의해 멸망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본다. 당연히, 어찌 되었건 설국의 강역은 마지막에 제나라가 점거한다. 전국시대에 제나라에는 전씨대제(田氏代齊)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즉 제나라의 군주가 강(姜)성에서 전씨로 바뀐다는 것이다. 전씨대제후, 전씨는 종실을 제나라의 각지에 분봉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제나라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그중 기원전321년(주현왕48년), 제위왕은 전영을 설지에 봉하고, 설공이라 한다. 전영은 제위왕의 막내아들로(여기에는 의문이 있다), 제선왕의 이복동생이다(이것도 의문이 있다). 맹상군 전문(田文)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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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전영이 죽은 후, 맹상군 전문이 계속 설국의 강역을 자신의 봉지로 삼는다. 맹상군은 부친이 남긴 풍부한 자산을 가지고 설의 땅에서 각국의 인재를 끌어모은다. 문하에 식객이 수천이었다. 진소양왕은 현명한 인재들을 갈구했고, 맹상군의 명성을 듣고, 그를 진나라로 불러와 승상에 앉히려 한다. 얼마 후, 진소양왕은 전문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전문은 제나라로 도망친다. 나중에 제민왕의 상국(相國)이 된다. 한때, 한, 위와 연합하여 초, 진을 물리친다. 제민왕7년(기원전294년), 귀족 전갑(田甲)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제민왕은 전문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한다. 얼마 후 위(魏)로 도망쳐서 상국(相國)이 된다. 일찌기 진, 조, 연과 연합하여 제(齊)를 공격하여 제민왕을 몰아낸다. 제양왕이 즉위한 후, 전문은 중립을 유지한다. 제양왕도 맹상군을 두려워하여 가깝게 지낸다. 그가 죽은 후에 아들들이 자리를 다투게 되고, 설지는 결국 위와 제가 나누어갖게 된다.
진한시기에도 설은 중요한 군현이었다. 예를 들어 진왕조가 건립된 후, 설군(薛郡)을 둔다. 여러차례의 전란을 거쳐 수당에 이르러, 설국의 옛땅은 철저히 경지와 기와조각더미로 전락한다.
설국은 하왕조 초기부터 존재하기 시작한다. 즉 기원전20세기경이다. 기원전418년 제나라 혹은 초나라에 멸망당한다. 존속기간은 1500년이 넘는다. 주왕주의 두배나 된다. 설국이 멸망한 후, 설국의 후인들은 설을 씨로 삼았다. 지금 설씨는 <백가성>중 68위로, 산서, 강소, 섬서, 하북, 복건, 산동등지에 많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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