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주(周)왕조의 통치는 주목왕(周穆王)이후, 전성기에 이른다. 그러나 주려왕(周厲王)의 재위기간에 민생은 도탄에 빠지나, 귀속들은 여전히 주색에 빠져 있었다. 기원전844년, 더 많은 재물을 긁어모아서 마음대로 쓰기 위해, 주려왕은 괵공장보(虢公長父)와 영이공(榮夷公)을 기용하여, '국가독점정책'을 시행한다. 강제로,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왕의 소유로 선포하고, 평민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나무를 하거나, 채집을 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이는 사회 각계층의 이익을 건들였고, 원성이 사방에서 일어난다. 주려왕은 예량보(芮良父)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이공을 경사(卿士)로 발탁하여, 계속 국가독점정책을 시행한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원성이 일어나고, 길거리와 골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주려왕은 위(衛)나라에서 무사(巫師)를 데려와서, 무술로 '비방'을 하는 사람을 감시한다. 그리고 나라여 명을 내려, 사적으로 조정을 비난하는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포고한다. 위나라의 무당은 신령에 가탁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해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이 비명에 죽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공개된 장소에서는 말을 하지 못한다. 길을 가면 서로 눈을 보고, 눈빛으로 뜻을 전했다. 주려왕은 이미 비방언론을 막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소목공(召穆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보다 어렵다" 일단 한번 터지면 수습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언로를 널리 개방하여, 위로는 공경대부에서 아래오는 백공서인(百工庶人)까지,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고 한다. 주려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한다. 그러나 3년도 되지 않아, 많은 백성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다.
기원전 841년, 백성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킨다. 주려왕은 어쩔 수 없이 체(彘, 지금의 산서성 霍州)로 도망친다. 태자 희정(姬靜)은 소목공의 집에 숨는다.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고 소목공의 집을 포위한다. 소공(소목공)은 자신의 아들을 대신 내놓아, 태자의 목숨을 살린다. 주려왕이 체로 도망갔으므로, 이를 역사에서는 "체지란(彘之亂)"이라고 부른다.
주려왕이 체로 도망친 후, 주나라의 동쪽에 있던 제후 위무공(衛武公)이 병력을 이끌고 주나라의 수도 호경(鎬京)으로 온다. 그리하여, 소공이 주려왕의 옛신하들을 대표하여 나서서 위무공에게 잠시 행정을 대행해달라고 요청한다. 자신과 또 다른 대신 주공(周公, 주공단의 후손)등이 보정을 한다. 위무공의 이름은 화(和)이고, 그의 봉지(封地)는 공(共, 하남 휘현)이다. 그래서 그를 공백화(共伯和)라고도 부른다.(일설에는 공백화가 행정을 대행한 것을 공화행정이라고 한다). 공화원년(기원전841년)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사료중에서 확실하게 기년(紀年)을 표시하기 시작한 해이다. 공화14년(기원전828년), 주려왕은 체에서 사망한다. 다음 해, 태자 희정이 즉위하니, 그가 주선왕(周宣王)이다. 공화시대가 끝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화행정의 첫해인 기원전841년을 기년으로 하여 시작한다. 이는 중국의 역사에 이때부터 확실한 기년이 있게 된 것이다. 중국의 전통기년에 따르면, 공화시기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중원역사는 연속하며 끊기지 않는 기년체계를 갖게 된다.
백성의 폭동후 주왕조의 중앙정권은 비바람에 흔들리는 위험한 상태였고, 왕위는 14년간이나 비어 있었다. 그 동안 주공, 소공의 행정과 제후가 왕위를 대행하는 것이 중원대지에 병존했다. 이런 혼란상태는 주선왕의 즉위때까지 계속된다. 그제서야 주왕이 천하공주(共主)의 지위를 다시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주선왕은 주려왕의 장남이 아니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공화시기의 혼란한 국면의 결과이다.
쟁점: 일설에 의하면 이상(二相)이 공화(共和)했다고 한다. 사기를 위시한 정사의 전통적인 견해이다. 주공, 소공의 두 재상이 공동으로 집정했다는 것이다. 소공의 시호는 목(穆)이고 이름은 호(虎)이다. 주공은 <금본죽서기년>에 따르면 주정공(周定公)이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공백화(共伯和)의 간정(干政)이다. <죽서기년>, <세본(世本)>등 사서에서는 공화행정은 바로 공백화가 왕위를 대신하여 천자의 권한을 행사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공백화는 공나라의 제후로 백(伯)의 작위이며, 이름은 화(和)이다.
다만, 공영달(孔潁達)의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는 공백(共伯)과 화(和)를 별개인물로 본다. 공백은 위리후(衛釐侯)의 태자이고, 화는 그의 동생이다. 화가 공백을 공격하여, 공백은 위리후의 묘도로 들어가 자결한다. 그리고 화가 위나라의 국군이 된다. 그가 바로 위무군이다. 즉 공백화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한서.지리지.하내군> 맹강(孟康) 주석에 이렇게 되어 있다: "공백(共伯), 입위삼공자야(入爲三公者也)" 그러나 이명(彛銘, 청동기명문)의 기재를 분석하면, 공백화는 먼저 '사(師)'의 직위를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삼공'에 올랐다. <원년사태궤(元年師兌簋)>의 명문에는 "사화보사좌우주마(師和父司左右走馬)"라는 말이 있다. 전문가들은 이 '사화보'가 바로 공백화라고 본다. 그리고, <사신정(師晨鼎)> <사유궤(師兪簋)> <간궤(諫簋)>와 <미사궤(微史簋)>에 기재된 '사마공(司馬共)'은 사마로 직위가 오른 후의 공백화라고 본다.
이명의 분석에 따르면, 승진시간은 주려왕 3년 내지 5년이다. <사궤>의 명문을 보면, "유원년정월초길정해(惟元年正月初吉丁亥), 백화보(伯和父)...."이라고 되어 있다. 소위 '유원년정월초길정해'는 주려왕 기년의 정월 정해일과 초길의 날이 부합하지 않는다. 만일 공화기년원년 임오삭 정월정해 육일로 보면 초길이 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유왕원년'을 '공화원년'으로 본다.
하상주단대공정은 공화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주려왕이후의 독립기원이 된다. 2003년, 서주의 청동래반(靑銅逨盤)이 섬서성 미현 양가촌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명문에는 주려왕이후 바로 주선왕이다. 공화시기를 독립기년으로 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공화에 대한 논쟁이 붙는다.
공화행정은 역사상의 대사건이다. 그리고 공화원년은 중국역사상 확실하게 기년을 기록한 최초의 해이다. 그래서 의미가 중대하다. 그후 중국의 역사는 맥락이 분명해지고, 지금에까지 이른 것이다. 비로 이 일로 인하여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도 미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전의 중국역사는 그저 전설과 반신사(半信史)이다. 시간맥락이 아주 모호하다. 그저 고고발굴을 통하여 추적해볼 수밖에 없다.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공화행정은 중국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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