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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순(舜)임금의 유우씨(有虞氏) 정권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by 중은우시 2020. 9. 5.

글: 중화문무군(中華文武君)

 

미숙(美叔), 남, 성은 요(姚), 다른 이름은 장익(章鷁), 호는 유우씨. 중국씨족연맹시대 제순(帝舜) 유우씨정권의 제2대 임금. 

 

요미숙의 조부는 제순유우씨정권의 제1대임금인 요중화(姚中華, 즉 虞舜)이며, 부친은 우순의 아들인 상후(商侯) 요의균(姚義鈞, 일명 商鈞)이다. 요미숙은 우순6년(기해년, 기원전 2,122년)에 순의 봉지인 우읍(虞邑, 지금의 산서성 운성 영제시 우향진)에서 태어난다. 그는 우순의 장손으로 총명하고 영리했다. 그리하여 부친과 조부의 사랑을 받는다. 우순은 자주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고금의 일들을 얘기해주며 그에게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가르쳤다. 누가 알았으랴. 요미숙은 수화침두장강피(繡花枕頭裝糠皮)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좋지만, 속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공부에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가르침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예쁜 여인만 보면 즉시 자신의 품에 끌어안으려 했다. 그는 15세때부터 여자를 접촉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여인을 만났는지는 그 자신만 알 것이다.

 

기원전2,099년, 사우(姒禹)가 제위를 빼앗기 위하여, 죄명을 엮어서 제순을 강압하여 그의 아들 요의균과 그의 일가를 모두 상읍으로 유배보낸다. 단지 요의균의 아들 요미숙만 제순의 곁에 남겨둔다. 겉으로는 제순에게 관심을 나타내고, 장손을 그의 곁에 남겨 효도를 다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기원전2,089년, 사우는 이미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다.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그는 84세된 제순을 남순(南巡) 보낸다. 그리하여 제순이 강남에서 병사하게 만든다. 사우는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그리고 인심을 매수하기 위하여, 스스로 제위에 오르지 않고, 거짓으로 우순의 손자인 요미숙을 제위에 앉힌다. 이렇게 하여 그가 군왕을 박해한 진상을 은폐한다. 또한 그가 충성을 다한다는 명성도 없는다. 실로 용심양고(用心良苦)라 할 수 있다. 

 

요미숙은 즉위후 도읍을 포판(浦坂)으로 한다. 계유년(기원전 2,088년)이 미숙원년이다.

 

요미숙은 비록 제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없었다. 그는 단지 유명무실한 허수아비제왕이었다. 조정의 집정대신들은 여전히 사우의 손에 조종당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권력에 그다지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생의 향락이다. 천하흥망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매일 실컷 놀고 즐기면 그만이었다. 곁에 미녀만 있어주면 그만이다.

 

기실 사우는 일찌감치 그의 사람됨을 간파했다. 그가 인물이 될 수 없는 플레이보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를 제위에 앉힌 것은 사우의 정치수단이다. 그를 이용하여 자신이 과도단계의 역사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사우는 극력 여미숙의 사치와 욕망을 만족시켜준다. 그가 하루종일 음악과 춤과 미녀에 둘러싸여 지내도록 해준다.

 

미숙의 궁중에는 후궁과 궁녀가 백여명이 있었다. 모두 사우가 각지에서 뽑아올린 미녀이다. 그는 여색을 탐했고, 밤낮으로 탐했다. 강건한 신체도 점점 쇠약해진다. 오십도 되지 않아 이미 뼈만 남게 된다.

 

누군가 사우에게 미숙을 폐하고 아예 제위에 오르라고 권한다. 사우는 웃으며 머리를 흔든다. 그는 천하를 얻으려면 먼저 민심부터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하의 백성들이 따르면, 강산사직은 공고해진다. 그는 세상사람들에게 우순정권의 타락과 무능을 보여주려 했다. 그는 우순의 천자가 스스로 제위를 자신에게 양위하도록 만들려 했다.

 

미숙16년(술자년, 기원전2,073년) 요미숙의 몸은 날로 쇠약해진다. 그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조정에 나와서 대신들을 모으고 하늘에 제사지내고 조상에 고했다. 사우를 제위의 후게자로 세운 것이다.

 

미숙18년(경인, 기원전2,071년), 사우는 다시 여미숙에게 강남미녀를 바친다. 미숙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두 여자를 밤낮으로 끼고 산다. 얼마 후 그는 사망한다.

 

정통역사서에는 이 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정통사서는 유가학설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당요(唐堯), 우순(虞舜)은 모두 유가가 만들어낸 성현(聖賢)이다. 성현에게 어찌 이런 불초자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우순이 백살까지 살았다고 쓰면서, 감동적인 선양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대대로 전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적 사실은 오히려 황당무계한 야사로 되어 민간에서 몰래 전해져 내려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문헌에 기재된 것만이 역사라고. 민간전설은 역사가 아니라고. 고고발견이나 전문가연구성과도 역사로 볼 수 없다고 한다. 민간전설은 놔두고라도, 후자는 과학연구성과이다. 그런데 어찌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후고박금(厚古薄今)의 주장은 극단적이고 잘못된 것이다. 현대과학의 급속한 발전은 완전히 옛사람들이 잘 모르던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사서에 기재된 것이 반드시 진실한 역사라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마천의 <사기>에는 많은 잘못이 있다. 사마천이 비록 중국의 사성(史聖)이지만, 금무족적(金無足赤), 인무완인(人無完人)이다. 그는 그의 한계가 있다. 우리가 역사를 탐색하고 연구할 때, 이들 명인들의 권위에 억눌릴 필요는 없다. 파구(破舊)해야 입신(立新)할 수 있다. 중국역사연구는 대담한 돌파가 필요하다.

 

다시 돌아와서, 요미숙이 34세에 즉위하여 19년간 재위했고 미숙18년(경인, 기원전2,071년)에 사망한다. 향년 52세이다. 사후에 포판성의 동남쪽에 묻히고, 제호는 '미숙'이며 존호는 '제순유우씨'이다.

 

요미숙이 죽은 후, 사우가 정식으로 즉위하고 국호를 하(夏)로 한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왕조가 성립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