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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영락제)

정난지역(靖難之役)후 주체(朱棣)는 왜 5번이나 몽골정벌에 직접 나섰을까?

by 중은우시 2020. 10. 31.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정난지역이후, 주체는 성공적으로 조카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으로부터 황제위를 빼앗는다. 그러나 후세인들은 그가 '황위를 찬탈'한 일에 대하여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를 '영락대제(永樂大帝)'로 칭송한다. 주체의 주요 공적을 나열해 보자면, 북경천도, 영락대전편수, 정화하서양, 안남수복, 오정막북(五征漠北)이 있다. 특히 5차례에 걸쳐 막북을 친정(親征)한 것은, 후세의 찬양을 받는다. 자고이래 제왕이 직접 정벌에 나서는 일도 많지 않지만, 주체는 역사상 최초로 직접 장성이북을 친정한 황제이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된 것이다.

 

주원장이 원왕조를 쫓아낸 후, 몽골통치자의 잔여세력은 완전시 소멸되지 않고, 새외(塞外)로 도망쳐 '북원(北元)'을 건립한다. 중원에서는 매년 전쟁이 이어지고, 민생이 피폐해져서 주원장은 대규모의 북벌전쟁을 벌여 북방의 우환을 제거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주로 힘을 사회생산력을 회복시키고, 민생을 발전시키는데 집중했다. 북원등 변방세력에 대하여는 정치적으로 '초안(招安)'의 입장을 취하며, 군사적으로는 적극방어정책을 쓴다. 그리하여 명왕조와 북원은 남북으로 대치하는 국면이 한동한 형성된다.

 

우량카이부(兀良哈部)는 정난지역때 전투에 참여한 공이 있으므로, 주체는 처음에 몽골에 대하여 회유정책을 취한다. 영락7년(1409년)에 이르러, 동몽골의 수령 부냐시리칸(本雅失里汗)은 명나라의 사신 곽기(郭驥)를 처형하고, 이어서 케를렌전투(Battel of Kherlen, 臚胊河之戰)에서 명나라의 10만대군을 섬멸한다. 주체는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친히 50만대군을 이끌고 출정한다. 이렇게 하여 14년에 이르는 몽골북벌대전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주체의 이 14년전투의 전과는 어떠했을까?

 

영락8년, 일정막북(一征漠北). 이 전투의 전과는 기실 아주 난감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이월에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명나라의 대군은 3개월간 부냐시리칸의 몽골군대를 만나지 못한다. 50만대군이 마치 사냥한 것같았다. 오월초에 이르러 약간의 전과를 거둔다. "호구(胡寇) 몇 명과 양, 말, 군수물자"를 획득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오논강(斡難河)과 바이칼호수 동쪽에서 명군은 부냐시리와 마주쳐 격전을 벌인다. 다만 부냐시리칸은 죽지 않았고, 서쪽으로 도주한다. 명군은 군량이 조달되지 않아, '군사들중 먹을 것이 엇어 죽는 자가 많았고, 황제가 이를 듣고 진노했다" 오개월에 걸친 제1차 원정은 이렇게 끝나고 만다.

 

영락12년. 이정막북(二征漠北). 이 시기에 몽골의 오이라트부(瓦剌部)가 굴기하기 시작하여, 명왕조의 변방에 위협이 된다. 주체의 제2차 어가친정은 마찬가지로 50만대군을 이끌고 시작된다. 명군은 투라강(圖拉河)에서 대포로 오이라트군대를 크게 손상입힌다. <태종실록>의 기재에 따르면, 명군이 "적 수백명을 죽였다" 그후 주체는 철기를 이끌고 공격을 감행한다. 쌍방은 격전을 벌였고, 사상자가 무수히 나온다. 오이라트부는 큰 손실을 입어, 이미 표면적으로 명왕조에 신복(臣服)한 타타르부(韃靼部)의 아루타이(阿魯台)에 병합당한다. 아루타이는 세력이 강대해진후 공물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고, 병력을 보내 명나라변경을 침입하기 시작한다.

 

영락20년, 삼정막북(三征漠北). 이번에 주체는 창끝을 타타르부의 아루타이에게 겨눈다. 아루타이는 명군과 정면으로 맞서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체가 몽골로 진입하기 전에, 타타르부는 수령 아루타이의 지휘하에 멀리 도망쳤다. 주체와 그의 30만대군은 헛걸음을 한 것이다. "추로(醜虜) 아루타이는 소식을 듣고 겁을 먹어, 물자, 소, 양, 말, 낙타를 이끌고 멀리 도망쳐 숨었다." 주체는 끝까지 쫓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구월말 군대를 이끌고 회군한다. 결국 얻은 전과는 "적 수십명을 죽인 것"이다.

 

영락21년, 사정막북(四征漠北). 아루타이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명나라의 변경을 침입한다. 주체의 제4차 정벌에도 아루타이는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우회도피전술을 쓴다. 그러나, 소규모의 전투과정에서 명군은 아루타이의 군사력을 소모시켰고, 이로 인하여 아루타이는 다시 되살아난 오이라트부에 멸망당하고 만다.

 

영락22년, 오정막북(五征漠北). 주체는 연속 3년간 어가친정한다. 이는 그의 마지막 몽골친정이기도 하다. 이번 출정에서도 여전히 빈손으로 돌아왔다. 명군이 몽골에 진입한 후, "황량한 평야에는 먼지와 잡초만 가득했다. 수레자국과 말발자국은 모두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도 도망친지 오래된 듯했다." 몽골인은 다시 한번 주체와 술래잡기 놀이를 벌인다. 주체는 '영국공(英國公) 장보(張輔)등으로 하여금 산골짜기를 수색하게 하였으나, 주변 삼백여리에 적 한 명 말 한마리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한 장수는 1달의 양초를 주면 적의 영토 깊숙히 쳐들어가겠다고 했으나, 주체는 자신이 이미 너무 적의 영지로 깊이 들어왔다고 여겨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군대를 철수시킨다.

 

1424년 8월 12일, 주체는 회군하는 도중에 둬룬(多倫) 북쪽의 유목천(楡木川)에서 병사한다. 오전막북, 오전오첩은 후세에 주체의 문치무공을 칭송하는 중요한 선전자료가 된다. 다만, 이 일련의 승리와 부합하지 않는 점은 명나라의 주체의 집권시기에 새외에 대한 통제력은 강화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주원장시기만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겨우 25년후에 '토목보의 변'이 발생하여 황제 명영종이 몽골인에게 포로로 잡히기까지 한다.

 

다섯차례의 몽골친정을 돌아보면, 명나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뿐아니라, 주체가 친히 이끈 수십만대군은 뇌성대우점소(雷聲大雨點小). 벼락소리는 컸지만 비는 조금밖에 내리지 않는 형국이었다. 초원의 철기는 멀리 도망쳤고, 쫓아가서 싸우지도 못했으며, 명나라의 수십만대군은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오히려 명나라측은 이 5번의 친정으로 대량의 인력, 문력을 소모했고, 명나라는 크게 손해를 입게 된다. 그런데, 주체는 왜 다섯번이나 몽골친정을 고집했을까?

 

주체는 용맹하고 공을 세우기 좋아했다. 엄청난 위업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했다. 매번 출정할 때마다 앞뒤로 사람들이 따르니 그 장면이 대단했다. 출정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든 말든 항상 칭송을 받는 것이다: "위엄과 덕이 더하니 한고조 유방보다 대단하지 않는가?" "황제의 수레가 가는 곳은 한무제 당태종도 가지 못했던 곳이다" 이런 과장된 칭찬에 주체는 혼자서 기뻐했을 것이니, 그 재미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주체가 황위를 올바르게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통적인 즉위가 아니었다. 그는 위대한 업적으로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사서에서 자신의 업적을 크게 써주는 것이 필요했다. 당태종 이세민이 '정관지치'로 '현무문사변'을 가릴 수 있었던 것처럼. 중국역사상 가장 걸출한 황제중의 하나로서 주체의 공덕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단지 오정막북의 건은 그저 주체의 웅재대략과 군사재능을 보여주었지만, 대명왕조로서는 백성을 해치고 재물을 날려버린 외에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