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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징기스칸)

징기스칸이 태어나기 전까지 몽골초원의 세력판도는....?

by 중은우시 2020. 10. 29.

글: 문재봉(文裁縫)

 

12세기초의 중국은 대당제국이 멸망한지 이미 200여년이 지났고, 오대십국의 혼전이 끝나면서 마침내 북송과 요, 그리고 서하정권이 굴기한다. 그중 송과 요의 세력이 가장 컸다. 서하는 항상 송과 요의 사이에서 좌우봉원(左右逢源), 견봉삽침(見縫揷針)하면서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고 오히려 이익을 챙겼다. 1115년에 이르러, 돌연 동북지방에서 여진족이 나타난다. 그들의 수령인 완안아골타에 의해 신속히 동북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자신의 정권을 건립한다. 국호는 금이라 한다. 요나라는 처음에 이 신흥정권을 경시했다. 남쪽의 북송등 더더구나 멸시했다. 1120년 금나라가 사신을 보내, 요나라를 우회해서 북송을 찾아가 앞뒤에서 요나라를 협공하여 멸망시키자고 제안한다. 북송은 동의했다. 그리하여 북송과 금은 마음이 맞아, 요를 멸망시킨 후에는 연운십육주를 북송에 넘겨주고, 송이 원래 요에 보내던 세폐를 금에 지급하기로 약속한다. 요나라의 나머지 땅은 금에 귀속시키기로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송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연운십육주는 요나라에 강점된지 오래 지나서, 돌려줄 수 있으면 돌려받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받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세폐를 요에서 금으로 바꾸어 지급하더라도 재정에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북송은 자신이 이득만 있고 손해는 없는 장사를 했다고 여겨, 희희낙락한다. 그러나 예상외로 금나라는 이어진 전쟁에서 아주 용맹했다. 가볍게 이미 건국한지 210년이나 된 요나라정권을 분쇄해버리고, 이어서 이빨과 손톱을 자신의 동맹인 북송에 들이민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었던 북송은 전혀 버티질 못하고, 순식간에 일패도지한다.

 

1126년, 금나라의 대장 완안종망, 완안종한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다. 북송은 대패한다. 다음 해 삼월, 금군은 변경을 함락시키고, 송나라의 태상황 송휘종, 현임황제 송흠종 부자 및 황족, 비빈, 귀족, 신하등 3천여명을 포로로 잡고, 변경성을 한바탕 약탈한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정강지변'이다. 송휘종이 아홉째아들인 조구가 회하남안으로 도망칠 수 있었고, 그가 1127년에 즉위하니 바로 송고종이다. 역사상 조구가 남천하여 건립한 정권을 남송이라 부른다.

 

12년후인 1140년, 남송의 저명한 항금장수 악비가 제4차북벌을 진행한다. 금나라의 총사령관 완안종필을 격퇴시키고, 황하남북의 실지를 회복한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돌아오라는 조서를 받는다. 그래서 얻었던 지역은 하루아침에 모두 잃게 된다. 1142년, 남종조정에서 박해를 받던 악비는 대리시의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는다. 이때부터 송과 금은 때로 싸우고 때로 평화롭게 지내며, 남북을 나누어 가지는 시대가 된다. 중국북방의 정치국면은 새롭게 판이 짜진다. 다만 천하는 이로 인하여 더욱 태평해지지는 않았다.

 

사실상, 한바탕의 경도해랑(驚濤駭浪)이 밀려올 판이었다. 이번의 주인공은 이전까지는 이름없는 부족이었으나 그후 대명을 떨치게 되는 몽골이다.

 

몽골(蒙古)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당나라때의 사서이다. 당시는 방대한 종족군락인 실위(室韋)의 한 갈래였다. 7세기초, 몽골인은 그들의 조상이 거주하던 아르군(額爾古納)강유역을 벗어나, 오논(鄂嫩)강중하류의 부르칸산(不兒罕山, 지금의 몽골국 경내의 켄티산)지구로 이주한다. 몽골인들은 이 아름다운 초원에서 번성하고 인구가 급속히 증가한다. 그리하여 서로 지배종속관계가 없는 대소성씨와 부락으로 나뉜다. 12세기초, 몽골부의 보르지긴씨(孛兒只斤氏)귀족 카불칸(合不勒)이 주변의 10여개 부락과 씨족을 통일하고, '하무헤이 망호로'(그 의미는 전체 몽골이다)라는 부락연맹을 건립하여 몽골부락의 최초 '칸'이 된다. '전체몽굴부락연맹'을 줄여서 '몽골부'라 부른다. 이는 각각의 독립적인 우두머리가 있는 부락씨족으로 구성된 연합체이다. '칸'은 맹주이고, 맹주의 아래에 각 씨족의 우두머리 또는 추장이 있다. 이 연맹이 탄생한 날로부터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몽골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몽골부는 나중에 징기스칸이 건립하게 되는 대몽골칸국의 전신이다. 1135년부터, 몽골부는 카불칸의 지도하에 금나라의 북부국경에서 계속하여 규모가 비교적 큰 습격전을 일으킨다. 이때 이미 패주로 성장한 금나라는 오랫동안 이 초원부락의 도발을 용납하지 않았다. 금나라는 1139년, 그리고 그후 1147년 두 번에 걸쳐 몽골부에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의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연전연증의 여진족 철기가 인원도 많지 않은 몽골인들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것도 엉망진창으로. 어쩔 수 없이 몽골에 화해를 청한다. 협상을 거쳐, 금나라는 하이라르(海拉爾)이북의 27곳의 단채(團寨)를 할양하고, 매년 몽골에 대량의 소, 양, 곡물을 보내기로 하며, 몽골부의 독립국가지위를 인정한다. 이렇게 하여 몽골부는 크게 기세를 드높인다.

 

날로 강대해지는 몽골부는 비록 금나라황제의 골치거리였지만, 다행히 그들의 세력은 불칸산과 주변지역에 국한되었다. 실제로 당시 몽골초원에는 몇 개의 몽골왕국과 실력이 엇비슷하거나 더욱 강대한 부족집단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옹구드(汪古, Onggud), 케레이트(Kerait, 克烈), 메르키트(Merkit, 蔑兒乞), 타타르(Tartar, 塔塔兒), 나이만(Naiman, 乃蠻)이 있었다. 기실 이 명칭의 유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다. 800여년전에 그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무서운 폭풍이 도래하기 전에, 이곳의 주도권은 아직 몽골인에게 속해 있지 않았다. 이전에 몽골초원은 한번 또 한번의 명성이 혁혁한 소수민족정권이 들어섰다. 일찍 ㅣ유라시아대륙에 거대한 놀라움과 강인함을 보여준 왕조들이다. 진한시기의 흉노, 남북조시대의 선비, 유연, 그리고 수당시기의 돌궐, 회흘. 하나하나의 초원제국이 이곳에서 나타나고, 흥성하고, 쇠퇴한 후, 뒤에 일어난 유목왕조로 대체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북방초원의 역사무대에서 철저히 사라진다. 이렇게 반복되는 교체는 천여년간 지속되었다.

 

840년에 이르러, 북방초원에는 진정한 난세가 도래한다. 이 해에 원래 초원에서 이름없던 돌궐계부족인 키르기즈(Kirgiz, 黠戞斯)족이 돌연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일거에 백년동안 몽골초원의 유일한 주인이었던 회흘제국을 멸망시킨다. 키르기스는 초원을 통일할 강대한 능력이 없었다. 몽골초원은 이때부터 기나긴 권력의 진공기를 맞이한다. 각 세력이 그 틈을 타서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이런 군룡무수의 난세에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게 된다.

 

몽골초원은 고비사막을 경계로 하여 대막남북으로 나뉜다. 대막이남은 기후가 상대적으로 온화하고, 물산도 비교적 풍부하다. 그리하여 금나라의 세력범위에 가까웠다. 이곳의 사람들은 일찌감치 금나라에 귀순했다. 옹구드부는 당나라때 저명한 사타인(沙陀人)의 후손이다. 막남(漠南)의 유목부락중 세력이 가장 강하고, 가장 문명화된 민족이다. 그들은 몽골초원의 동남부에 위치하여, 고비지구의 심장, 어얼도스사막의 황하가 U턴하는 곳의 북쪽이다. 이곳은 금, 서하 양국이 국경선이기도 했다. 옹구드부는 금나라체 충성하고, 금나라의 국경을 지켰다. 서하와 막북몽골, 케레이트, 나이만등 유목민족의 침입을 방어했다. 대막의 북쪽에는 부락이 아주 많았다. 당시에도여전히 군룡무수의 혼란국면이었다. 막북은 기후가 한랭하고 건조하다. 농작물이 자라기에 적합치 않고, 생존환경도 열악하다. 인구는 희소하며, 수공업이 아주 낙후되었다. 현지인들은 유목을 위주로 하고, 결려(結廬)하여 집으로 삼았으며, 거처가 고정되지 않았고, 목초를 따라 1년 사계절 서로 다른 초원으로 이동했다. 큰눈을 만나거나 가뭄이 와서 가축이 많이 죽게 되면 유목민들은 생존의 도구과 음식의 원천을 잃게 된다. 그러면 위험을 무릅쓰고 부락 우두머리의 군대에 가담하여 다른 유목부족을 약탈하게 된다.

 

케레이트는 역사가 유구한 민족이다. 몽골왕국의 서쪽에 위치한다. 몽골 보르지긴씨의 유목지와 붙어 있어, 관계가 밀접한 이웃부족이다. 또한 당시 막북동부에서 실력이 가장 강대하고, 영지가 가장 광활한 대부락연맹이기도 했다. 케레이트연맹은 6개의 부락으로 구성되었다. 유목은 툴라(土拉)강, 오르홍(鄂爾渾)강상류와 항가이산(杭愛山)지구에서 유목한다. 이웃부족인 나이만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언어와 풍습은 돌궐인과 비슷했다. 그들은 아주 돌궐화한 몽골인이라 할 수 있다. 몽골의 서북면에는 아주 호전적인 메르키트부가 있다. 이들은 셀렝가(色楞格)강의양안과 오르홍강하류의 삼림지역에서 유목했다. 수량이 많고 전투에 용맹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3개 성씨로 나뉘는데, 매 성씨마다 자신의 우두머리가 있다. 이 3개성의 메르키트인들은 자주 각자 혹은 연합하여 이웃부락을 습격했다. 타타르는 몽골의 동쪽이웃부족으로 금나라의 통치를 받았으며,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원'이라고 일컬어지는 후룬부이르(Hulunbuir, 呼倫貝爾)지역을 가지고 있었다. 당나라말기 돌궐이 쇠망하고, 타타르는 점점 강대해진다. 그들의 몇잉은 오랫동안 북방의 여러 유목부락을 널리 칭하는 명칭이 되었다. 이를 보면 타타르인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 있다. 케레이트, 메르키트, 타타르, 몽골은 당시 막북동부초원에서 가장 강대한 4개의 세력집단이었다. 그들간에는 실력차이가 크지 않았고, 서로 명쟁암투를 계속 벌였다. 그들간에는 때로 싸우고 때로 화해하며, 여러 해동안의 은원관계가 복잡하고 어지러워 해결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깨끗하게 잘라말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동부초원에서 4대부락연맹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전체 서부초원의 패주는 나이만이다. 그들은 몽골초원에서 가장 용맹한 민족으로 돌궐인의 후예이다. 그들의 영지는 항가이산 서쪽으로 알타이(阿爾泰)산의 서록에 분포되어 있다. 서북으로는 이르티시(額爾齊斯)강까지, 남을는 준가르(準噶爾)분지사막까지, 막북의 1/3이상의 광활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투루판분지와 천산의 회흘문화중심지와 가장 접근해 있어서, 나이만은 당시 막북초원에서 문화가 가장 발달한 유목민족이다. 나이만의 물질문명은 상대적으로 아주 발달해 있었고, 추위와 가난의 고통에 시달리던 막북의 다른 부락들이 선망해 마지 않았다. 재물, 부락민, 영토를 빼앗기 위해, 나이만은 강대한 인근 케레이트부락과 오랫동안 대치상태에 있었다.

 

막북에는 위에서 언급한 5대부락연맹을 제외하고 이들 5대부락연맹과 예속관계가 없는 크고 작은 백개가 넘는 대소부락이 있었다. 그중 대흥안령서록에서 유목생활하던 옹기라드(Onggirad, 弘吉剌)부는 몽골인의 한 갈래이다. 또한 비교적 큰 부락연맹이기도 하다. 다만 당시에 통일된 지도자가 없어, 몇몇 서로 다른 성씨의 우두머리들이 느슨하게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5대연맹과 비교하면 실력의 차이가 컸다. 5대부족연맹처럼 강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옹기라드인은 강자들의 틈새에서 생존하는데 뛰어났다. 그들은 한편으로 자신들의 동쪽에 있는 금나라 및 타타르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동시에 그들 서쪽의 이웃부족인 몽골과도 통혼관계를 유지했다. 어느 한쪽에도 밉보이지 않는 호인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골호인같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하게 그들의 성격이 불과 같은 두 이웃부족간의 반세기동안 이어지는 전쟁의 불꽃을 일으키게 했고, 이로 인해 전체 막북ㅊ원은 흉험한 분쟁에 휩싸이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한 남자때문이다. 옹기라드부의 사인디긴(賽因的斤)은 너무나도 평범한 노인이다. 이 보통의 노인이 어느날 병이 들어 병석에 눕는다. 사인디긴의 가족은 큰 돈을 들여 이웃 타타르부에서 유명한 의원인 사만교의 무당을 데려온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명의를 부른 후, 환자의 병세가 더욱 악화된 것이다. 결국은 죽고 만다. 사망자의 가족들은 사인디긴이 무당때문에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 무당에게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다만 한 사람은 성깔이 있었다. 바로 사망자의 언니의 남편인 몽골인이다. 그 이름도 유명한 카불칸이다. 카불칸은 원래 옹기라드부로 와서 사인디긴의 병세가 어떤지 보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카불칸은 분노하여 타타르의 무당을 죽여버린다. 이렇게 되니 타타르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병력을 이끌고 와서 그들의 무당을 위해 복수하겠다고 한다. 카불칸의 7명의 아들은 부친보다도 성격이 더 불같았다.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카불칸을 돕기 위해 달려와서 타타르인들과 전투를 벌인다.

 

이번 전쟁은 금나라의 주목을 끌게 된다. 금나라조정은 이번 기회에 몽골과 타타르 양대세력이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어 그들이 남쪽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막을 좋은 기회라 여긴 것이다. 당시 몽골인은 금나라의 가장 두려운 적수였으므로, 금나라조정은 타타르를 지지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하여 금나라와 타타르가 연합하여 공동으로 몽골인에 대항하게 되었다. 금나라의 강대한 재력지원과 온갖 방법으로 계속 선동하다보니, 전쟁은 여러 해동안 이어진다. 양대부족은 모두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된다. 그리하여 양측 모두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어부지리를 노리던 금나라황제는 기뻐해 마지 않았다. 카불칸은 용맹했지만, 여러 해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을 겪다보니 그도 체력이 더 이상 받쳐주지 못했다. 결국 어느날 이 불요불굴의 몽골영웅도 사인디긴처럼 병석에 들어눕는다. 개략 1240년대말에 사망한다. 우두머리가 죽자, 몽골부는 자연히 칸위계승문제가 등장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카불칸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모두 건장하고 힘이 있으며, 용맹했다. 장남인 오킨-바르칵(Okin—Barqaq, 斡勤巴兒黑)은 더욱 지용을 겸비하고, 풍모도 당당해서 인중용봉의 대단한 인물이었다. 카불칸의 일곱아들은 몽골왕국에서 모두 '키얀'(乞顔)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급류(急流)라는 것이다. 6명의 형제들은 빠른 물살처럼 거침없고, 싸우면 파죽지세라는 뜻이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들의 자손은 키얀이라고 부르게 된다. 보르지긴씨족중에서 이름을 날리는 키얀가족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카불칸은 임종전에 칸의 지위를 일곱 아들 중의 누구에게 넘기지 않고, 그의 당형제인 암바가이(Ambaghai, 俺巴亥)에게 넘긴다. 카불칸은 개략 나이가 자신과 비슷한 이 중년인이 노련하고 진중하여, 위기의 순간에 쉽게 충동되는 일곱 아들보다 대국을 장악하기에 낫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암바가이는 보르지긴씨족중 또 다른 갈래인 타이치우드(Taichiud, 泰赤烏) 가족출신이다. 암바가이는 호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몽골인들이 하루빨리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암바가이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할 것을 극력 주장한다. 암바가이는 간고의 노력을 통해, 타타르와 화해한다. 조건은 암바가이칸의 친딸을 타타르의 오이라트(Oirat, 阿亦里兀惕)부나 보루우트(博魯兀惕)부의 한 수령에게 시집보내는 것이다. 타타르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리고 전체 몽골인의 출로를 찾기 위해, 암바가이는 직접 험지로 뛰어들기로 결정한다. 딸을 데리고 타라트인의 영지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평화를 갈망한 암바가이 부녀는 타타르인의 영지에 들어서자마자 타타르인의 또 다른 부족인 주인(主因)부에 붙잡혀, 금나라로 압송된다. 금나라조정은 암바가이 및 동시에 타타르인에게 붙잡혀온 카불칸의 장남이자 몽골제일용사인 오킨-바르칵에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죽여버린다. 암바가이칸을 따라왔던 바르하츠(巴剌合赤)는 죽어라 도망쳐 몽골로 돌아간다. 전체 몽골귀족에게 암바가이의 유언을 전한다: "카불칸의 넷째아들 쿠툴라(忽圖剌)을 칸으로 삼고, 나의 아들 카단(合丹)은 전심전력을 다해 새 칸을 보좌하라. 너희는 반드시 나를 위해 복수해달라!"

 

암바가이칸과 오킨-바르칵의 참사는 몽골인의 마음에 복수의 분노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이런 복수심에 원래 서로 흩어져서 단결하지 않던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몽골부는 오논강가의 호르호나헤이촨(豁兒豁納黑川)삼림에서 긴급히 귀족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새로운 칸을 추대한다. 당시는 원시사회후기에 처해 있던 몽골부는 민주집중제를 중시했고, 크게는 부락연맹에서 작게는 씨족부락까지 모두 민주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지도자가 한 결정은 전체 귀족대표회의에서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효력이 발생했다. 그래서 당시는 모든 일을 일인자가 생각하는대로 결정되지는 않았다. 이런 민주적으로 일처리하는 회의형식을 '쿠릴타이(忽里台)대회' 혹은 '대호라아(大呼喇兒)'이라 불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번 귀족대표회의는 몇달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매일 연회를 베풀어, 몽골부가 가지고 있던 술과 고기를 모조리 다 먹고 마셔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비록 이전 칸이 유언으로 쿠툴라를 칸으로 세우라고 했지만, 당시 쿠툴라 일곱형제의 세력은 암바가이 아들들에 필적할 수 없었다. 암바가이는 10명의 아들이 있었고 하나같이 모두 보통내기들이 아니었다. 가장 잘하는 것이 싸우는 것이었다. 원래 이때 카단이 선거에서 쿠툴라를 이기는 것이 이미 대세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 열형제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다. 각자 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게 된다.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몽골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러자 몇몇 몽골의 원로들이 나섰다. 나라에 군주가 없을 수는 없다. 모두 상의해서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면, 돌아가신 칸의 유명에 따라 쿠툴라를 칸으로 옹립하면 어떠냐. 귀족들은 몇달동안 먹고 마시고 노는데도 지쳤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집에는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계속 여기서 토론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루루 그 말에 찬동하게 된다. 쿠툴라칸은 절대다수의 찬성표를 받아 몽골의 제3대 칸이 된다. '비수불류외인전(肥水不流外人田)" 눈앞에서 다 익은 오리가 날아가버린 셈이 되었다. 암바가이의 열형제들은 모두 후회막심했고, 이때부터 다시 예전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전설에 따르면 쿠툴라칸은 목소리가 아주 컸고, 팔힘도 무척 셌다고 한다. 사람을 화살처럼 둘로 꺽어버릴 수 있다고 한다. 매끼마다 양 한마리를 먹었다고 하니 천신과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천신같은 인물이 칸의 자리에 오른 후, 암바가이의 아들 카단과 함께 병력을 일으켜 타타르부를 친다. 전후로 13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여전히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짧은 몇년의 시간동안, 칸의 자리에는 카불칸의 키얀씨와 암바가이계의 타이치우드씨간에 두번 자리바꿈을 한다. 그리하여 몽골은 무형중에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이 양대씨족은 서로 명쟁암투를 벌이며 서로 시기하고 원한도 생긴다. 몽골인들이 여러차레 타타르인에 대한 군사공격을 감행할 때 왕왕 통일된 군사지휘가 이루어지지 않고, 각자 나뉘어 싸우는 바람에 군대의 전투력이 크게 약해졌었다. 대외전투의 실패와 내부응집력의 부족으로 몽골부는 이때부터 쇠락과 와해의 길을 걷게 된다. 1161년 금나라와 타타르가 공동으로 일으킨 기습때 참패를 당한 것은 더더욱 몽골부의 쇠락을 가속화시켰다. 후인들은 쿠툴라칸이 이 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비록 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세 아들 중 어느 누구도 칸에 오르지 못했다. 이때부터 키얀씨와 타이치우드씨간의 권력투쟁은 날로 심각해진다. 그리하여 몽골인은 통일된 정권의 통치를 받지 못하게 되고, 나아가 점점 동부초원정치무대에서의 중요지위를 잃게 된다. 타타르부가 이전보다 더욱 강대해져서 위세가 강해진다.

 

쿠툴라칸이 사망한 후의 기간동안, 일부 몽골인은 속속 칸의 가족에게서 벗어나, 부락 혹은 가족을 단위로 하여 각자의 목지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한다. 몽골부는 다시 여러 부락이 난립하고, 각자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군룡무수인 국면이 형성되게 된다. 오직 카불칸의 자손이 분산통치하는 키얀씨와 암바가이의 후손이 통치하는 타이치우드씨만이 게속하여 그들의 공동조상의 영지내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이 없이 평안무사했다. 키얀씨 귀족중에서 카불칸의 손자이자, 쿠툴라칸의 조카인 예수가이(也速該)는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예수가이는 부친대의 용맹한 전통을 이어받아, 쿠툴라칸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암바가이칸의 복수라는 목표를 견지하며 자신의 군대를 조직하여 타타르부를 공격한다. 그리고 휘황한 전과를 거둔다. 심지어 몽골부의 세력이 크게 약화된 당시에 그는 타이치우드귀족과 공동으로 출병하여, 무력으로 케레이트인의 내정에도 간섭해서, 케레이트부의 토오릴(脫斡隣)칸(옹칸이라고도 부른다)이 숙부인 구르칸(古兒汗)의 수중에서 전체 케레이트부의 통치권을 빼앗아오는 것을 도운다. 그후 다시 일격에 구르칸과 나이만부에서 온 지원병을 격파한다. 혼자서 5대연맹중 3개를 상대한 것이며,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예수가이는 확실히 그 당시 초원에서 빛나는 군사적 스타였다. 그의 지휘하에 몽골부는 회복의 모습을 보인다. 아쉽게도 이 대단한 군사천제는 장수하지 못했다.

 

1162년은 예수가이의 짧은 일생에서 기념할 만한 한 해이다. 이 해에 그는 한번의 전투에서 타타르인들 중에서 가장 용맹한 두 명의 씨족수령을 붙잡아 죽여버린다. 그중 1인의 이름을 막 태어난 아들에게 붙여준다. 테무진(鐵木眞). 예수가의 마음 속에는 기실 이 초원에 이름을 떨친 타타르맹장을 아주 존경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도 그와 같이 대단한 영웅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만 예수가이는 죽을 때까지도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유약한 영아가 이후 반세기동안 몽골인 심지어 세계의 운명에 경천동지할 변화를 가져오게 될 줄은. 당시에 거의 아무도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어린 테무진은 그저 아직 갑옷도 벗지 못한 부친의 가슴에 안겨 있으면서 소리쳐 울면서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었다. 대다수의 영아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단지 한줌의 피를 제외하고. 그가 막 태어났을 때 그의 손에는 한줌의 피가 꽉 쥐어져 있었다. 이는 이 신생하가 세상에 피의 길을 개척할 것이라는 것을 에시했다. 피로서 자신과 몽골부락의 영광을 써내려갈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