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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고고

"수인전(手印塼)"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20. 10. 27.

글: 고몽하(高蒙河)

 

중국에서 장방형(長方形)의 실심전(實心塼)은 진(秦),한(漢)시기에 발명되었다. "조전(條塼)"이라고도 부른다. 전(벽돌)의 길이는 대부분 20-30센티미터이다. 길이, 너비, 두께의 비율은 4:2:1로 배수이고, 등비수열이다. 벽돌을 쌓을 때 합리적으로 배치할 수 있고, 전체적으로 보기좋기 때문일 것이다.

 

조전은 역대 왕조를 거치면서 현대까지 계속 사용되어 왔다. 다만 현대에 우리가 많이 쓰는 것은 붉은벽돌(紅塼)인데, 고대에는 파란벽돌(靑塼)이 많았다. 현대의 벽돌은 각 면이 밋밋한데, 옛날의 벽돌에는 자주 밧줄무늬(繩紋)를 새기거나, 혹은 기하학적인 도안, 동식물도안, 인물화상등을 넣었다. 어떤 벽돌에는 각종 내용의 문자도 새겼다. 혹은 묘주인의 성씨이거나, 혹은 벽돌을 제작한 년월, 혹은 길상(吉祥)의 문구등이다. 당연히 이들 도안과 문자는 분명히 벽돌이 반쯤 건조되었을 때, 벽돌에 박인(拍印), 모인(模印) 혹은 각획(刻劃)한 것일 것이다. 그후에 구워서 벽돌로 만들었다.

 

얘기하자면, 벽돌의 무늬나 문자는 상대적으로 쉽게 구분하고 해석할 수 있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발견되는 어떤 벽돌에는 수시로 수장인(手掌印)이 나타난다. 이런 것은 도대체 왜 그렇게 했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손바닥무늬가 있는 조전을 속칭 '수인전'이라고 부른다. 수인전에는 이런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일반적으로 벽돌 하나에 손바닥인장 1개이다. 1개의 벽돌 위에 여러 개의 손바닥인장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둘째, 손바닥인장은 모두 넓은 면에 찍었다. 좁은 면에는 찍은 것이 없다. 셋째, 손바닥인장은 많은 경우 다섯손가락이 다 나오게 찍고 장심(손바닥)이 아래를 향한다. 규칙에 맞게 찍었으며 제법 깊이 찍었다. 넷째, 모두 오른손의 손바닥을 찍었다. 다섯째, 거의 모두 성인의 손바닥이다.

 

고대인들은 왜 손바닥을 벽돌에 찍었을까? 해석은 아주 많다. 그러나 통설로 삼을만큼 설득력있는 것은 아직 없다.

 

어떤 사람은 벽돌제조과정에서 고증한다: 벽돌을 구우려면 우선 점토와 진흙이 필요하다. 그후에 진흙덩어리를 장방형의 나무로 만든 틀 안에 넣어서 굽기전의 벽돌을 완성한다. 이 굽기전의 벽돌을 틀에서 끄집어낼 때, 편리하고 빠르게 하기 위하여, 벽돌장인은 손으로 눌러서 꺼낸 것이다. 굽기전의 벽돌은 아직 마르기 전이어서 손으로 누르면 벽돌에 손바닥도장이 찍히게 되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이 주장은 근거가 부실하다고 본다. 어렸을 때, 집안에 창고방을 지을 때, 필자는 흙덩어리로 흙벽돌을 만들어 본 바 있다. 틀에 달라붙어 있는 벽돌을 떼어내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옆에 물통을 두고, 틀을 먼저 물에 한번 담근다. 물이 윤활작용을 해서, 틀을 가볍게 흔들면, 흙벽돌이 떨어진다. 그리고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관리측면에서 분석했다: 첫째는 수인을 찍은 것은 벽돌장인이 품질책임을 지게 하는 일종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누구의 손바닥도장이 찍혔는지를 봐서 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한다. 일단 품질문제가 발생하면 손바닥의 주인을 찾아내서 책임추궁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둘째는 벽돌장인이 흙벽돌을 만들 때, 벽돌의 품질을 검사해서, 벽돌 위에 손바닥도장을 남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품질검사를 거친 합격제품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이런 두 가지 견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손바닥도장이 있는 벽돌은 어쨌든 소수이다.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대량의 조전에는 기본적으로 손바닥도장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 손바닥도장이 없는 벽돌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불량품이라는 말인가?

 

또 어떤 사람은 수인전은 그다지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아마도 어느 벽돌장인이 벽돌을 만들 때 즉흥적으로 한 짓이라고 본다. 자신이 만든 벽돌에 기호로 남긴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저 재미로 그렇게 했다고 본다. 다만 이런 해석이 사실일까? 문헌에서 관련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럴 것이라고 추측해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의 벽돌공장에서 자신의 제품에 대한 특수한 표시라는 견해도 있고, 또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풍습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다만 이것들은 모두 근거가 부족하여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고대에 수인전을 만든 진정한 의미는 아직도 연구가 부족하여 풀어야할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언급하자면, 몇년전 삼협수리공정의 문화재긴급발굴에 참여한 바 있는 복단대학 고고팀은 일종의 "지인전(指印塼)"도 발굴한 바 있다. 그것은 한,위 시기의 전실묘(塼室墓)를 발굴할 때 적지 않은 묘전(墓塼)에서 손가락도장이 나왔던 것이다.

 

처음 발견했을 때 모두 기이하다고 여겼다.나중에 이들 수인이 한줄 한줄 아주 규칙있게 배열된 것을 보고서, 비로소 깨달았다. 이것은 분명히 굽기전의 벽돌을 운반하는 도중에 남긴 것이라는 것을. 이는 또 다른 측면으로 묘주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묘를 만들 시간이 촉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루빨리 매장하기 위하여, 벽돌이 다 마르기를 기다리기도 전에 급히 요에 넣어서 구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