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고고

순릉(順陵): 한 여인의 무덤, 왜 황제능보다 규모가 클까?

by 중은우시 2021. 5. 31.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시안(西安)에서 공항확장공사를 하면서 가장 바빠진 것은 고고발굴팀이다. 설날연휴기간동안 섬서성 고고연구원 공항신성 고고연구기지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 연휴도 포기하고, 연장작업을 하면서 고고발굴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공항확장공사과정에서 각 시기의 묘장 3,500여개를 찾아냈고, 발굴임무는 아주 어렵다. 1,300여년전 이곳은 "홍독원(洪瀆原)"으로 불렸고, 당나라때 귀족들의 묘가 모여있는 곳이다. 최근 10년동안 연이어 상관완아(上官婉兒), 설소(薛紹)등의 묘지를 발견하여, 당나라 역사를 연구하는데 고귀한 자료가 되었다.

 

함양공항의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규모가 거대한 능묘인 순릉이 있다. 비록 천년이상의 비바람을 맞았고, 지면건축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거대한 석상을 보면 순릉은 휘황한 세월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석각은 아름답고 정교하며, 기예가 뛰어났고, 조각의 난이도도 아주 높다. 수십톤 무게의 돌을 이곳으로 옮기는 것도 운수능력이 뛰어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인력과 물력을 크게 낭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능원의 점유면적도 아주 넓다. 100여만평방미터로 내외에 이중의 담장이 있어, 상당히 거대하다. 심지어 당고조 이연(李淵)의 규모를 넘어선다. 그러나, 순릉의 묘주인은 황제가 아니라 한 여인이다.

 

무덕초년 당고조 이연에게 업무보고를 할 때, 공부상서(工部尙書) 무사확(武士彟)은 워크홀릭이라고 말한다. 대당의 통일사업을 위하여 처자식을 팽개쳤다는 것이다. 이전에 두 아들은 병이 들어 요절했지만 그는 한번도 찾아가보지 않았다. 나중에 부인 상리씨(相里氏)가 슬픔이 지나쳐서 결국 세상을 떠난다. 그래도 무사확은 집으로 돌아가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애도를 표했을 뿐이다. "이 자는 충절이 뛰어나다. 작년에 아들이 죽었고, 오늘은 부인이 죽었는데, 거리가 멀지 않음에도 가보지 않았다." 이연은 깊이 감동을 받아 그의 생활을 보살펴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옛날부터 서로 알고 지냈다. 산서에서 일할 때, 이연이 출장을 가면 자주 무사확의 집에 투숙하곤 했었다. 나중에 태원에서 거병할 때, 무사확은 그를 따라 출정했고, 많은 공을 세운다. 그는 개국공신이라 할 수 있다. 이연은 그를 공부상서, 응국공(應國公)에 봉했고, 죽을 죄를 지어도 사면해주는 특권까지 부여한다. 이 특권은 모반만 하지 않으면, 무슨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다가 이연은 무사확에게 여자를 소개해주기로 결정한다. 무사확은 이미 40여세이다. 중년에 상처했으니, 가문의 불행이다. 그래서 십여세의 어린 여자를 소개시켜주면, 아마도 곤란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아들이 이미 십여세인데, 그 아들이 자신과 같은 나이의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좀 난감한 일이 될테니까. 그래서 생각해보니 양달(楊達)에게 딸이 있는데, 40여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다.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여 당고조 이연은 무사확을 불러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너를 위해서 상대를 소개해 주겠다. 수나라때 재상중에 양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딸이 아주 현명하니 분명 부인으로서의 본분을 잘 해낼 것이다." 황제가 말을 꺼냈으니 무사확이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계양공주로 하여금 중매인이 되게 하여 공비로 혼례를 치르게 해준다. 무사확의 체면을 상당히 살려준 것이다. 양달은 수나라때 관덕왕(觀德王) 양웅(楊雄)의 동생이고, 계양공주는 양웅의 며느리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서서 무사확과 양씨를 연결시켜 준 것이다.

 

이때 양씨는 이미 사십여세였다. 10년전에 양달은 고구려원정중에 죽었다. 그녀가 왜 결혼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부친상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양달이 죽었을 때, 그녀는 이미 삼십여세이니, 당시의 사회배경을 생각하면 남녀가 십여세때 결혼하는데, 그녀와 같은 집안에서 남편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대한 혼례가 끝난 후, 양씨는 정식으로 무사확의 집안으로 들어간다. 상리씨는 이전에 4명의 아들을 낳았고, 2명은 요절한다. 남아 있는 것은 무원경(武元慶)과 무원상(武元爽) 형제였다. 양부인은 이미 사십여세였지만, 몸은 괜찮았던 것같다. 연이어 3명의 딸을 낳는다. 장녀 무순(武順)은 나중에 하란안석(賀蘭安石)에게 시집간다; 차녀는 바로 그 유명한 무측천이다; 삼녀는 덜 유명한데, 곽(郭)씨성의 남자에게 시집갔다. 무덕중기부터, 정관연간까지, 무사확은 대도시 장안을 떠나 지방에서 관직을 맡는다. 양부인은 처로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장안을 떠나 남편의 부임지를 따라가야 했다. 이연, 이세민의 안배로 양주, 예주, 이주, 형주에서 관직을 지낸다. 어떤 지방은 막 평정되어서 만신창이상태이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했다. 무사확은 경제를 회복시키고 지방을 안정시키는 중임을 맡았다. 무측천의 동년기에는 부모를 따라 이곳저곳을 전전한다. 그러면서 여러 장강연안의 도시들에서 살았고, 많은 전설을 남긴다. 심지어 1천여년후에도 이주(利州)에서는 무측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십여년간 조용히 살아간다. 비록 중앙에서는 현무문사변이 일어나고, 최고통치자가 바뀌었지만, 무사확과 그의 가족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지방에서 관료로 있었고, 가족들과 살고 있었다. 정관9년, 슬픈 소식이 전해진다. 당고조 이연이 죽은 것이다. 무사확은 자신을 알아주던 친구의 죽음에 슬퍼했으며, 결국 피를 토하고 죽는다. 56세의 양부인은 과부가 된다. 그녀는 딸을 데리고 영구를 이끌고 산서의 고향으로 가서 남편을 매장한다. 그러나, 이는 나쁜 소식의 시작이었다. 무사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무원경, 무원상은 양부인에게 아주 무례했다. 그리고 양부인이 낳은 것은 모두 딸이었고, 아들이 없다보니, 이들 두 아들과 싸우기 어려웠다. 큰 딸 무순은 하란씨집안에 시집갔는데, 남편 하란안석은 너무 일찍 죽는다. 큰 딸은 나이가 아직 젊었고, 모친과 함께 과부로 있으면서 몇몇 아들을 키웠다. 둘째딸 무측천은 후궁에 들어가서 재인(才人)이 되었다. 양부인은 더욱 근심이 많았다. 궁중은 시시비비가 많은 곳이고, 많은 여인들은 황제를 한번 만나보지도 못한다. 사실상 무측천은 확실히 당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인이었다. 정관23년, 당태종이 사망하고, 양부인은 더욱 힘들어진다. 딸 무측천은 자녀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감업사로 가서 여승이 된 것이다. 그녀의 나이는 겨우 스물몇살이었다. 이후 절에서 외롭게 인생을 마쳐야 한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끝난 것이다. 만일 당초 그녀가 입궁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을 터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무측천에게 기회가 온다. 완전히 역전하여 당고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왕황후와 소숙비를 물리친 후 대당의 황후에 오른다. 양부인도 그 덕을 보게 된다. 지위와 대우가 갈수록 높아졌다. 영휘6년, 대국부인(代國夫人)이 되고 탕목(湯木)의 식읍 1천호를 받는다. 정1품으로 왕공의 모친이나 부인보다도 지위가 높아진다. 현경5년 십월, 다시 영국부인(榮國夫人), 찬국부인(鄼國夫人)으로 된다. 무원경, 무원상의 관직도 높아진다. 한번은 양부인이 그들과 식사를 하는데, 아주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너희는 아직 옛날 일을 기억하는가? 현재 내 딸이 황후가 되었고, 모두 잘나가고 있다. 너희 생각에 어떠하냐?" 무원경 형제는 고개만 숙이고 아무 말을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씨형제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은 공신의 후손이고, 능력도 있어서 오늘날의 지위를 가진 것일 뿐, 황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양부인은 분노하여 그들을 혼내주기로 결정한다. 무측천은 당고종에게 <외척계(外戚戒)>를 올려, 외척을 제한하고, 황권을 보호하자고 주장하며, 그녀 스스로 앞장서서 집행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씨형제를 지방으로 좌천시킨다. 이치는 막 외삼촌인 장손무기(長孫无忌), 왕황후의 외삼촌인 유석(柳奭)과의 싸움을 끝낸 때였다. 그래서 외척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의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 황후가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가족을 내치겠다고 하니 그것은 실로 귀한 결정이다. 무원경, 무원상은 모두 지방으로 쫓겨나고, 결국 외지에서 죽음을 맞는다. 조야에서는 황후에 대한 칭찬이 넘쳐난다. 

 

함형원년, 양부인은 구성궁(九成宮)에서 사망한다. 향년 92세였다. 말년에 그녀와 딸, 외손녀의 사생활은 상당히 의외였다. 둘째딸 무측천은 당고종의 황후이고, 큰 딸 무순은 여러 해동안 과부로 지내다가, 당고종의 총애를 다툰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자 이현(李賢)은 무측천의 친아들이 아니고, 그의 모친은 한국부인(韓國夫人) 무순이라는 소문을 냈다. 당고종이 처제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는데, 무측천의 아들로 올렸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무순의 큰 딸 위국부인(魏國夫人)도 당고종과 관계를 맺는다. 모녀가 함께 같은 황제를 모신 것이다. 팔십여세 고령의 양부인은 무순의 아들 하란민지(賀蘭敏之)와 통간한다. 조손간에는 나이차이가 육십여년이나 된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실로 너무나 어지럽다. 팔구십세의 할머니가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란민지는 돈도 있고 지위도 있고, 미녀도 있다. 그런데도 나이든 외할머니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실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다.

 

장모가 죽었으니 이치는 왕비(王妃)의 예로 장례를 성대하게 치뤄준다. 9품이상의 관리는 모두 조문을 하도록 했다. 양부인은 남편과의 합장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녀는 자신의 부친의 곁에 묻히길 원했다. 무측천은 모친의 결정을 존중해서, 그녀를 홍독원에 안장한다. 부친이 더 이상 고독해 하지 않도록, 그녀는 사람을 시켜 법물을 가지고 산서 문수로 보내, 무사확의 혼백을 장안으로 맞이한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이 지하에서 서로 만나게 해준다. 처음에 왕비의 규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능원의 면적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그러나 무측천이 황제에 오르면서, 양부인의 묘는 규모를 크게 키운다. 문명원년, 위왕비(魏王妃)로 추존되고 식읍 1만호를 내린다. 그리고 함양의 능을 순의릉(順義陵)이라 칭한다; 영창원년, 충효태후(忠孝太后)로 추존한다; 천수원년 효명고황후(孝明高皇后)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순릉(順陵)으로 고친다. 장수2년, 다시 무상효명고황후(無上孝明高皇后)로 추존한다. 이렇게 양부인의 지위는 최고조에 오르게 된다. 그녀는 태후가 된 것이다. 즉 황제의 모친이다. 능의 면적은 당고조 이연보다 넓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신룡정변이후, 이당황실이 다시 권력을 잡는다. 양부인이 태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딸이 황제였기 때문이다. 지금 무측천이 황제에서 쫓겨났고, 다시 신분이 당고종의 황후로 된다. 그렇다면 양부인이 태후의 대우를 받는 것이 부적절하다. 당현종은 명을 내려 효명고황후의 칭호를 박탈하고, 그녀를 태원왕비(太原王妃)로 격하시킨다. 순릉도 왕비묘로 격하된다. 돌고돌아, 다시 처음의 지위로 내려간다. 그 뒤에는 이씨와 무씨간의 권력투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