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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고고

중국 고대건축의 "궐(闕)"

by 중은우시 2023. 3. 23.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궐(闕)이라는 것은 범주에 관한 개념이으로, 궐은 도로에 건설하는 표지물이다. 이를 통해, 이곳부터 시작하여 길을 걸어오는 사람은 하나의 '규정된 구역'에 진입하게 된다는 것을 표시한다. 오늘날 하북(河北)과 다른 여러 곳에서 우리는 '궐'의 실물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의 도로에 '문(門)'이 있는 '문루(門樓)'가 없이 하나의 특수구역에 진입하는 것을 표시하는 패방(牌坊)이 있다. 북경의 길거리에도 원래 여러 실물이 있었다. 그것은 문화적이고, 지리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며 여러가지 규범적인 장소의 가장 바깥에서 가장 멀리서 영역을 표시하는 물건이다. 예를 들면 우리 신체의 손가락끝, 우리의 코끝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에도 모두 '궐'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궐'은 중국고건축에서 특수한 유형이고, 그것은 여러가지로 변화발전했다. 현존하는 지상건축물중에서 '궐'은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이다. 한나라때의 지상건축물중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한두곳의 석사(石祠)를 제외하면 바로 궐이다. 궐은 일반적으로 바닥(臺基), 궐신(闕身)과 옥정(屋頂)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황궁 문앞의 궐은 상위(象魏)라고도 부른다. 원고시기(遠古時期)에 법령을 반포하던 곳이다. 고대 궁정등 대형건축물의 입구에 세운 쌍주(雙柱, 한쌍의 기둥)의 명칭이다. 동궐(東闕)은 창룡궐(蒼龍闕)이라 부르고, 북궐(北闕)은 현무궐(玄武闕)이라 부른다.

 

궐은 양관(兩觀)이라고도 부른다. 실제로 외대문(外大門)의 일종의 형식이다. 패루(牌樓), 패방(牌坊)의 기원과 아마도 같을 것이다. 다만 나중에 둘은 서로 다른 발전의 길을 걷는다. <설문해자.계전>의 해석에 따르면, '궐'이라는 건축물은 고대제왕이 궁정대문의 바깥에 세운 두 개의 대칭되는 대자(臺子)를 짓고, 대자의 위에 누관(樓觀)을 건축한다. 상원하방(上圓下方,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나다)으로 만든다. 두개의 대자 사이에는 연결시키켰다. 궐루에서 멀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관(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궐에 법전을 걸어두었으므로 '상위'라고도 불렀다. <주례.천관.태재>에는 "내현치상지법어상위(乃懸治象之法於象魏)"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고대에는 자주 궐을 제왕궁정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한서.주매신전>에는 "예궐상서(詣闕上書), 서구불보(書久不報)"(궐에 도착하여 글을 올렸다. 글은 오랫동안 보고되지 않았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악비(岳飛)의 <만강홍(滿江紅)>에 나오는 "대종두(待從頭), 수습구산하(收拾舊山河), 조천궐(朝天闕)"이 가리키는 것도 역시 제왕의 궁전이다. 진시황의 아방궁(阿房宮)은 기세가 엄청나게 대단했다. "표남산지전이위궐(表南山之巓以爲闕)"이라는 말이 있는데, 높은 산을 그의 궁전의 '외대문'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직접 두 산이 대치하는 곳을 궐이라 부른 것이다.

 

궐의 종류는 그것이 위치하는 위치에 따라 개략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궁궐(宮闕), 단묘궐(壇廟闕), 묘사궐(墓祠闕), 성궐(城闕)등.

 

궁궐

 

제왕의 궁문의 앞에 위치한다. 궁문의 앞에 독립된 이대(二臺, 양관)를 건축하는 형식이다. 한위(漢魏이후 변화하여 점차 황궁대문과 결합되어 하나의 일체가 된다. 초기의 유물은 이미 존재하지 않지만, 유일하게 보존된 궁궐유물은 바로 북경 명청고궁의 오문(午門)이다. 그것의 위치는 황궁의 정전대문(正殿大門)인 태화문(太和門)의 바깥이다. 다만 초기의 양관(兩觀)형식과는 다르다. 이미 오문과 결합하여, 요형(凹形)의 평면으로 구성된다. 양관형식과 문(門)이 하나로 조합된 모습이다.

 

우리가 만일 양측의 동, 서 안시루(雁翅樓)를 나눈다면, 양관의 형식을 재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오문은 오봉루(五鳳樓)라고도 부른다. 다만, 정문 양쪽의 측문위에는 특별히 궐자문(闕左門)과 궐우문(闕右門)이라는 글자를 추가해서 원래 궁궐의 뜻을 남겼다. 이러한 쌍궐양관과 궁전궁문이 서로 결합된 형식은 당송이래의 회화와 유적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그렇게 변화발전한 것은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묘궐

대형의 단묘대문의 좌우에 위치한다. 현존하는 실물로 유명한 곳은 숭산삼궐(崇山三闕)이 있다. 하남성 등봉현 숭산의 기슭에 위치한다. 즉 태실묘궐(太室廟闕), 소실묘궐(少室廟闕), 계모묘궐(啓母廟闕)이다. 2세기초 동한시기에 건립되었다. 삼궐은 모두 돌로 만들었고, 궐신에는 한나라때의 예서로 글을 쓰고 각종 인물, 차마, 동식물, 건축물이 조각되어 있다. 한나라때 사회생활, 풍속습관과 서법예술을 연구하는데 진귀한 자료이다.

 

능묘궐

 

능묘궐은 현존하는 한궐(漢闕)중에서 가장 많이 보존된 유형이다. 그들은 모두 능묘의 앞에 위치한다. 두 개가 대칭되게 서 있고, 중궐이 길이다. 능묘의 신도로 들어가는 입구대문이다. 그들은 혹은 나무구조, 혹은 돌로 만들었다. 목궐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석궐은 유적이 아주 많다. 모두 후한시기의 유물이다. 궐신의 형태는 비석과 비슷하지만 약간 두껍다. 위에는 처마(檐)가 덮고 있다. 자궐(子闕)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비교적 작은 궐을 붙이며, 별도로 첨와(檐瓦)를 갖추기도 하며, 주궐의 옆에 기대어 세운다.

 

처마의 아래에는 두공방액(斗拱枋額)을 새겨서 나무구조형상을 모방한 경우도 있고, 두공을 만들지 않고, 단지 위는 크고 아래는 작은 돌로 처마를 받치기도 한다. 유명한 능묘궐은 사천 거현(渠縣)의 풍환궐(馮煥闕), 심부군궐(沈府君闕), 면양(綿陽)의 평양부군궐(平陽府君闕), 재동(梓桐)의 이업궐(李業闕) 및 산동(山東) 가상(嘉祥) 무씨사궐(武氏祠闕, 자궐에는 두공이 없다), 평읍(平邑) 황성경궐(皇聖卿闕)등 십수곳이 있다. 이들 궐은 모두 기원1,2세기의 유물이다. 한나라때 건축물을 연구하고 한나라때 사회생활과 서법, 조각예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실물이다.

 

능묘궐은 한당이래 약간 바뀐다. 점점 일반묘도(墓道)에서 사라진다. 섬서 서안부근의 한당능묘의 능문앞에는 쌍궐의 유적을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당고종과 무측천이 합장된 건릉묘신도앞의 쌍궐유적이 가장 유명하다. 쌍봉을 궐지로 삼아 기세가 웅위하다.

 

성궐

 

옛날에, 자주 성문의 양측에 쌍궐을 세워서, 망을 보는데 사용했다. 이를 성궐이라고 부른다. <시경.정풍.자긍>에는 "도혜달혜(挑兮達兮), 재성궐혜(在城闕兮)"라는 구절이 있다.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의 "구중성궐연진생(九重宮闕煙塵生), 천승만기서남행(千乘萬騎西南行)"이라는 싯구가 있는데,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전체 경성이다.

 

한궐(漢闕)의 건축형식은 현재의 실물과 고대의 화상석, 화상전(畵像塼), 벽화에서 단궐(單闕)이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자궐을 갖추고 있는 것도 있다. 그리고, 양궐의 사이를 문루각도(門樓閣道)로 연결시킨 경우도 있다. 아마도 북경고궁의 오문은 바로 이런 형식에서 발전한 것일 것이다.

저명한 한궐로는 중경시 충현(忠縣) 오양진(烏楊鎭)에서 출토된 오양석궐(烏楊石闕)이 있다. 2001년, 삼협문물구조작업중 출토된 것으로 중국에서 현존하는 대다수가 전국중점문물보호대상인 30여곳의 한궐중에서 유일하게 고고학적 발굴로 복원되고, 또한 관련 궐지(闕址), 신도(神道), 묘장(墓葬)이 발견된 궐이다. 오양한궐은 중경 중국삼협박물관의 중정에 진열되고 있으며, 모든 한궐중에서 박물관에 소장한 첫번째 한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