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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미디어

'환구시보' 후시진(胡錫進)의 흑역사

by 중은우시 2020. 10. 12.

글: 주리(朱莉), 임중우(林中宇)

 

<환구시보>의 총편집인 후시진은 네트즌들 사이에 평가가 아주 낮다. 그러나 그는 현재 중남해가 좋아하는 인물이다. 일찌기 후시진과 함께 당내매체인이었던 <봉황망>의 기자 장쩐위(張眞瑜)가 최근 후시진의 흑역사에 대하여 얘기해 주었다.

 

장쩐위는 이렇게 말한다. 후시진이 매체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환구시보>가 국내에서 이익을 가장 많이 내는 신문이 된 것은 원래 대외선(大外宣)의 객관조건을 갖추었기때문에, 국내의 다른 매체들보다 더 많은 해외정보를 취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후시진은 좌경이고, 좌경에 의존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첫째는 그가 국제적인 뉴스를 싣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아주 '좌'라는 것이다. 그것은 극좌적인 매체이다. 만일 환구시보 초기의 신문을 찾아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인터넷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을 때, 환구시보는 비교적 놀라운 내용을 자주 실었다. 특히 백성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은 호전적인 매체였다. 예를 들어, 환구시보든 항상 중국은 미국과 전쟁을 겁내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항상 일본을 혼내줘야한다고 얘기한다. 이것이 바로 환구시보매체의 특징이다. 비교적 극단적인 매체이다. 또한 국내에서 외국소식을 얻는 경로는 비교적 단일하고, 그는 그 점을 확보했다."

 

장쩐위는 환구시보라는 매체가 가장 잘하는 것 혹은 주요영업인 매체내용은 바로 '컨텐츠의 수출을 내수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는 많은 해외의 뉴스를 종합한 후, 가공을 거쳐, '풍격을 바꾸어' (중공) 자신에게 '유리한' 보도로 바꾼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관용수단이다. 즉 미국의 일부 정치적 스캔들을 가공한 후 다시 국내에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구시보의 정보는 민간에서 얘기꺼리가 된다. 누가 환구시보를 보면, 아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국제적인 대사건에 대하여도 얘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이것은 기실 일종의 '자기 혼자 즐기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중국국내의 많은 극좌매체들 첸룽왕(千龍網)과 일부 군사사이트에서 얘기하는 것은 기실 환구시보에서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환구시보의 특징이다."

 

이런 매체를 플랫폼으로 하여, 두뇌가 기민한 후시진은 중공의 체제내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잘 나갔고, 크게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입을 잘 단속하지 못한다.

 

장쩐위는 말한다. 후시진은 스스로 자기는 여러 채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장쩐위: "그가 나와 단 둘이 만났을 때 한 말이 아니다. 기자로서 여러가지 반공개적이거나 공개적인 집단활동에 참가하게 된다. 그는 그 활동의 회의때 스스로 자랑했다. 그의 말은 그가 당의 발걸음을 따랐기 때문에, 그는 재무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어떻게 당의 발걸음을 잘 따랐는가? 먼저, 그는 이미 인민일보체계에 들어갔고 복지로 주택을 배분받았다. 그 자신의 묘사에 따르면 장기적 안목이라고 한다. 이 부동산을 잡음으로써 날아오를 기반이 되었고, 그후에 계속 부동산을 거래했고, 그 자신은 최초로 자본을 축적하게 된다. 그는 심지어 그가 여러 채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도 자랑했다. 그는 말했다. 그는 중국의 발전방향을 보았고,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실 근본적으로 그렇지 않다."

 

장쩐위는 말한다. 후시진이 돈을 번 첫째 원인은 그가 당을 위해 일심으로 일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에게 내부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체자본은 그가 정당에 봉사했기 때문이다. 그 정당이 그에게 이런 부동산을 주었따. 둘째는 그가 분명 많은 내부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를 철거이주시킨다고 하면, 거기를 샀다. 이렇게 하여 그는 부동산재산을 불리는데 아주 큰 도움을 받았다. 그외에 그는 매체사람이다. 그는 각종관계를 통하여, 비교적 좋은 가격으로 부동산자산을 얻을 수 있다. 확실히 이렇게 했다. 그는 매체인들 가운데는 확실히 성공하였다."

 

장쩐위는 네티즌들이 말하는 "프리스비 후"(胡叼盤)라는 별명의 내력에 대하여 얘기했다. 그것은 정당을 위해 봉사하고, 진상을 보도하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실 매체기자로서, 많은 채널과 모임을 통해 많은 사정의 진상을 알게 된다. 다만 그는 정당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진상을 말하지 않는다. 혹은 그는 근본적으로 진상을 보도하거나 폭로할 생각이 없다. 그가 왜 저우용캉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긁어모았는지 보도하지 않는다. 그는 전체 정치국위원의 배후에 홍색자본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도 보도하지 않는다. 그는 민간의 고통을 보도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매체인 이외에 인터넷인플루언서라고 여긴다. 모든 공공사건에서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나 정상적인 매체인으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공산당에 아부하고, 곳곳에서 공산당을 위하여 변명해주는 것이 바로 그의 역할이다."

 

가장 먼저 '프리스비 후'가 된 것은 <남방주말>의 '신년헌사'사건이다.

 

"그가 처음 공개된 신분으로 나타난 것은 남방보업집단이 중앙에 대항한다고 비판할 때였다. 그후에 남방의 이 보업집단을 문닫아야 한다고 말한다. 남방보업집단은 중국의 매체중 뛰어난 존재이다. 그것은 많은 진상을 감히 보도했다. 그래서 보통민중이 좋아하는 매체이다. 그곳은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후시진은 극력 남방주말을 폄훼했다. 그후 그는 극력 중앙이 남방보업집단을 처벌한 것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얘기했다. 이때 사람들은 전체 환구시보를 '프리스비(주인이 프리스비를 던지면 개는 그 프리스비를 달려가 문다)'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후시진 본인은 앞장서서 선봉장역할을 했고, 그는 항상 가장 앞장섰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시진을 가리켜, '프리스비 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 환구시보는 프리스비같은 매체이고, 그는 주인을 위하여 복무한다. 그래서 그는 프리스비 후가 된 것이다. 이는 그가 항상 공산당을 위하여 뒤를 닦아주는 일을 할 뿐아니라, 실질은 바로 그가 말을 함부로 하고, 헛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자가 정권을 잡으면, 첫째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둘째, 근본적으로 좋지 않은 것은 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분명 그 자신의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것은 그 주위의 환경(전체 사회를 포함해서)에 재난이다. 비록 사람은 모두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가 이런 일을 하면서 자신이 하는 말에 양심이 걸리지 않는가. 그는 근본적으로 양심이라는 것이 없다. 국가의 이렇게 많은 문제에 대하여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절데로 런즈창이나 차이샤를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후시진과 같은 자는 언젠가 공산당이 무너지면, 입을 싹 씻고, 다시 공산당에 반대하는 선봉대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절대로 '장두초(墻頭草)'(담장위의 풀과 같이 이리저리 바람부는대로 왔다갔다하는 인물)이다.

 

후시진에게 왜 그렇게 많은 팬들이 있을까? 장쩐위는 말한다. 그것은 "그런 바보다 아주 많기 때문이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후시진은 1960년 4월 7일생이고, 필명은 선인평(單仁平)이며, 베이징사람이다. 중국기자. 편집인, 현재 <환구시보>총편집 겸 인민망주식회사 동사이다.

 

후시진의 조적은 하남성 여주시 호장이다. 그곳은 기독교마을이다. 후시진의 부모는 기독교도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들 후시진은 세뇌되었거나, 명리에 열중하여, 스스로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1982년, 후시진은 해방군남경국제관계학원을 졸업한다. 1989년 북경외국어대학에서 러시아문학석사를 받는다. 1989년, 군인 및 학생인 후시진은 6.4천안문사태때 학생의 '애국운동'에 참가한다. 다만 진압하기 전에, '적시에' 그곳을 떠난다. 6.4이후, 후시진이 즉시 <인민일보>에 들어갈 수 있었고, 중용되어 소련으로 가서, 소련의 해체를 목격한다. 이 전환점은 아주 놀랍다. 훅시 배후에 무슨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후 1993년부터 1996년 사이에, 후시진은 <인민일보> 유고슬라비아주재기자를 지낸다. 보스니아전쟁을 보도한다. 1996년부터 후시진은 <환구시보> 부총편집인이 된다. 2003년, 후시진은 걸프지구로 가서 이라크전쟁을 보도한다. 후시진은 2005년에 총편집인이 된다.

 

후시진과 그가 주도하는 <환구시보>는 인터넷의 평론가들에게 "프리스비를 받아내는 개"라고 불린다. 다만 2019년 8월 15일, 홍콩 <명보>에서 소식통의 말을 빌려 보도한 바에 따르면, 후시진의 선전방식은 중공총서기 시진핑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중공문선계통도 후시진의 방식을 본받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대대상에 대하여 조롱, 분노, 욕설을 하는 깡패기질 때문이다.

 

최근에 후시진은 거액재산, 호화주택, 아들의 캐나다이민등 소문에 휩싸였다. 후시진은 부인하지만, 네티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재산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시사평론가 정중위안(鄭中原)은 이렇게 말한다. 후시진이 지금 중남해의 총아가 된 것은 국제대사건에서 중공외교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때, 앞장서서 들고 일어나 평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절대로 화춘잉의 입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중국에도 언론자유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후시진의 이런 특권은 중공 최고위층이 부여한 것이다. 그것은 후시진이 프리스비를 받아내는데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의 보호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문제등이 불거져도 당국에서는 가볍게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당이 더 이상 힘들 때, 이 정권이 무너질 때, 이렇게 선봉에 섰던 자들은 아마도 가장 먼저 죽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