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홍콩; 마카오

홍콩밀항의 역사

중은우시 2020. 8. 28. 14:37

글: 관령(關嶺)

 

1977년 11월, 등소평이 광둥을 시찰했다. 광동성위에서 보고하던 중 홍콩밀항붐에 대하여 말하자, 등소평은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것은 우리의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일은 군대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편전쟁후,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해야 했다. 그러나 홍공과 내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많은 내지인들에게 홍콩은 오랫동안 이상적인 피난처로 여겨졌다.

 

청말민초의 정권교체기에 많은 내지인들은 홍콩으로 이민간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무수한 내지인들이 홍콩으로 들어간다. 홍콩이 함락된 후, 음식부족으로 많은 홍콩주민은 내지로 도망친다. 일본이 투항한 후, 수십만이 홍콩으로 돌아갔다. 그후 국공내전으로, 많은 내지의 난민들이 다시 홍콩으로 간다.

 

홍콩에 이웃한 선전(당시는 바오안현(寶安縣)이라고 불렸다)은 홍콩으로 밀항하는 교두보였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통계에 따르면, 1950년부터 1980년까지 선전에서 홍콩으로 밀항한 사람의 수는 적게 보면 70만이고, 많게 보면 200만이다. 이는 연구자들이 냉전시기에 기간이 가장 길고 인원수가 가장 많은 집단망명사건이라고 부른다. 역사에서는 '대도항(大逃港)'이라 부른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홍콩밀항붐은 중국의 개혁개방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중 하나인 선전경제특구의 설립에 심각하면서도 가슴아픈 바탕이 된다."

 

<대도항>이라는 책을 쓴 천빙안(陳秉安)이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조사가능한 문건에서 선전역사상 모두 4차례의 대규모 홍콩밀항붐이 있었다. 각각 1957년, 1962년, 1972년, 그리고 1979년이다. 모두 56만명에 이른다. 밀항자는 광둥, 후난, 후베이, 장지, 광시등 전국 12개성, 62개시(현)에 걸쳐 있다. 소규모의 밀항은 계속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금의 선전은 내지의 무수한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오는 곳이다. 상주인구의 증가량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그러나, 당시의 선전은 대량의 인구가 홍콩으로 넘어가서, 현지에는 이런 민요가 있을 정도였다. "바오안에는 오직 3가지 보물이 있을 뿐이다. 파리, 모기, 샤징굴(沙井蚝). 일집중 아홉집은 홍콩으로 도망갔고, 집안에는 노인과 아이만 남았네."

 

홍콩으로 도망친 사람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국민당의 잔류인원과 '지주, 부농, 반혁명, 악덕분자, 우파'등 계급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 도시주민, 학생, 지식인, 노동자 심지어 군인도 있었다. 정치적인 성분으로 보면, 보통군중이 가장 많았다. 공청당원, 공산당원도 있었고, 심지어 중공 간부도 있었다. 선전시의 한 데이타를 보면, 1978년까지, 전체시의 간부중 홍콩으로 도망가는데 참여한 사람은 557명이고, 도망친 사람은 183명이다. 시의 직속기관에서도 40명의 부과장급이상의 간부들이 홍콩으로 도망쳤다.

 

홍콩으로 밀항하는 방식은 주로 도보, 헤엄, 배의 3가지이다. 노선은 주로 동선, 중선, 서선의 3개이다. 바오안현 서쪽에서 홍콩으로 밀항하는 사람은 서선을 선택하게 되는데, 사구(蛇口), 홍수림(紅樹林) 일대에서 선전만에서 헤엄치다가 순조로우면 1시간정도면 홍콩 신계 서북쪽의 원랑(元朗)에 도착할 수 있다. 중선의 밀항자는 대부분 현급 증명서(가짜증명서 포함)를 가지고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바오안으로 온 다음, 야간에 기회를 틈타 뤄후(羅湖) 일대에서 선전하를 건너는 것이다. 철조망을 넘어 홍콩으로 들어간다. 동선은 대부분 후이저우(惠州)에서 출발하여, 도보로 후이동(惠東), 바오안을 넘어 오동산(梧桐山)을 넘어 홍콩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외에 또 다른 하나는 2단계의 홍콩밀항노선이다. 즉, 먼저 마카오로 밀항한 후, 다시 홍콩으로 가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심지어 마구잡이로 관문으로 돌진하는 현상도 있었다. 바오안현위의 <군중유항공작제지에 관한 상황보고>에 따르면, 1962년, 광둥에 심각한 기근이 일어나, 많은 주민들이 홍콩으로 도망쳤다. 바오안현은 동에서 서로 이르는 100여리의 도로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군중이 집단으로 모여서 노인과 아이까지 데리고 왔다. "대군남하(大軍南下), 내세흉흉(來勢洶洶)"했다.

 

이들은 집단을 이루어 사람들마다 몽둥이를 쥐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공개적으로 말했다: "누구든지 우리를 막으면 우리는 몽둥이로 그들과 싸울 것이다. 돌파하자. 총을 쏘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

 

밀항원인은 주로 빈곤과 기근이었다. 당시 바오안현은 농민의 1일 평균수입이 약 0.7위안이었다. 그러나 홍콩에서 1일 평균수입은 70홍콩달러렸다. 양차의 차이가 100배에 이르렀다. "일년내내 죽어라 일해도, 홍콩에서 보내온 몇푼의 돈만 못하다"

 

정치적 박해도 홍콩밀항의 주요원인중 하나였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토지개혁운동' '반혁명진압운동' '반우운동' '사청운동' '문화대혁명' '상산하산운동'등 일련의 운동이 계속 일어났고, 매번 정치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연루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리스크를 무릅쓰고 홍콩으로 밀항한 것이다.

 

광동 하이펑(海豊)사람이자, '중국바이올린1인자'로 불리는 마쓰총(馬思聰)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혁이 시작된 후, 당시 중앙음악학원 원장을 맡고 있던 마쓰총은 갖은 모욕과 고통을 당한다. 1967년, 그는 선전에서 공연하는 기회를 틈타, 배를 타고 홍콩으로 건너간다. 그가 홍콩에 도착한 다음 날, 전체 홍콩의 신문과 방송은 이 소식을 보도했다. 이렇게 하여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10년에 걸친 홍콩밀항붐이 일어난다.

 

당시 홍콩밀항자에 대한 단속은 아주 엄했다. 합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홍콩으로 밀항하려는 자는 모두 '반국투적(叛國投敵)'으로 취급했다. 잡히면 수용소로 간다. 홍콩밀항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바오안현정부는 100여개의 수용소를 지었다. 그러나 항상 사람이 가득 찼다. 변방부대는 홍콩밀항자들에게 가장 큰 장애였다. 1960년대이전에 변방군인은 명령을 듣지 않는 밀항자들에게 언제든지 총을 쏠 수 있었다. 많은 밀항자들은 갯벌이나 산속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후 상부의 명령으로, 밀항자들에게 총을 쏘는 현상은 점차 사라진다.

 

홍콩에 도착한 후, 절대다수의 밀항자는 사회의 최하층에서 시작하여 갖은 고생을 거친다. 그후 장사를 하거나 공장을 열면서 점점 돈을 벌어 사회상층에 올라간다. 홍콩이 '아시아의 4소룡'이 되는데 이들은 큰 공헌을 한다. 어떤 사람의 통계에 따르면, 20세기말 홍콩의 부호랭킹 100위내에서 40여명이 6,70년대에 홍콩으로 밀항한 사람들이었다.

 

홍콩밀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홍콩밀항자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것은 중공지도자들에게 닥친 난제였다.

 

홍콩밀항에 대하여 천빙안은 매체와의 인터뷰때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가 좋은가 아닌가, 왜 삼팔선, 베를린장벽에서 선전하까지 왜 항상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도망치는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도망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무슨 문제를 말하는가. 사회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경제적으로 안된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여기서 잠시 얘기하지 말기로 하자. 경제적으로는 확실히 아니다. 삼팔선, 베를린장벽에서 선전하까지 모두 그렇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1962년, <인민일보>의 한 기자가 선전과 홍콩을 취재한다. 그는 홍콩인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생활수준이 지옥'같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내지보다 훨씬 높았다. 그는 4편의 내부참고를 서서 중앙에 보고한다. 집정자들이 홍콩밀항에서 교훈을 얻고 역사를 반성하고 정책을 조정하기 바라서였다. 반년후, 원래 반석같던 정책이 약간 느슨해진다.

 

다만 그것만으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후 10여년간, 여전히 여러번의 홍콩밀항붐이 일어난다. 장기간의 홍콩밀항단속을 통해, 중공지도자들은 인식하게 된다. 단순히 엄히 막는 것만으로는 홍콩밀항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없다. 반드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1977년 11월, 등소평이 광둥을 시찰한다. 홍콩밀항문제에 대하여, 당시 광둥성위서기 웨이궈칭(韋國淸)이 보고한다. 백성들의 생활이 너무 힘들다. "강의 저쪽은 경제가 발달했다. 양쪽의 차이가 너무 크다. 그래서 사람들을 붙잡아놓기 힘들다. 우리가 부대를 추가로 배치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등소평은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것은 우리의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일은 군대가 해결해야할 것이 아니다. 홍콩밀항은 주로 살기 어려워서이고, 차이가 너무 커서이다. 생산과 생활이 잘되면, 홍콩밀항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1978년 7월, 신임 광둥성위서기 시중쉰(習仲勛)이 바오안으로 시찰을 온다. 중잉가(中英街)에서 홍콩의 번화한 모습을 보고, 바오안의 낙후된 모습을 본다. 그후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해방된지 30년이 되어 간다. 저쪽은 아주 번영했는데 우리 이쪽은 낡아빠졌다." 이런 선명한 대비는 시중쉰으로 하여금 문제의 근원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하게 해주었다: 홍콩밀항을 제지하는 근본조치는 경제발전이고, 인민생활수준을 제고하는 것이다.

 

1979년 3월, 바오안현은 선전시로 개칭된다. 선전시위는 <변방경제를 발전시키는데 관한 약간의 규정>을 내놓는다. 14개 공사(公社), 진(鎭)에 이 우대정책을 실행한다. 그 범위는 기본적으로 나중에 특구를 설치한 지역이다.

 

이와 동시에 광둥에서 다시 집단 홍콩밀항이 일어난다. 1979년 상반기, 전체 성에서 밀항을 시도한 사람의 수가 12만에 달하고, 밀항한 사람이 3만에 달한다. 당시 전국은 혼란이 수습되는 상황이었는데, 광둥에서 이처럼 엄중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베이징의 주목을 받는다. 국무원의 8명 부총리가 광궁성으로부터 밀항단속업무에 관한 보고를 받는다. 시중쉰에게는 커다란 시험이었다.

 

1979년 4월, 중앙공작회의가 베이징에서 개최된다. 시중쉰은 광동성위를 대표하여 중앙에 광둥에 '수권'하여 선전, 주하이 및 산터우 경제특구를 설치하도록 건의한다. 등소평등 중앙지도자들의 중시와 지지를 받아, 광둥은 한걸음 먼저 부유해지는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1980년 8월 26일, 전인대는 국무원이 제안한 <광동성경제특구조례>를 비준한다. 선전등 경제특구가 성립되었다. 선전은 내료가공, 보상무역, 합자경영, 합작경영, 독자경영와 임대등의 방식으로 대량의 외자를 유치했고, 경제는 신속히 발전한다.

 

특구의 초대 책임자 우난셩(吳南生)은 이렇게 회고한다. "특구조례가 공표된 후 며칠간 홍콩으로 밀항하는 사람이 돌연 사라진다. 확실히 수천수만이 오동산의 돌 뒤나 나무 속에 숨어서 밀항하려는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미 홍콩으로 밀항했던 선전사람도 선전에 특구를 설립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오기도 했다.

 

1997년 홍콩의 주권회귀후, 밀항은 기본적으로 사라진다. 나중에 홍콩인이 내지로 들어오는 것이 오히려 하나의 조류가 된다.

 

선전특구가 성립된 10주년인 1990년 천빙안은 선전으로 가서 축하행사에 참석한 시중쉰을 인터뷰했다. 그때의 역사를 얘기할 때, 시중쉰은 의미심장하게 이런 말을 했다: "수천수만의 말도 소용없다. 인민생활을 끌어올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민은 발로 투표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