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중원(鄭中原)
이전에 사람들은 모두 왕치산(王岐山)을 중공 태자당에 속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왕치산은 중공원로 야오이린(姚依林)의 딸 야오밍산(姚明珊)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역대이래로 '근정묘홍(根正苗紅)'을 중시하는 중공의 권력귀족층에서 고의로 왕치산의 진정한 출신은 언급하지 않아왔다. 그는 국민당 장교의 아들인 것이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왕치산의 부친 왕더정(王德政)은 1907년생(광서33년)이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왕더정은 청화대학 제5기 졸업생으로 중화민국의 국국 상위(上尉)를 지낸다.
대륙의 위챗 계정 "청화대학토목공정과및건설관리계" 2018년 3월 19일 발표한 "5기선배 왕더정 - 한 보통 청화인의 경력"이라는 글에서 왕더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하여 13살때 사숙(私塾)에서 천진현(天鎭縣) 제1고등소학교에 입학하고, 16세때 천진동문학원(天津同文學院)에 입학한다. 민국16년(1927년) 천진 남개대학(南開大學) 예과반(預科班)에 입학한다. 젊었을 때 그는 중학생시위에 참가한 바 있다. 민국18년(1929년) 왕더정은 청화대학 토목공정계에 입힉한다.
"9.18사변'후, 왕더정은 제1기 청화대학남경청원단에 참여해서, 국민정부에 동북에 출병하여 실지를 수복하자고 청원한다. 그 글에서, 몸이 어디에 있든지간에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를 지킨다고 하였다.
민국22년(1933년), 왕더정은 청화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민국24년(1935년), 청도공무국으로 가서 기좌(技佐) 겸 하수도공구 주임을 맡는다. 몇년 후, 항일전쟁이 발발하고, 왕더정은 일본인을 위해 일하고 싶어하지 않아, 청도에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그는 산동 평도(平度)로 가서 교원이 된다. 그가 있던 곳은 국민당 항일유격구였고, 당시 산동에서는 각지에서 항일의 봉화가 일어났다. 왕더정은 국민당의 상위계급을 받고, 월급도 받는다.
신중국이 건립되기 전인 1946년 6월, 청도는 공산당의 손에 들어온다. 왕더정은 중공에서 계속 일한다. 다만 1950년대초, 중공의 치하에서 정치운동이 일어나, 이 국민당 장교출신의 왕더정도 크게 충격을 받고, 가산몰수를 당한다.
글에서 소개한 바에 따르면, 왕치산의 부친인 왕더정은 내성적인 성격에 말이 적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좌절을 겪으면서 놀라운 일을 많이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더정은 그때부터 언행을 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혁전의 반우파운동, 반우경운동때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문혁이 발발한 후, 왕치산의 부친은 한때 국민당 상위로서의 급여를 받았다는 경력으로 인해 조반바에게 끌려나온다. 왕더정은 비투를 당한 외에 단위의 청소등을 하여야 했다. 이런 경력은 왕치산의 성장과정에 낙인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왕치산은 1969년 중학(우리나라의 고등학교)을 졸업한 후(약21살), 섬서 연안 풍장공사(馮莊公社) 강평촌삽대(康平村揷隊)에서 2년간 노동에 종사한다; 같은 기간 아직 16살이 되지 않았던 시진핑은 북경지식청년으로 역시 연안 양가하(梁家河)로 왔다. 두 사람이 관계가 긴밀한 것으로 나중에 관료사회에서 정치동맹자가 된다.
왕치산은 중공원로 야오이린(문혁중 박해를 당했고, 나중에 중공13기 중앙정치국상위, 국무원부총리를 지낸다)의 독자인 야오밍웨이(姚明偉)와 중학교 동기동창이다. 왕치산은 그를 통해 야오밍웨이의 여동생 요밍산과 사랑에 빠진다. 야오밍산은 왕치산을 따라 하향(下鄕)하여 삽대에서 2년간 지낸다. 나중에 부부로 맺어진다.
왕치산은 1971년 섬서성 박물관에서 일한다. 1973년, 왕치산은 공농병학생 신분으로 섬서성 서안시의 서북대학 역사학과에 들어가 3년간 학습한다; 1973-1976년 서북대학 역사학과에 3년을 보낸 후, 1976년 왕치산은 섬서성박물관에서 계속 일한다. 전후로 8년간 일했다. 1979년 왕치산은 중국사회과학원으로 옮기고, 근대사연구소 민국사실에서 실습연구원으로 3년을 지낸다.
1982년, 야오이린은 중공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 되고, 중공중앙서기처에 들어간다. 이와 동시에 1982년 왕치산은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로 옮겨서 일하게 된다. 왕치산은 이때부터 정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제 국민당 가정배경을 지니고, 부친이 원래 국민당 장교였던 왕치산은 지식청년으로 농촌삽대때 중공원로이고 관직이 국무원 부총리에 이른 야오이린의 딸과 만나서, 부부로 맺어지게 된다. 장인이라는 '큰 나무'가 돌봐주고, 전총리 주룽지(朱鎔基)의 인정을 받아 그의 관료로서의 생활은 순탄하게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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