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기점문사(起點文史)
먼저 제1대황제 송고종(宋高宗) 조구(趙構)부터 얘기해보자.
송나라때는 수시로 각지에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그리하여, 국토는 100만도 되지 않았고, 국고는 더더욱 남은 게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금나라는 절충방안을 내놓는다. 바로 여자로 대신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기준은 제희(帝姬), 왕비(王妃)는 1명당 금1천정(錠)으로 치고, 종희(宗姬)는 1인당 금5백정으로 쳤으며, 족희(族姬)는 1인당 금2백정으로 쳤고, 종부(宗婦)은 1인당 은오백정, 족부(族婦)는 1인당 은 1백정으로 쳤다. 제희는 황제의 딸 즉 공주이다. 왕베는 황제의 며느리이다. 종희는 군주(郡主)0, 족희는 현주(縣主)이다. 남송은 개국황제 조구의 생모인 위귀비(韋貴妃)를 팔았고, 그녀는 개천대왕(蓋天大王) 완안현(完顔賢)과의 사이에 두 사내아이를 낳는다. 남송개국황제 조구의 본부인인 형병의(邢秉懿)도 팔렸다. 천회9년 금태종(金太宗)과의 아시에 아들 하나를 낳는다. 조구는 가난해져서 집안의 여인을 모두 팔아버린다. 모친을 팔고, 처를 팔고, 딸을 팔고, 형수를 팔고 심지어 조카딸도 팔 지경에 이르렀다. 남송황실은 일반백성 집안보다 못하다는 것이 전혀 과장되지 않다.
금나라사람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조구는 정강지치는 완전히 잊어먹는다. 그는 진회와 함께 악비 부자의 사건을 만들어 내어,'막수유'의 죄명으로 악비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금나라에 굴욕적으로 투항하는 소흥화의(紹興和議)를 체결한다. 금나라에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친다. 이를 통해 금나라로부터 자신이 회하(淮河), 대산관(大散關) 이남의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다. 매년 공물로 바쳐야할 것은 은 25만냥, 견(絹) 25만필 외에 금나라 통치자에게 정월초하루, 생일등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선물만 '수만'에 이르렀다. 금나라통치자가 달라고만 하면, 송고종을 즉시 명을 내려 찾아서 보내주었다. 그의 통치하에 있는 인민들에 대하여는 온갖 명목을 붙여서 뜯어냈다. 그래서 남송의 부세(賦稅)는 북송보다 더 많았고, 착취는 더욱 가혹했다.
양주에서 도망칠 때 너무 놀라서, 생육능력을 잃어버린다. 유일한 아들은 묘류지변(苗劉之變)이후 죽어버린다. 그리하여 후손이 끊겼다.
두번재 황제 송효종(宋孝宗) 조신(趙昚)을 얘기해보자. 그는 금나라와 "융흥화의(隆興和議)"를 체결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남송은 금나라에 더 이상 '군신'관계가 아니라, 숙질(叔侄)관계이다.
(2) 소흥화의에서 규정한 국경선은 유지한다.
(3) 송나라가 매년 금나라에 바치는 것은 '세공(歲貢)'에서 '세폐(歲弊'로 명칭을 바꾸고, 음, 견 25만냥,필을 20만냥,필로 변경한다.
(4) 송나라는 상주(商州, 지금의 섬서성 상현), 진주(秦州, 지금의 감숙성 천수)를 금나라에 넘겨준다.
(5) 금나라는 더 이상 금나라에서 송나라로 도망쳐온 인원을 추포하지 않는다.
위곡구전(委曲求全)했지만,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4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1명만 살아남았고, 그마저도 정신병이었고, 불효자이다. 송효종이 병들었을 때, 송광종은 사람을 시켜 병을 치료해주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병문안을 가지도 않았다. 송효종이 사망하고나서도 상복을 입지 않았다. 대송강산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였다. 아마 송효종은 죽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송나라의 셋째황제 송광종(宋光宗) 조돈(趙惇)을 얘기해보자.
양송(兩宋)역사상 정신장애를 앓는 황실자제는 드물지 않다. 에를 들어, 송태종의 동생 조정미(趙廷美), 송태조의 장남 조덕소(趙德昭), 송태종의 장남 조원좌(趙元佐), 여섯째아들 조원악(趙元偓), 그들의 죽음은 모두 심리적인 질병과 관련이 있다. 이는 아마도 어떤 유전적인 원인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통치집단내부에 끊임없는 암추가 더해져서, 약간의 황실 구성원들의 인격과 심리는 불가피하게 해쳐지게 된다. 조돈은 정신질환을 앓는다. 무식하면 겁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 미친 황제는 성격이 유약한데, 성격이 강퍅한 황후를 얻는다. 여러번 황후에게 혼나고 침대밑으로 들어간다. 상권욕국(喪權辱國) + 금나라에 대한 두려움 + 정신질환 + 사나운 황후로 그는 후손을 두지 못한다. 조돈의 삶은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네번째 황제 송영종(宋寧宗) 조확(趙擴)을 보자. 남송의 여러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조확도 가정화의(嘉定和議)를 체결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 송간의 관계는 백질(伯侄)관계로 고친다. 배상금액은 은30만냥, 견30만필, 돈300만관으로 바꾼다. 아마도 하늘의 벌을 받았는지, 남송의 네번째 황제 조확도 후손이 끊긴다. 남송의 다섯번째 황제 송이종(宋理宗) 조윤(趙昀). 남송이 원나라에 칭신(稱臣)하고 강북의 땅을 할양하는 것을 조건으로 세폐를 은20만냥, 견20만필로 화의를 체결한다. 쿠빌라이는 싸우지도 않고 이긴 셈이다. 조윤도 후손을 두지 못한다. 남송의 여섯번째 황제는 송도종(宋度宗) 조기(趙禥)이다. 조기는 태어나면서 몸이 약했다. 손과 다리에 힘이 없어서 걷기 시작한 것도 아주 늦었다. 7살이 되어서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했고, 지적능력이 정상수준을 한참 밑돌았다. 유약하고 무능하면서 황음하기는 송이종보다 더 했다. 송나라는 종실의 사람수가 많지 않아서, 종나라 종실에는 이런 저능아를 황제로 추대할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집안에서도 조씨황실을 가련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조기는 모두 3명의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3명의 아들은 모두 후사를 두지 못한다. 남송의 일곱째 황제 송공제(宋恭帝) 조현(趙顯) 태황태후가 어린 황제 송공제를 안고서 성을 빠져나와 원군에 투항하지만 나중에 처형당하고, 후손을 두지 못한다. 남송의 여덟째 황제 송단종(宋端宗) 조하(趙昰)는 원나라의 추격에 놀라서 죽는다. 나이 11살대이고, 후사를 두지 못한다. 남송의 아홉째 황제 송회종(宋懷宗) 조병(趙昺)은 1279년 육수부(陸秀夫)가 당시 나이 8살의 조병을 등에 업고 바다에 투신하여 죽는다. 그리하여 후사를 두지 못한다. "남송"왕조의 황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못난이들밖에 없다. "남송"왕조는 하늘의 벌을 받은 것같다. 모든 황제가 후사를 두지 못하니, 이는 전무후무한 경우이다. 아마도 나라를 잃은 죄악이 너무 커서일까? 죽은 후에도 속죄를 받지 못한다. 남송의 모든 제왕과 후비의 능묘는 양연진가(楊璉眞伽)라는 승려에 의해 도굴당한다. 송이종의 시신은 염할 때 수은에 적셨기 때문에 아직 부패하지 않고 있었다. 도굴자는 그의 시신을 능묘에서 끌어내어, 능묘앞의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수은을 얻어냈다. 그후에 송이종의 머리를 잘라서, 음기(飮器)로 삼아, 북경 대도의 원나라 통치자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의 몸통은 불살라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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