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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샤오젠화(肖建華): 그는 어떤 사람인가?

by 중은우시 2020. 7. 24.

글: 목요(穆堯)

 

덕륭계(德隆係)의 탕완신(唐萬新)은 감옥에 들어가고, 용금계(涌金係)의 웨이둥(魏東)은 투신자살하고, 명천계(明天係)의 샤오진화도 2017년 구정 전날 신비롭게 사라진다. 지금까지 소문만 들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예전 A주의 3대계파는 하나도 선종(善終)하지 못했다.

 

샤오젠화가 홍콩의 포시즌스호텔에서 끌려가서 사라진지 3년반이 지난 7월 17일, 중국은보감회와 증감회는 동시에 '명천계' 산하의 9개 기구를 접수한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명천계의 강력한 반박에 부닥친다. 사람들의 눈길은 다시 이 3조위안자산을 장악했던 전설적인 인물에게 모였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샤오젠화는 1971년 1월 13일 산둥성 페이청시 안자좡진 샤후이촌의 보통교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샤오푸건(蕭富根)은 현지 중학교 교사이고, 6명의 자식을 두었다. 샤오젠화의 위로 형님이 한명 있고, 아래로 4명의 여동생이 있다. 이런 대가족에 현지는 산지였다. 토지는 척박하였다. 그리하여 샤오젠화의 동년시절은 가난했던 기억으로 충만했다.

 

어렸을 때, 샤오진화는 역사책과 문학책에 심취했고, 사람들의 눈에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이미지였다. 1986년 15살이 샤오젠화는 산동 타이안시(泰安市)에서 대입수석을 하고, 북경대학 법률학과에 입학한다. 이것은 그에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

 

샤오젠화는 죽어라 공부만 하는 책벌레는 아니었다. 정반대로 사교능력이 일반인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는 그가 북경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낼 기회가 되었고, 또한 그후 금융제국을 확장할 때도 남다른 장점이 된다.

 

1989년 6.4사태전날, 샤오젠화는 북경대학 학생회주석에 선출된다. 이는 사람들이 아주 선망하는 자리였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전국청련(全國靑聯), 공청단중앙(共靑團中央), 내지 관료로 진출하는 첩경으로 여겼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샤오젠화 본인도 '관료'가 되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18세의 샤오젠화는 북경대학 학생회주석이 되었다. 당시 꿈틀거리던 학생운동에 불안과 난감함을 느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지 여부는 직접적으로 그의 미래와 관련된다. 그는 부득불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2014년 뉴욕타임즈는 한 보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동탕의 봄날, 샤오젠화는 일찌기 학교측과 대면하여 학생대표로 나서 보았다. 그후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 학교측의 가두항의가 이미 통제불능이 되었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당시 샤오젠화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심지어 학교측에 협력하여, 군대를 베이징에 진입시켜, 무력진압전에 항의활동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고 한다.

 

뉴욕타임즈는 샤오젠화가 그후 비지니스에서 굴기한 것은 "6.4사태"이후 샤오젠화에 대한 '상'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총명하기 그지없는 사람에게 그의 생각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는 원래 관료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즈의 보도에 대하여, 당시 명천집단의 대변인인 위란(余蘭)은 공개적으로 반박성명을 발표한다. 샤오젠화와 명천집단의 발전은 "6.4사태"와 그가 "6.4사태"때의 태도로 인하여 북경대학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았다는 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아마도 직접 이 잔혹한 투쟁을 겪었기 때문에, 샤오젠화는 결국 관료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한다. 몇년 후, 샤오젠화는 공개적으로 왜 관직으로 나가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귀한 것은 스스로를 아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북대에 있을 때 여러 당과 국가 최고지도자들을 만나보았다. 강력한 헌신정신과 열정이 없으면 그 일은 맡아서 하기 어렵다."

 

그는 심지어 스스로를 낮추는데 서슴지 않았다. 자신은 '난쟁이들 가운데 장군으로 뽑혔다'는 것이다. "나 자신은 학생화주석에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정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주로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로 내 생각에 객관적으로 말해서 우수한 사람은 당정체계내에 들어간다. 정치하는 이들의 자질은 사업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높다. 둘째로 내 생각에 정치하는 사람은 공헌하는 것에 비하여 얻는 것이 적다. 셋째, 정치분야에 들어가서, 우리같이 사업하는 사람들이 경쟁한다면, 겨우 중하수준이 될 것이다. 우리같은 사람은 약간만 거시적인 생각을 가져서 비지니스계로 들어왔다면 그것은 바로 난쟁이 중에서 장군으로 뽑히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장점이 있다."

 

샤오젠화의 말에 따르면, 1999년초, 당시 청화동방(淸華同方), 북대방정(北大方正)등 대학산하기업들은 그들을 격려했다. "우리같은 20대의 젊은이들은 모두 자전거를 타고, 밤을 새워서 HP, IBM의 대리상을 하면서 점차 밑천을 모았다."

 

이때 그는 인생에서 첫번째 큰돈을 모았을 뿐아니라, 졸업후 북대방정에서 일하는 처 저우홍원(周虹文)과 연애를 한다.

 

저우홍원에 대하여 공개된 정보는 샤오젠화보다 많지가 않다. 외부에서는 그녀가 샤오젠화보다 1살이 많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샤오젠화보다 1년 늦게 북대 정보관리학과에 입학했고, 바이두의 CEO인 리얜홍(李彦宏)과 같은 바네서 공부한 동기동창이다.

 

두 사람은 첫번째 밑천을 장만한 후 베이징에 차례로 4개의 회사를 설립한다. 이를 통해 향후 확장할 기반을 갖춘다. 1996년말, 두 사람은 이 기반을 가지고 저우홍원의 고향으로 간다. 그들의 처세능력으로 지분상호투자, 포장상장등의 방식으로 당시 3개의 상장회사를 지배한다. 샤오젠화는 이렇게 말했다. 내몽고로 가기 전에 그들은 이미 십여억위안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의 강호고사는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2017년 심지어 더욱 이른 2013년이전에 명천계는 놀라운 확장속도를 보여준다. 샤오젠화사건이 터질 때까지. 신재부(新財富)의 통계에 따르면, 2017년 6월말까지, 명천계는 이미 44개 금융회사에 지분참여했고, 은행, 보험, 신탁, 증권, 기금, 리스, 선물등에 걸쳐 있다. 금융산업의 모든 라이센스를 확보했다. 그가 지부참여하고 지배하는 금융기관의 자산규모는 3조위안에 이른다. 부가적국(富可敵國)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샤오젠화의 조용하거 숨어지내는 풍격과 그물모양의 교차지분보유, 그리고 회사의 빈번한 상호변경, 명의신탁 및 페이퍼컴패니설립등의 수법으로 외부에서는 그의 자산의 전모를 엿볼 수 없었다. 샤오젠화 본인도 공개적으로 정확한 숫자를 계산하기는 아주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샤오젠화는 이전에 자신이 모든 금융분야 라이센스를 가진 금융제국으로 확장하는데 몇개의 핵심단계가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처음에 맨손으로 시작하는 단계, 바로 몇몇 북경대, 청화대학생이 컴퓨터장사를 한 시기이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중국자본시장의 번영으로 법인주, 금융주에 미친 듯이 투자하였다. 예를 들어 싱예은행(興業銀行)등. 이어서 2000년에는 PE투자로 들어간다. 주식시장의 몇번에 걸친 불활때는 증권회사들이 파산한 틈을 타서 증권회사도 인수한다...

 

그러나 나무가 크면 바람을 많이 맞는다. 산둥루능(山東魯能), 태평양보험등 일련의 말썽많은 거래로 2012년에서 2013년까지 샤오젠화는 전대미문의 대관업무 위기에 빠진다. 사실상, 명천계는 대관업무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중국국내 심지어 해외에서까지, 엄청난 매체의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주식시장을 막후에서 조종하여 이익을 거둬간다든지, 친인척관계를 이용한다든지...이런 지적은 그로 하여금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2013년 4월 15일, 매체와의 인터뷰를 하지 않던 샤오젠화가 돌연 <21세기경제보도>와 인터뷰를 한다. 당시의 대화에서 샤오젠화는 생각이 분명하고, 응대에 기지를 보였다. 그는 당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없애고자 하였던 것이다.

 

다만 이 모든 것도 명천계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 사실상 덕륭계, 용금계와 달랐던 것은 베이징이 금융정리정돈에 대하여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샤오젠화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늘날 중국의 산업구조상황은 모건 시대의 미국과 비슷하다. 즉 각 업종에서 "소(小), 산(散), 난(亂), 약(弱)"의 국면이 나타난다. 공장은 난립하여 악성경쟁을 하며, 시장경제는 혼란하다. 외부에서는 샤오젠화의 롤모델은 J. P. 모건이라고 한다. 최소한 샤오젠화와 그의 명천계는 이런 이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잇었다. 정치를 통해 현실을 바꿀 수 없었는데, 그렇다면 사업을 통해서 중국의 시장질서를 바꿀 수는 있었을까?

 

외부에서는 확실히 샤오젠화를 잘 모른다. 만일 그가 잃게 이상적인 인물이라면 그는 아마도 원래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답을 내놓았다. 총명한 투자자는 목적이 돈버는 것이다. 단순히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모건과 록펠러의 생활은 모두 힘들었다. 모건은 나중에 기본적으로 미국국회청문회때문에 화병으로 죽는다. 나는 그저 투자자가 되고 싶다. 아주 진실한 투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