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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리판(力帆) 파산: 충칭 최고부자 인밍샨(尹明善)의 성공과 실패

by 중은우시 2020. 8. 30.

글: 만유독자망(萬維讀者網)

 

8월 27일, ST리판(ST는 특별관리종목을 가리킴)은 2020년 반기실적보고서를 발표했다. 상반기 순손실은 25.95억위안으로 늘어났다. 작년동기의 순손실은 9.47억위안으로, 손실규모가 173.99% 늘어났다. ST리판의 주가는 다시 폭락하여 시가총액은 겨우 46.64억위안만 남았다.

 

8월 7일 ST리판은 공고를 통하여 지배주주인 충칭리판지주주식유한회사가 만기채무를 상환하지 못하였고, 자산으로 채무를 전부 상환하기에 부족하여 법원에 구조조정을 신청했다고 하였다. 8월 11일, 법원은 구조조정신청을 수리했고, 리판지주는 정식 파산갱생절차에 들어갔다. 이는 인밍샨가족은 기업의 지배권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0년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2010년 11월, 리판주식은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시가총액은 한때 300억위안에 ㅇ르렀다. 그리하여 실제지배인인 인밍샨가족의 자산은 110억위안을 넘었었다. 당시 72세의 인민샨은 충칭최고부자에 올랐다.

 

10년이 흘렀고, 인민샨은 다시 바닥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는 무수한 풍우중 비교적 큰 좌절중 하나일 분이다.

 

지주가정출신,

5마오를 빌려 바늘과 실을 팔아서 돈을 벌다. '수학천재'로 일거에 이름을 날리다.

 

1938년 인밍샨은 충칭 푸링(涪陵)의 한 소지주가정에서 태어났다. 이 특수한 신부느로 인밍샨은 12살때 노모와 함께 버려진 초가집으로 가서 살아야 했다. 사람은 그래도 살아가는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인민샨은 빌린 5마오의 돈으로 바늘과 실을 사서, 인생의 첫 목돈을 번다.

 

"나는 시골에서 파는 바늘과 실을 충칭에 가서 샀다. 마침 아는 달걀장사가 시골에서 달걀을 수매하였고, 그것을 충칭에 가져다 팔았다. 그리고 나는 바늘과 실을 판 돈을 그에게 주었고, 그는 달걀을 더 많이 사들였다. 그는 달걀을 판 후에 돈을 다시 나에게 주었다. 그러면 바늘과 실을 더 많이 사들였다." 인밍샨은 열몇살 때 자금조달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1950년대, 어느 정도 돈을 번 인밍샨은 모친에게 살 곳을 구해준 후, 충칭으로 가서 공부한다. 대리시험을 쳐주는 조건으로 기숙사에서 돈을 내지 않으며 살았다. 그는 충칭의 한 공립중학에 합격한다. 이 기간동안 인밍샨의 총명함은 다시 한번 드러났다. 중국수학계의 적지 않은 난제들을 풀어서 학교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된다.

 

아쉽게도 인밍샨은 인생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는 출신이 좋지 않아,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동개조농장으로 보내어진다. 1979년 개혁개방이 되고서야 그는 그 속박을 버서날 수 있었다. 이때는 인밍샨이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긴 때였다. 그러나 그의 부호로의 길은 이제 막 시작된다.

 

1985년 한 외국관련 IT자문회사에서 100만위안을 번 후에, 인밍샨은 창업을 결심한다. 충칭창장서간공사(重慶長江書刊公司)를 설립한다. 아마도 이 회사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 풍미했던 <방중화강필자첩(龐中華鋼筆字帖)>이 바로 인밍샨의 작품이다. 그는 발행량이 천만부에 이르는 <중학생일각천총서(中學生一角錢叢書)>로 많은 돈을 번다.

 

수십만을 번 후에 바로 변신한다.

담배판매에서 오토바이분야로 뛰어들고, 마침내 전국오토바이1인자에 오른다.

 

"아주 활발한 이 업종의 바닥을 일찌감치 보였다. 크게 할 수는 없었다."

개략 수십만을 번 후에, 인민샨은 전업을 결정한다. 충칭창장서간공사를 포기한 것이다. 1991년 인밍샨은 담배판매허가를 받는다. 그러나, 얼마후 이것도 포기한다. 이윤은 괜찮지만, 인밍샨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업종은 탈세가 성행하고, 조폭의 '부두문화'가 넘쳤기 때문이다.

 

하루는 인밍샨이 학교기업인 오토바이공장에서 일하는 친구와 얘기를 나누던 중에, 오토바이엔진이 아주 잘 팔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매월 허난(河南)으로 가서 수백대의 엔진을 사오는데, 원가가 높아 생산경영에 이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 한담으로 54세의 인밍샨은 최종적으로 오토바이업계에 진입하겠다고 결정한다.

 

1990년대의 오토바이업계는 자링(嘉陵)과 젠서(建設)의 천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오토바이왕'들의 눈아래에서 인밍샨은 오토바이회사를 키운 것이다. 1992년, 인밍샨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만위안의 자금을 끌어모아 9명의 직원을 데리고 충칭홍다차량부품연구소(重慶轟達車輛配件硏究所)를 설립한다. 그리고 100리터 4행정기관엔진과 100리터전기시동엔진을 만들어낸다.

 

인밍샨은 다시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유는 수출시의 이윤이 내수시의 이익의 4배이상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까지, 리판그룹은 2억달러의 수출을 달성하여 전국에서 오토바이수출의 1위업체가 된다. 2005년, 이 숫자는 2.6억달러까지 올라가고, 전체 판매량의 35%, 이윤의 75%를 차지한다. 동남아, 아프리카등 40여개국가에 수출되었다. 리판은 옛날에 목표로 삼았던 자링과 젠셔를 멀찌감치 추월해 버린 것이다.

 

충칭최고부자가 자동차에서 무너지다.

아들은 3천만위안의 부가티를 구매했고, 지금은 손녀가 맡고 있다.

 

국민소득이 올라가면서 자동차가 점점 오토바이를 대체하여 주요 교통수단이 된다. 65세 고령의 인밍샨은 다시 자동차업종으로 전환한다. 2003년, 인밍샨은 충칭전용지동차제조공장의 80%지분을 인수한 후, 이름을 리판자동차유한회사로 바꾼다.

 

아쉽게도 행운은 이 노인에게 다시 오지 않았다. 자동차를 제조한지 십여년동안 리판은 여러 모델을 내놓았지만, 판매실적은 참담했다. 2006년, 리판은 최초로 자체설계한 '리판520'을 내놓는다. 출시한 1년동안 겨우 1만여대를 팔았다. 지금 리판자동차는 더욱 불황에 빠져 있다. 상반기 승용차판매량이 천대가 되지 않는다. 전년동기대비 95.29% 감소한 것이다. 신에너지자동차의 판매량은 겨우 549대이고, 전년동기대비 56% 감소했다.

 

재미있는 점은 리판이 자동차를 만드는데 계속 좌절을 겪었지만, 인밍샨의 장남인 인시디(尹喜地)는 자동차광이다. 2009년, 화시도시보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인시디가 3천만위안을 들여 부가티 베이론을 구매하여 핫이슈가 되었다. 그외에 여러 해동안 새로운 모델의 호화차량이 나오기만 하면, 인시디는 즉시 구매했다. 가격은 최소 수천만위안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자동차광1인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2017년 나이 팔순이 된 인밍샨은 은퇴를 선언한다. 인시디는 적합한 후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밍샨은 대권을 회사에서 20년간 일해온 원로 머우강(牟剛)에게 넘겨준다. 아쉽게도, 머우강도 리판의 휘황을 가져오지 못했다. 지금 회사는 파산의 진흙탕에 빠져버렸고, 한 미녀의 등장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여기는 내 손녀 인안니(尹安妮)입니다!" 금년 4월의 임시주주총회에서 인밍샨은 인안니를 제4기감사회의 주주측 감사로 추천한다. 결국 인안니는 리판지주의 신임 부동사장이 된다. 인안니는 1995년 출생이고, 인밍샨의 장손녀이다. 2017년 인안니는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분교를 졸압했다. 대학원을 다니다가 1년 휴학하고 회사로 돌아온 것이다.

 

10년이 흐르고 인밍샨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이번에 그는 자신의 손녀를 믿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