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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중국에 정변이 일어날 수 있을까?

by 중은우시 2020. 7. 19.

글: 왕혁(王赫)

 

북경위수구사령관을 교체한 것이 정변에 관련된 것일까? 이 이슈는 요 며칠간 핫이슈였다. 여기서는 정변문제를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시진핑이 취임한 후, 정변에 관한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다만 시진핑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정변은 실제로 2018년부터이다. 필자는 2019년의 중국정국을 평가하면서, "중공은 마오쩌둥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내부투쟁이 흉맹하다"는 글을 실었고, 이런 견해에 동의했다: "당내의 혼란상이 심각하여 형세가 심각하다. 이미 정변이 이루어질 환경을 형성되었다." 현재의 중국정국은 2018년과 비교하여 전면적이고, 심도있게, 그리고 더욱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시진핑의 처지는 훨씬 더 위험해졌다. 정변의 가능성도 커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미 정변이 이루어질 환경이 형성되었다"는 것에서 정변이 일어나기까지는 '질적인 도약'이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구체적인 요소가 합쳐지고, 만나고 격탕을 일으켜야 하므로 실제로는 난이도가 높다.

 

우리는 먼저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중국에서 일어난 정변을 살펴보자. 군사력을 동원한 정변은 세번 있었다.

 

제1차,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고나서 1달도 되지 않은 10월 6일, 화궈펑(華國鋒)이 예젠잉(葉劍廉) 및 왕둥싱(汪東興)과 연합하여, 마오쩌둥의 처인 장칭(江靑), 조카 마오위안신(毛遠新) 및 왕홍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의 5명을 체포한다. 이번 정변은 주로 왕둥싱이 집행한다. 그는 중앙판공실 주임으로, 중앙경위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앙경위국의 인원을 동원하여 집행한 것이다. 정변은 순조로웠고, 움직임도 크지 않았다.

 

제2차, 1989년 학생들의 천안문사태가 발발한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피로 천안문광장을 씻는다. 자오쯔양(趙紫陽)의 비서 바오퉁(鮑彤)의 말에 따르면, 덩샤오핑이 6.4를 진압한 것은 미리 모의한 정변이고, 자오쯔양을 하야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번 정변에서,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에 대하여 4인방을 체포할 때처럼 직접 군대를 동원하지는 않았다. 기실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덩샤오핑은 정국을 절대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부 군대의 장군들, 많은 원로장군들이 강제진압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오쯔양도 당시 군사위원회의 제1부주석이었다. 어느 정도의 위신이 있었다. 그래서 베이징에 수십만군대를 동원한 것은 부대간에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여, 만의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 수십만군대는 학생들을 도살하는 외에, 정치적으로 주로 탄압, 위협작용을 했다. 직접 정변에 참여했다고 하기는 어렵고, 간접적으로 참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3차. 6.4이후 중국의 최대 소란은 2012년 3월 19일의 미수로 끝난 정변이다. 2월 6일, 왕리쥔(王立軍)이 청두이 미국영사관으로 도망친다. 이는 직접적으로 보시라이(薄熙來)3월 15일 낙마를 불러왔다. 바로 이 3월 15일, 후진타오(胡錦濤)는 심복인 쉬린핑(許林平)에게 38단군 군장직을 맡긴다. 3월 19일 밤, 저우용캉(周永康)은 대규모의 무경부대를 움직여 신화문(新華門)과 천안문(天安門)을 포위하여, 보시라이사건의 핵심증인인 다롄스더(大連實德)집단을 보유한 부호 쉬밍(徐明)을 빼앗고, 기회를 보아 당시 국무원 총리를 맡고 있던 원자바오(溫家寶)를 암살하려 한다. 쉬린핑은 38군의 병사를 북경시중심으로 이도시켜, 신속히 무경부대를 무장해제시킨다. 저우용캉은 나중에 무기징역의 형을 받는다.

 

이 3번 이외에 또 한번이 있었다. 일부 군대의 고위장군들이 주력으로 돌연 핍박한 것이다. 피는 흘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한다. 그것은 바로 2002년 중공 16대에서 장쩌민이 정변을 미리 꾸며서 성공적으로 군사위원회 주석에 오른다.

 

원래, 정치국 상임위원회, 정치국에서 5차례에 걸쳐 격렬하게 토론을 거친 끝에, 중공은 장쩌민이 16대때 완전히 물러나기로 결정한다. 장쩌민은 그래도 협상을 해서, 자신의 몇몇 심복을 상임위원으로 집어넣는다. 다만, 장쩌민의 권력욕과 음모궤계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11월 13일, 중공 16대 주석단상임위원회 제4차회의때, 장쩌민이 차기 국방부장을 맡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장완녠(張萬年)이 돌연 일어나서 아주 강경하게 발언하며, 20명의 주석단구성원(모조리 구닌)이 연명으로 서명한 "특별동의"를 내놓는다. 장쩌민이 차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유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5가지 이유를 내놓는다. 결국 거수로 결정하는데, 리루이환(李瑞環), 웨이젠싱(尉建行), 차오칭저(曹慶澤)이 3명이 기권하고, 장완넨드 20명의 '특별동의'는 회의에서 통과된다. 장쩌민은 이렇게 군사위원회 주식직을 계속 유지한다. 그리하여 2004년 총서기직을 후진타오가 넘겨받는다. 그러나 그는 힘이 없었고, 그의 지시는 중남해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진핑이 취임한 이후 장쩌민이 군대내에 배치해놓은 인사구조가 분쇄된다. 후진타오의 정치력은 장쩌민과 비교하면 너무나 형편없었다.

 

이 4번의 정변을 보면 우리는 두 가지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정변에서 성공한 측은 항상 정치적으로 우세한 측이었다. 우위를 점하고 발언권도 있었고, 세력도 방대했으며 뿌리가 깊었다. 4인방은 입으로 떠들었지만 뿌리가 깊지 못했고, 위신도 없었다. 예젠잉등 실권파는 그들은 눈아래 두지 않았다. 자오쯔양은 비록 위신이 있었지만, 뿌리가 없었다. 정치력도 '총설계사' 덩샤오핑과 비교하면 같은 등급이 아니었다. 좇겨날 때 거의 아무런 반항도 못했다. 저우용카은 비록 정치국 상임위원이고 근 200만의 정법계통(핵심은 무경부대)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발호했지만, 전체국면을 장악할 능력은 없었다. 사람도 무슨 깃발을 들고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다. 정변의 구체적인 목표도 무슨 최고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준비없이 거사한 것이다. 명부정언불순(名不正言不順)해서 후진타오 원자바오에게 쉽게 제압당한다. 그리하여 장쩌민, 쩡칭홍도 저우용캉과는 선을 긋게 된다.

 

둘째, 정치력의 우열이 정변의 결과를 좌우했다. 군사력은 카드였다. 단순한 군사력만으로는 정변을 일으키기 어렵고, 더더구나 성공하기 어렵다. 중공을 일관하여 "당이 군대를 지휘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군사력의 운용이 아주 엄격하다. 일반적인 상황ㅎ에서, 정치적으로 우세인 사람이 군사력을 장악한다. 중공의 내부투쟁은 잔혹하지만, 중공체제는 정변에 대한 방어능력도 상당히 성숙되어 있다. 그리하여 정변을 일으키는 난이도가 아주 높아졌다.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시진핑이 전후로 두 명의 전 군사위원회 부주석(궈보슝, 쉬차이허우)과 2명의 현임 군사위원회 위원(팡펑후이, 장양)을 제거했지만, 아무런 반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는 일부 정변소문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2009년 17대 4중전회때, 당시 베이징군구사령관 팡펑후이가 계급승진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변을 일으켜, 그날 회의에서 후진타오가 18대 후계자를 선임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고, 1년후인 5중전회에서 비로소 시진핑이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선포되었다는 소문이다.

 

2017년 19대 전날, 팡펑후이와 장양이 낙마한다. 중공의 제6세대 후계자로 불리던 당시 충칭시위서기 쑨정차이도 낙마한다. 소문에 의하면 그들이 정변을 모의했다고 한다. 이들이 함께 정변을 모의했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거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정치핵심권에 들어있지는 않았다. 그저 방면지재(方面之才)이고, 통수전국(統帥全局)의 힘은 없었다. 그들중 핵심인물도 없었다.

 

본문의 첫부분에 언급한 베이징위수구사령관 교체가 정변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기 어렵다고 보인다.

 

당금 중국정국을 보면, 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정변이 발생할 가능성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다만 동시에 난이도도 더욱 커지고 있다.

 

첫째, 정변의 핵심인물이 나타나기 어렵다. 장쩌민, 쩡칭홍의 쪽을 보면, 장쩌민은 거의 죽어가고 있고, 쩡칭홍은 야심이 크고, 음모궤계에 능하지만, 그 자신이 나쁜 지슬 너무 많이 해서 명망이 없다. 구두군사(狗頭軍師) 역할은 가능해도, 우두머리로 나설 수는 없다. 공청단쪽을 보면, 리커창, 왕양은 모두 권력찬탈의지나 능력이 없는 것이 명백하다. 그저 형세의 발전을 앉아서 기다릴 뿐이다. 태자당쪽을 보면, 시진핑이 일찌감치 엄히 방비하고, 직적 태자당내의 파벌을 무너뜨렸다. 보시라이가 낙마한 후, 태자당쪽에 강력한 인물이 없다. 핵심인물이 없으면, 정변은 일어나기 어렵고, 일어나도 성공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중공은 현재 엉망진창이다. 누가 올라가도 해결하기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머리를 내밀려 하지 않을 것앋. 모두 시진핑이 책임을 다 지게 만들면서, 그가 계속 하도록 만들어, 전면에 나서게 만든다. 자신들은 가급적 뒤에 숨어서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당초 소련의 "8.19사건"에서 소련공산당의 강력한 인물들 부총통, 총리, 국방부장, 내무부장, KGB국장과 소련국방회의 부주석등등 실력으로 보면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정변 3일만에 실패했는가? 원인중 하나는 핵심인물이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 시진핑이 정변을 엄히 방비하고 있다. 현임 정치국 상임위원, 위원에 대하여, 시진핑은 1년에 1번씩 하는 "전제민주생활회"에서 5대기구(전인대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정협,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의 업무보고 및 중앙서기처의 업무보고를 받는다. "중앙정치국동지들이 당중앙과 시진핑총서기에게 서면으로 업무보고"한다. 이 세 가지 조치를 통해서 시진핑은 '핵심'지위를 확보하고, 다른 상임위원은 아무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

 

원로에 대하여는 올해 '덩푸팡(鄧樸方)의 명의로 양회대표에 보내는 공개서신에서 말한 것처럼 "원로동지들이 정치국획대회의 소집개최를 집단으로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중앙은 군경을 동원하여 원로동지와 혀님 당정군고위층을 '특수보호'하고 있다. 명목으로는 '특수보호'이지만 실제로는 통신을 저지하고, 행동자유를 제한하고, 손님을 만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다."

 

시진핑의 엄밀한 대비로 중공고위층은 정변을 일으킬 공간이 뎌욱 좁아졌다.

 

이렇게 하여, 정변이 발생할 가능성은 갈수록 커지지만, 난이도도 계속 높아진다. 이 두가지 상호모순되는 추세는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최후는 아마도 폭발적인 결말일 것이다: 좋게 끝나면 '고르바초프식'으로 정권을 내놓고, 옐친이 대체하는 것이다. 나쁘게 끝나면 '치우체스쿠식'으로 부부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