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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자금성과 천안문은 누가 건설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20. 7. 10.

글: 동몽지(董夢知)

 

금년은 자금성 탄생 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금벽휘황한 궁전군은 당금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되며, 보존이 가장 완벽한 궁전이다. 자금성의 앞에는 화려하고 장엄한 천안문이 있다. 이는 황성의 정문이고, 국가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자금성, 천안문은 누가 지었지?" 북경토박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명나라때의 괴상(蒯祥)이다!' 맞다 바로 괴상이다. 만일 괴상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괴상이 자금성을 건축한 것에 관한 자료는 북경의 여러 사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지 내용이 많지 않고 간략히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자료들 중에서 적지 않은 것은 서로 모순되거나 잘못 기록된 것이 있어, 이해하는게 쉽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나의 옛날학교친구인 괴원림(蒯元林)을 생각해냈다. 그는 소주사람이다. 그래서 괴상과 같은 고향이며 성도 같다. 그래서 그에게 부탁하여 괴상에 관한 자료를 찾아달라고 했다. 2년전 구정 전날 옛친구는 전화를 해서 소주에서 괴상 조부모의 고명비(誥命碑)를 찾았다고 알려왔다. 이 비는 원래 괴상묘의 남쪽에 세워져 있었는데, 태평천국의 난때 태평군과 지방의 단련(團練)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고, 전사한 태평군을 그 자리에 묻었는데, 그때 비석도 같이 묻힌다. 1990년대에 괴상묘원을 개보수할 때, 다시 발굴된 것이다. 비의 정면은 괴상의 조부모인 괴명사(蒯明思)부부의 고명비문이 있다. 비의 뒷면은 괴상의 조부, 부친 그리고 그 본인 3대의 족보와 평생사적을 기록해놓았다.

 

그리하여 필자는 괴씨가족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1. 소주(蘇州, 쑤저우)의 공장세가(工匠世家)

 

괴상의 조상은 호북(湖北) 양양(襄陽)에 살았다. 유송(劉宋)시대에 조상중 어떤 사람이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으니, 명문집안이라 할 수 있다. 명나라 홍무초기 괴상의 가족은 소주 오현(吳縣) 향산(香山)으로 이주한다. 괴상은 바로 이곳으로 이주한 후 30년이 지나 태어난다.

 

괴씨가족은 향산에 정착한 후, 이곳에서 후손을 번성시킨다. 대부분은 목공(木工), 와공(瓦工)으로 살았다. 남경황궁, 소주원림(蘇州園林), 사묘도관(寺廟道觀)을 차례로 건설하면서, 향산의 장인들도 점점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문적인 방대한 장인군을 형성하고, "향산방(香山幇)"으로 칭해졌다. 가장 많았을 때는 수천명에 달하기도 했다. 역사상 "향산방"은 여러 뛰어난 장인을 배출했다. 그러나 장인이므로 학문수준은 높지 않았고, 사서에 기록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현지의 <오현지(吳縣誌)>에도 괴상 한 사람만 기록하고 있다. 그것도 겨우 백여자의 짧은 기록이다. 청나라말기, 괴상의 후손중 한 갈래가 소주성내로 이주한다. 그리고 옛학교친구의 부친인 괴영(蒯榮)은 바로 소주성내로 이주한 그 갈래이다.

 

고명비의 내력에 관하여 옛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괴상이 삼품시랑(三品侍郞)에 봉해지면서 1품의 봉록을 받았는데, 아들이 고위직에 오르니, 부친, 조부의 지위도 올라간다. 조모 고씨(顧氏)는 숙인(淑人)에 봉해졌다. 그래서 고명비를 세운 것이다. 괴상이 죽은 후 그의 조부모와 합장했다. 그래서 비의 뒷면에는 괴씨가족의 원류와 괴상의 조손3대의 사적이 기록되게 된 것이다.

 

묘비를 찾아가기 위해, 우리는 괴상묘지로 갔다. 태호(太湖)를 따라 소주 오강구(吳江區)로 갔다. 넓다란 길의 가에 작은 냇물이 흘렀고, 그 냇물의 건너편에 석패방(石牌坊)이 서 있었다. 횡액은 전각으로 "괴시랑묘(蒯侍郞墓)"의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뒷면에 송백이 푸르른 녹지가 있었다. 이곳은 당연히 묘원이다. 묘원은 크지 않았고, 넓지 않은 돌을 깐 길이 묘지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돌길의 양측에는 두 줄의 궤양석비(跪羊石箄)가 있다. 괴상묘는 돌을 쌓아서 만은 1미터 높이의 원형묘이다. 꼭대기는 평평하고 풀이 가득 자란 황토이다. 묘의 뒤에는 반원형의 석벽이 둘러싸고 있다. 묘의 앞에는 석비가 하나 서 있는데, 위에는 "명공부시랑괴상지묘(明工部侍郞蒯祥之墓)"라고 쓰여 있다. 이곳이 바로 괴상의 안식처이다. 묘의 뒤에 있는 좁은 길은 6개의 기둥을 가진 비정(碑亭)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자안에는 그 고명비가 서 있다. 필자는 핸드폰으로 찍어서 남기고 싶었으나, 묘비는 풍화가 너무 심해서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은 모호할 뿐이다. 그래서 소주를 떠날 때, 부득이 옛친구에게 일을 하나 더 부탁해야 했다. 그에게 잘 보이는 묘비전문이나 탁본을 구해달라고 했다.

 

2. 부자는 이어서 자금성을 지었다.

 

작년 겨울,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그는 고서점과 서시(書市)를 다 돌아다녔는데, 괴상묘비의 탁본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 자료책을 하나 구했고, 책안에는 비문내용이 들어 있었다. 보내준 책을 받자마자 급히 열어보았다. 책의 제목은 <오중습유(吳中拾遺)>(상해문예출판사 출판, 2019년 1월). 거기에 <향산괴씨>라는 글이 있었다. 나는 자세히 읽어보았고, 그 글은 괴씨가족에 대하여 계통적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괴씨가족의 연원이 호북 양양이라는 것에서, 괴상의 조부가 명나라 홍무초기 소주 오현의 향산으로 옮겨왔으며, 괴상및 그의 후손 3대까지 소개했다. 책에는 괴상가족이 소주 향산으로 이주한 후, 점점 소주성내, 교외 및 산동 유현(濰縣)의 세갈래로 갈라졌다는 것도 기술했다.

 

책에 기술된 비문의 내용이 바로 내가 찾던 자료였다. 비의 정면은 괴상의 조부모인 괴명사 부부의 고명비이고, 글에는 괴상의 조모가 숙인으로 봉해진 연유를 기록했다. 다만 석비의 뒷면의 비문이야말로 내가 천리를 달려가서 찾았던 그 글이다. 비문은 약 900자인데, 결실되거나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약 1/5이었다. 주로 괴상 조부가 호북 양양에서 소주 오현으로 이주한 것에서부터, 괴상대 자녀의 가족까지의 족보였다.

 

더욱 기쁜 일은 비문에서 완벽하게 괴상과 부친 괴복능(蒯福能)이 천안문을 건설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능은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영락 을유년(1405년) 조정이 크게 건설공사를 벌이면서, 특별히 명하여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경사(북경)으로 데려갔다. 복능이 그중 우두머리였다." 즉 영락3년(1405년), 조정이 황궁을 건설할 때, 건축기술이 뛰어난 장인들을 북경에 모았는데, 괴복능은 그중 1인자로 불려간 것이다. 그때 괴상의 나이는 겨우 7살이었다. 그리서 북경으로 가지 못했다. 묘비에는 "괴복능이 밤낮으로 일하며 공로가 컸다"고 적었다.

 

괴상은 이런 장인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기술을 전수받았다. 게다가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다. 그리하여 부친 괴복능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일을 직접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괴상을 후계자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묘비에도 이렇게 적었다. "그리하여 아들 상에게 잇게 했다. 정유년(1417년) 상은 황제를 따라 북경으로 간다. 궁전의 건설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공수자(公輸子, 전설상의 장인)에 비견했다."

 

 3. 괴상은 자금성의 '총설계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 묘비에 기록된 괴상이 북경으로 간 시점은 필자에게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북경황궁의 건설은 영락3년(1405년)부터 영락18년(1420년)에 완공한다. 15년이 걸렸다. 그런데, 괴상은 영락15년(1417년)에 비로소 북경으로 가서 건축을 주재한다. 겨우 뒤의 3년간의 공사에만 참여한 것이다. 그를 '총설계자' 및 '총건설자'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 의혹을 가지고 필자는 관련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확실히 알게 되었다. 1402년, 주체는 '정난지역'을 일으켜 황위를 탈취한다. 그리고 영락제라 칭한다. 다음 해(즉 영락원년), 북평을 북경으로 개칭한다. 이는 그가 이미 그의 '용흥지지'인 북경을 수도로 삼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새로 도성을 짓는 것은 거대한 공정이다. 전국의 인력, 물력, 재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막 3년의 내전을 끝냈는데, 국가는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즉시 도성건설을 명하지 않았고, 여전히 남경을 도성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가 북경에 머물 때는 여전히 연왕부에 머물렀고, 북경을 '행재(行在)'라 불렀다.

 

영락3년(1405년), 도성건설공정이 개시된다. 영락제는 전국에서 장인들을 불러모은다. 관리를 운남, 귀주, 사천 등지로 보내 목재를 구해온다. 다음 해, 그는 다시 여러번 대신들과 북경천도계획을 논의한다. 칠월 그는 황궁건설을 명한다. 태녕후(泰寧侯) 진가규(陳家珪)가 책임자로 임명된다. 이제 정식으로 착공된 것이다. 다만 북경천도계획은 신하들의 일치한 동의를 받지 못했다. 반대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결심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의 우유부단으로 공사는 십여년이나 진행되면서, 대거 일을 벌이지는 못하고 소규모로 기초시공작업만 하게 된다.

 

1416년에 이르러, 신하들이 마침내 동의하고, 천도를 확정한다. 이때부터 대규모로 황궁건설작업을 벌이게 된다. 영락18년(1420년)에 모두 완공한다. 영락19년(1421년) 정월 초하루, 주체는 새로 완공된 태화전에서 성대한 행사를 열고, 북경천도의 조서를 반포한다. 북경은 '경사'로 개칭된다. 북경이 다시 전국의 도성이 된 것이다.

 

괴상이 북경으로 들어간 것은 공정의 마지막 3년이다. 늦기도 하고 짧기도 했다. 다만 그는 마침 황궁건설의 관건시기에 일했다. 공부영선소승(工部營繕所丞, 이 직위는 chief engineer에 해당한다)으로 황궁의 핵심공사 3대전, 양궁 및 천안문등 주요건축물의 건조를 주관한다. 이렇게 황궁건설의 위업을 완성한 것이다.

 

이를 보면, 지금 많은 책에서 '괴상이 고궁의 총설계사이며 총공정사이다"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어떤 공정도 설계가 우선되고, 건설이 그 다음에 이어진다. 시공십여년후에 괴상이 북경으로 가서 설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 관건적인 것은 황제의 뜻에 따라, "처음에 북경에 궁전을 건설할 때, 무릇....궁전, 문벌규제는 모조리 남경과 같게 하되 높이나 화려함은 남경보다 낫게 하라!"(명태조실록 권232). 북경황궁은 남경황궁을 본떠서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 설계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괴상은 단지 고궁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설계자'가 아니라.

 

4. 이순(耳順)의 나이에 천안문을 다시 짓다.

 

괴상은 고궁이 설계자는 아니었지만, 천안문의 설계자이면서 건축가이다. 천안문(원래 이름은 承天門)은 황성의 정문이다. 중국 고건축 중의 정화이다. 천안문은 자금성과 같은 해에 완공된다. 이 문은 괴상이 설계를 책임지고, 건설을 지휘한 것이다. 당시는 황와비첨(黃瓦飛檐)의 삼층누각식의 목패방(木牌坊)이었다. 천순원년(1457년), 목패방이 불행하게도 번개를 맞아 불에 탄다. 성화원년(1465년), 괴상은 67세의 고령으로 다시 나서서 천안문 중건이 책임을 맡는다. 그는 남방의 우수한 재료인 어요금전(御窯金磚), 소주식 회화기법을 모두 성루의 건설에 이용한다. 중건된 천안문은 규모가 원래보다 컸고, 거대한 궁전식 건축물로 확대건설한다. 기세는 웅위하고, 배치는 정교했으며 현대 천안문의 규모와 양식을 이루었다. 그후 600년동안, 명, 청 두 왕조를 거치고, 신중국이 성립된 이후 지금까지, 천안문은 여러번의 중건과 수리를 거친다. 그러나 모두 이 기초 위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크게 바꾸지 않았다.

 

괴상의 업적은 이뿐만이 아니다.1440년, 그는 일찌기 건청궁, 곤녕궁의 두 궁전을 짓는다. 영락18년(1420년), 삼대전(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큰 불로 소실된다. 정통(1436-1449)연간, 괴상은 다시 삼대전의 중건공정을 이끈다. 천순년간, 괴상은 다시 유릉(裕陵)의 설계와 시공을 이끈다.

 

<헌종실록>에서는 괴상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정통이래, 무릇 건축을 할 때면 괴상에게 맡겼다." "전각누사(殿閣樓榭)부터 회우(回宇)까지 그가 도면을 그리면 모두 황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즉, 정통때부터 모든 궁전의 건축은 괴상이 주재하였고, 그가 설계하고 시공했다는 것이다. 그가 한 것은 모두 황제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관료로서의 생애는 순탄했고, 계속 승진을 거듭한다. 괴상은 관직을 받은 후 수십년간 가마를 타지 않는다. 그는 노동자의 본색을 유지한 것이다. 그는 관직에 미련도 없었다. 나이가 들자 스스로 관직을 사임한다. 그러나 건축을 다시 하거나 수리할 때 그의 도움이 필요하면 그는 재직시와 마찬가지로, 기획하고 친히 현장에 나타나서 감독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황제들의 총애를 받았다. 승진하고 싶지 않아도 승진할 수밖에 없었다.

 

괴상은 공부영선소승에서 시작하여, 계속 승진하여 공부주사, 태복시경, 공부우시랑에 이른다. 정3품의 고위관리가 된 것이다. 그리고 1품의 봉록을 받았다. 즉, 괴상은 실무전문가에서 시작하여 계속 승진해서 건설부차관에 이르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관급의 대우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장인역사에서 확실히 드문 경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