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The Paper
7월 7일 오전 10시경, 황산시(黃山市) 신청구(心城區) 툰시(屯溪)의 국가급 중점보호문화재인 명나라때의 진해교(鎭海橋) 일명 둔계노대교(屯溪老大橋)가 홍수에 휩쓸려 무너졌다. 바로 전날, 안휘 정더현(旌德縣)에 있는 명나라때의 고교인 낙성교(樂成橋)도 홍수에 무너져, 노면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짧은 이틀만에, 두 개의 고휘주(古徽州) 역사인문의 고교가 홍수에 붕괴되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34년 5월, 저명한 작가 욱달부(郁達夫)가 둔계로 와서 신안강(新安江)가에서 투숙한다. 비록 당시 둔계는 토비 주로오(朱老五)에 의해 불에 탄 이후여서 담장이 무너지고, 집도 쓰러져서 아직 옛모습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시인은 열정을 가지고 이곳을 찬미했다.
그는 신안강가에서 배를 타고 밤을 보내면서 여행기 <야박둔계기(夜泊屯溪記)>를 섰으며, 인구에 회자되는 절구를 지었다:
신안강수벽유유(新安江水碧悠悠)
양안인가산약주(兩岸人家散若舟)
기야둔계교하몽(幾夜屯溪橋下夢)
단장춘색사양주(斷腸春色似揚州)
안휘망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경, 현지기자는 둔계 현장으로 가서 홍수상황을 보고 있었는데, 둔계노대교가 소재한 횡강의 강물이 신속히 물어났다. 당시까지는 아직 다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10시경이 되자 대교의 교돈(橋墩)이 홍수에 손괴되고, 그후 다리본체가 일부 끊겨나간다.
돈계노대교(진해교)는 작견 국가급 중정문화재로 공표되었고, 황산시에서 가장 오래된 명나라의 옛다리였다.
둔계노대교는 이름이 진해교인데, 안휘성 황산시 둔계구에 위치하고 있다. 명나라 가정15년(1536년)에 건설되었고, 청나라 강희15년(1676년)에 중수되고, 청나라 강희 34년(1695년) 다시 수재를 만나 무너지고, 강희 38년(1699년) 다시 중수한다. 길이는 133미터이고 너비는 13미터이며 6개의 돈(墩)과 7개의 구멍을 가진 돌로 만든 공교(拱橋)이다.
노대교는 둔계삼강구(三江口) 즉 신안강, 솔수(率水), 횡강(橫江)이 만나는 곳의 횡강구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로 둔계노가와 여양고진(黎陽古鎭)을 잇는다. 옛날에는 둔계로 드나드는 문화였으며 현재는 황산공항, 서부교외 및 강서 무원으로 가는 중요통로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융부(隆阜)의 부호인 대시량(戴時亮)이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돈을 내어 지었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연간에 수몰되었는데, 정자겸(程子謙)이 670만관의 돈을 내서 2년에 걸쳐 다시 지었고, 17년이 지난 후 다시 수몰되었다. 정자겸은 이렇게 말한다: "다리가 튼튼하지 못했던 것은 나의 잘못이다." 그리고 다시 혼자 돈을 내서 중수한다. 그러나 다리가 완공되기 전에 그는 죽고 만다. 그의 아들 정악(程岳)은 당시 광서청리사(廣西淸吏司), 원외랑(員外郞)이었는데,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마침내 다리를 완공한다.
청나라때의 사석항(査錫恒)은 <둔계귀범(屯溪歸帆)>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벽수몽회최상류(碧水蒙洄最上流)
수양협안박귀주(垂楊夾岸泊歸舟)
어가원근종풍제(漁歌遠近從風递)
범영고저대월수(帆影高低帶月收)
비권극련투수조(飛倦劇憐投樹鳥)
장한종선방탄구(長閑終羨傍灘鷗)
촌연기처누대호(村煙起處樓臺好)
일편파징만경푸(一片波澄萬頃秋)
또 다른 홍수에 휩쓸린 정더현 산시진(三溪鎭)에 있는 낙성교는 '환남제2고석교(皖南第二古石橋)"라고 불린다.
낙성교는 남하교(南河橋)라고도 불리고, 속칭 삼계대교(三溪大橋)이다. 위치는 삼계진의 휘수(徽水), 포린계(抱麟溪), 욱계(玉溪)의 세 강이 만나는 곳에 있으며 길이는 156미터이다.
현지 문사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낙성교의 전신은 오량교(五梁橋)이다. 최초의 문자기록은 <금오강씨종보(金鰲江氏宗譜)>에 보인다. 족보에서는 청나라 동치 정묘거인인 강림이 편찬한 <수오량교기>가 실려 있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오량교는 우리 일족이 외남하의 부두에서 멀리는 휘적과 통하고 가까이는 인근촌과 통하기 위해.....이 길을 지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아마도 이전에는 강이 너무 넓어서, 건축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명나라이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유한 상인이 나타나고, 이런 다리도 건설할 수 있었다.
낙성교는 몇번 무너지고 새로 건축되었다. 청나라 동치연간 다리가 손상되어 동네사람 방선수(方先修)가 다리수리를 제안한다. 삼게대교는 역사의 변천을 겪어 민국25년(1938년) 강담인(江淡人)(강촌사람. 북경, 절강 두 곳에서 장사를 했다)이 다리노면을 수리한다. 사람됨이 겸허한 호국방(胡菊舫, 적계 상장 사람. 점포이름은 호홍발, 상회의 동사장이었다)이 돈을 내서 수리를 돕는다. 강담인은 북경, 절강 두 곳을 오가므로 직접 공사를 감독할 수 없어, 그의 손자인 강택벽(江澤壁)이 수리를 감독한다. 이번에는 안휘성장 강한산(江漢珊, 강촌사람)의 자금지원도 받는다. 1997년, 낙성교는 홍수로 노돈이 손상된다. 정더현정부는 자금을 내서 수리했다. 2009년 5월 8일, 정더현인민정부는 공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고교는 사람과 차량의 통행과 봄여름 두 계절의 홍수로 다리의 노돈이 엄중하게 손괴되었고, 어떤 돌난간은 부러져서 철근이 노출되었다. 어떤 분수첨(分水尖)은 잡초와 나무에 부딛쳐 기울어져서 위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현 문체국, 문물관리소등 관련부서는 기술자들을 보내 이 다리의 손괴부위에 수리를 진행했다.
2020년 7월 6일, 홍수는 다시 낙성교를 파괴시킨다. 현지정부의 공무원은 사건발생후 이미 보고하여 안휘성문물국의 전문가가 현장으로 와서 손괴상황을 보고 갔다고 한다. 다시 공사를 해서 복원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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