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혁(王赫)
올해 들어 중국의 정국은 급격히 악화되고, 좋지 않은 일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내부투쟁도 심각하다. 그러나, 일부 매체에 소개된 소위 시왕투(習王鬪, 시진핑과 왕치산의 싸움)이나 시리투는 사실이 아닌 것같다. 여기에서는 시리투에 대하여만 살펴보기로 한다.
최근 리커창의 두 가지 행동이 주목을 받았다. 하나는 6월 1일 리커창이 산둥을 시찰할 때, '노점상경제'를 칭찬한다. 노점상경제, 소점경제(小店經濟)는 중요한 취업원이며, '고대상(高大上)'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생기(生機)라고 했다. 이어서 여러 성들이 따라했고, 관리감독을 완화했다. 심지어 장시성 쥬장 뤼창시의 성관(城管)은 앞장서서 노점상들을 불렀다. 그러나, 노점상경제가 불붙기도 전에, 찬물이 뿌려진다. <북경일보> 6월 7일자 사설에서 노점상경제는 '베이징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CCTV에서도 이렇게 평론한다: 노점상경제는 한꺼번에 일으킬 수 없다.등등. 각 지방도 서로 입장이 달랐다. 예를 들어, 지린은 지지하고, 베이징, 선전은 지지하지 않음을 명확히 했으며, 다롄은 단속했다.
또 하나는 5월 28일, 리커창이 전인대가 폐막된 후의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 "6억명의 매달수입은 1천위안이다. 1천위안은 중급조시에서 주택을 임차하기도 벅차다. 현재는 또 전염병까지 돌고 있다." 이는 중국의 태평성세라는 거짓말을 그대로 폭로한 셈이다. 원래 중국공산당은 2020년에 '전민탈빈(全民脫貧)'을 실현하고, '전면적으로 소강(小康)사회를 건설하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트위터와 SNS에서 <리커창반성문>이라고 불리는 들이 돌기도 했다. 반성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시진핑과 자오러지(趙樂際)가 정치국을 대표하여 리커창과 정식으로 면담을 하여, 리커창이 마음대로 전중국의 6억명의 월수입은 1천위안이 안된다는 진상을 폭로해서 극히 나쁜 정치적 영향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그외에 연초 우한폐렴의 의사결정과정에서도 시진핑과 리커창의 입장은 다른 것같았다. 재미학자 한롄차오(韓連潮)는 1월 26일자 트위터에서 이렇게 폭로한다: 국내친구가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국무원이 월초에 SARS를 참조한 방역방안을 건의하며, 우한지역의 전염병대비를 하자고 했지만, 중공중앙은 중국의 새해분위기를 해친다는 것을 이유로 승인해주지 않았다.
이상의 3가지를 가지고 시진핑과 리커창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확실히 시진핑과 리커창은 정책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다. 심지어 정치적 견해에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리커창은 시진핑과 싸울 생각도 없고, 싸울 힘도 없다.
첫째, 시진핑은 "핵심"이고, 계속하여 '양개유호(兩個維護)'를 강조한다. 리커창에게는 움직일 공간이 별로 없다.
시진핑은 중국의 고위층을 통제하고 있으며 3가지 움직임이 있다: 하나, 전제민주생활회를 소집개최하며, 시진핑은 중앙정치국의 각 위원들의 발언을 대조검토하여 결론을 내린다. 둘, 시진핑은 중앙정치국상임위원회를 주재하며 5개기구(전인대상임위원회, 국무원, 전국정협,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의 업무보고와 중앙서기처의 업무보고를 받는다. 이 두 가지 동작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19대이후에는 시진핑은 바로 세번째 움직임을 보였다. 즉 중앙정치국 구성원에게 당중앙과 시진핑에 서면으로 업무보고를 하도록 했다(금년은 우한폐렴때문에 이에 대한 보도는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은 모든 것이 '핵심'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리커창의 활동공간은 상당히 좁다.
둘째, 리커창이 비록 국무원을 주재하지만, 시진핑의 '당정합일'사상의 지도하에 최근 당정기구개혁(2018년)에서 당권이 확장되고, 국무원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예를 들어, 이데올로기분야에서, 중앙선전부는 신문출판과 영화를 통일관리한다; 공무원관리분야에서, 국가공무원을 중앙조직부에 편입시켰다; 종교, 민족, 교포업무등 분야에서, 국가종교사무국, 국무원교무판공실을 중앙통전부에 편입시키고, 국가민족사무위원회를 중앙통전부의 지휘감독을 받도록 했다는 등등.
그외에, 시진핑은 군권을 집중시켜, 2018년 1월 1일부터 무경(武警)부대는 더이상 국무원과 중앙군사위원회의 이중관리를 받지 않고, 중공당중앙, 중앙군사위원회의 통일지휘감독을 받도록 했다.
<인민일보>의 사설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당이 무경부대에 대한 절대영도를 확보하는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다."
셋째, 리커창의 약세로, 시진핑과 싸우려는 생각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더더구나 그의 지위를 대체하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2007년 17대때 시진핑-리커창은 함께 중공중앙정치국 상임위원에 들어갔다. 이는 중공역사상 극히 드문 경우였다. '쌍후계제"로 불렸다. 외부에서는 한때, 시진핑과 리커창이 평분추색(平分秋色)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중공정치는 실력이 말을 한다. 그리고 결과는 금방 나왔다. 시진핑과 리커창은 평행관계가 아니라, 상하관계이다. 가오신(高新)은 <자유아시아라디오>에서 이에 대하여 어러 해석을 내놓았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하나, 시진핑은 2013년부터 '중앙재경영도소조'의 조장을 맡았다. 중앙재경영도소조'를 '중공중앙정치국이 경제공작을 영도하는 의사협조기구'에서 새롭게 '중앙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의 위임을 받아 경제사회발전의 중대전략정책결정을 진행하는 기구'로 포지셔닝을 했다. 의사기구에서 의사결정기구로 바뀐 것은 국무원이 경제공작에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었던 권리가 리커창에 이르러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 리커창의 매번 정부업무보고에서 항상 시진핑을 언급한다. 그러나 리커창의 전임자인 원자바오의 10차례에 걸친 정부업무보고에서 매번 바로 주제로 들어갔다. 한번도 앞부분에 당시 총서기를 맡고 있던 후진타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자바오의 전임자인 주룽지가 한 5번에 걸친 정부업무보고에서도 시작부분에 공로를 '장쩌민'에게 돌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리커창은 자신의 위치를 '후진타오-원자바오시대'의 원자바오, '장쩌민-주룽지시대'의 주룽지로 놓지 않았다. 리커창의 약세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진핑과 리커창이 싸운다는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사실상, 시진핑의 진정한 정적은 장쩌민과 쩡칭홍이다. 시진핑의 현제 곤경의 직접적인 원인은 시진핑이 19대를 전후하여 장쩌민, 쩡칭홍일파와 타협하였기 때문이다. 장쩌민, 쩡칭홍은 왕후닝을 통하여, 그리고 시진핑의 '보당심리'를 이용하여, 시진핑을 도랑으로 끌어내렸다. 그리하여 시진핑은 장쩌민과 쩡칭홍이 잘못했던 것까지 모두 책임지게 되어버렸다. 장쩌민, 쩡칭홍은 금선탈각(金蟬脫殼)의 수법으로 원래 정해놓았던 '침선계획(沉船計劃)'에 따라 멀리 도망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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