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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홍도여황(紅都女皇)>사건이 재연되는가?

by 중은우시 2020. 5. 6.

글: 선봉진(撣封塵)

 

4월 29일,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전인대3차회의를 5월 22일에 베이징에서 개최하고, 29일 폐막한다고 밝혔다. 전국정협회의는 5월 21일에 베이징에서 개최되고 27일 폐막한다. 현재 양회의 소집개최까지 반달여 남았는데, 두 통의 궤이하기 그지없는 '태자당'의 공개서신이 양회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 두 서신은 각각 중국내부의 시진핑지지, 시진핑반대의 양파세력을 대표한다.

 

시는 시가 아니고, 덩은 덩이 아니다.

 

(1) "시위안핑"의 공개서신은 지진핑지지의 저급홍(低級紅)이다.

 

4월 30일, 인터넷에는 자칭 시위안핑의 공개서신이 나돌았다. 시진핑을 위해서 썼으며 시진핑의 곤경을 풀어주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공개서신에서 그의 형(시진핑)이 이렇게 큰 중국을 다스리는게 실로 쉽지 않으며, 그의 형은 중국의 최고지도자로서 반드시 먼저 '대좌(大左)'한 후에 '대우(大右)'할 수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내에서 기반을 잡아야 하고, 기반을 잡은 후에 비로소 철저한 정치개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위안핑은 글에서 형을 위해 이렇게 변명했다: "공분을 불러일으킨 여러 사건은 그의 뜻이 아니다. 완전히 아래사람의 '고급흑'으로 그에게 골치거리를 던진 것이다. 현재 정법분야의 몇 사람의 처리는 바로 이런 잡쇄(雜碎)에 대한 대청산이다. 이는 아직 시작일 뿐이고 본무대는 뒤에 남아 있다."

 

(2) "덩푸팡"의 공개서신은 시진핑타도의 고급흑(高級黑)이다.

 

5월 1일, 자칭 덩푸팡이 썼다는 공개서신이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한다. 서신은 중국양회대표에게 쓴 것이다. 서신에서는 요 몇년동안 중국에서 발생한 여러 큰 사건은 어떤 것은 국가안위에 관계된다. 만일 이러한 때 아무도 일어나서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아마 기회가 없을 것이다. 서신에서는 원로지도자들이 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자는 집단적인 움직임을 막기 위하여 시진핑은 군경을 동원하여 전임 원로들을 묶어놓았다고 하였다.

 

서신에서는 반문하는 문구로 15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모조리 시진핑을 겨냥한 것이다. 양회대표는 인민을 보호하는가 아니면 어느 독재자의 권위를 보호하는가? 당권자가 일존이 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일존인가? 이번 바이러스를 당중앙에서 은폐하지 않았는가,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가? 미중관계악화로 외자가 대거 철수하며, 홍콩이 동란에 빠지고 대만이 점점 멀어지며, 일대일로의 이성을 잃은 투입등 누가 책임질 것인가등등. 서신의 결미에서는 이렇게 호소한다. 양회대표는 어느 당권자에게 책임지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천고죄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대답을 얻어내길 바란다고 했다.

 

비록 두 통의 서신의 작자는 모두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지만, 사람들은 그 진실성에 의문을 표시한다. 베이징의 시국관찰원인 화포(華頗)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평론한다. 시위안핑, 덩푸팡의 서신은 모두 가짜이다. 화포의 분석은 이러하다. 시위안핑은 이런 서신을 쓸 리가 없다. 시진핑지지파가 그의 명의를 빌어 시진핑을 위해 해명한 것이다. 만일 정말이라면, 어떻게 그가 시진핑의 숨은카드를 공개할 수 있단 말인가?

 

화포의 분석은 이러하다: "생각해보라 덩씨집안은 지금 스스로 지키기에 바쁘다. 장쩌민시대에 그의 동생 덩즈팡(鄧質方)이 처벌받았다. 당시 그의 모친은 자살하겠다는 위협으로 장쩌민, 주룽지를 협박했고, 겨우 모면했다. 그래서 덩씨집안은 계속하여 스스로를 지키려는 입장이었다. 이번 안방(安邦)의 우샤오후이(吳小暉)사건에서도 덩줘란(鄧卓苒)은 즉시 우샤오후이와 이혼함으로써 꼬리를 잘랐다." 그러므로 이 서신도 누군가 덩푸팡의 명의를 도용한 것이라고 본다.

 

"홍도여황"사건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1975년, <홍도여황>이라는 제목의 책이 홍콩에서 출판된다. "홍도"는 중국공산당의 수도 베이징을 가리킨다. 즉 중공정권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황"은 강청(江靑)을 가리킨다. <홍도여황>에서는 공공연히 모택동이후 강청이 홍도를 주재하며 중국의 여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던 그 시기에 이 책은 정계에 폭탄을 터트린 것같이 중국정국과 사회에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바로 다음의 몇 가지 이유때문이다.

 

첫째, 당시 모택동이 비록 이미 늙었지만, 어쨌든 살아있었다. 당시에 정치적으로 부상하던 모택동의 부인 장청을 '여황'으로 받드는 것은 강청이 찬탈의 음모를 꾸민다는 것을 암시했다.

 

둘째, 중국의 궁정은 역대이래로 신비했다. 속칭 대내(大內)라 부른다. 궁정의 금지에서 일어나는 생활의 세부사항은 반드시 비밀로 지켜져야 한다. 그런데, <홍도여황>에서는 당시 백성들이 신으로 떠받들던 모택동의 여러가지 사생활을 폭로했다.

 

셋째, 중공내부의 '문혁파'와 '무실파(務實派)'간의 투쟁이 암중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책의 출판은 분명 깊은 뜻이 있었다. 당시의 정계풍운에 궤이함을 더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결국 최종적으로 모택동의 귀에도 들어간다. 그는 화가나서 대노한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모택동은 강청에게 분노하여 이런 비시(批示)를 내렸다: "고루과문(孤陋寡聞), 우매무지(愚昧無知). 즉시 정치국에서 나가라. 이제부터 서로 딴 길을 간다." 책 한권이 하마터면 강청의 정치생명을 끝장낼 뻔했다. 심지어 모택동이 강청과 서로 갈라져서 다른 길을 갈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누가 모택동과 강청에게 이런 '고급흑(高級黑)'을 선물했을까?

 

어떤 사람은 임표(林彪)의 일당이 임표를 위해 복수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세계에 '궁중비사'를 공개함으로써 모택동, 강청의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광저우(廣州)는 임표의 본거지였고, 광저우군구는 임표의 옛부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예전에 임표는 광저우로 남하할 계획도 있었다. 홍콩에서 '홍도여황'사건을 기획하고 실시하는데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다. 그리고 중병에 걸려있던 모택동에게 정신적인 타격을 가하는데도 시기적으로 적합했다. 또 하나의 추측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예젠잉(葉劍英)이 막후에서 조종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광동은 예젠잉의 본거지이기 때문이고, 당시 예젠잉은 강청에 반대하는 막후주모자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주은래(周恩來)가 이 일을 기획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강청등으로부터의 포위공격에 반격을 가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 어쨌든 당시 주은래는 남은 날이 많지 않았고, 강청등으로부터 악독한 공격을 받아왔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반격을 가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홍도여황>이 도대체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막후의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중국은 유맹(流氓)으로 시작했고, 당내의 방파투쟁은 끊인 적이 없었다. 수단도 쓰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정강산, 연안시기의 명살(明殺)에서, 건국이후의 암살(暗殺)까지, 고급홍, 저급흑. 그리고 본문에서 얘기한 몸을 숨긴 필묵관사(筆墨官司). 중공의 내부투쟁의 형식과 수단은 세계각국을 뒤져보더라도, 동생국가인 북한만이 중국과 한판 겨뤄볼 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