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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쑨리쥔사건으로 잠못드는 사람은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20. 5. 3.

글: 이정관(李正寬)

 

2020년 4월 19일, '국보(國保)의 우두머리', 공안부 부부장 쑨리쥔이 돌연 낙마했다. 이는 중국의 관료사회에 핵폭탄을 투하한 효과가 나타났다. 10일후, 전 610판공실 주임, 사법부장인 푸정화가 면직되었다. 분석에 따르면, 푸정화가 급속히 면직된 것은 아마도 그가 곧 낙마할 전조라고 본다.

 

외부에서는 보편적으로 쑨리쥔 낙마의 주요원인을 그가 '다오시(倒習, 시진핑타도)'와 '정변'에 참여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과연 그렇다면, 쑨리쥔사건은 일반적인 '부정부패'사건 혹은 '정치적으로 줄을 잘못 선 사건'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누군가 쑨리쥔의 낙마는 옛날 왕리쥔의 망명, 저우용캉의 낙마와 비견할만하다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당시 왕리쥔이 미국영사관에 망명신청한 것으로 인하여 드러난 정변사건에서 보시라이, 저우용캉, 링지화, 쉬차이허우, 궈보슝등 장쩌민파의 거물들이 줄줄이 엮었었다. 이를 보면, 무릇 '정변'에 관련되면 배후에 분명히 일당이 있다. 쑨리쥔은 그저 앞에서 더러운 일을 직접 처리하는 실행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쑨리쥔에게 사건이 터지면, 그의 배후에 어떤 사람들이 불안에 떨며 잠들지 못할 것인가?

 

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쑨리쥔의 윗선은 장쩌민, 쩡칭홍과 직접 연결된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쑨리쥔은 일찌기 멍젠주, 궈셩쿤 두 기에 걸친 공안부장, 정법위서기의 심복인물이다. 멍젠주와 궈셩쿤은 모두 쩡칭홍이 발탁한 인물들이다. 그중 현임 중앙정법위서기 궈셩쿤은 쩡칭홍의 오촌조카의 사위이다(궈셩쿤의 처의 할머니는 쩡칭홍의 모친 덩류진의 친여동생이다). 바로 이런 관계때문에 공안,정법업무경력이 없는 궈셩쿤이 2012년 18대에서 다크호스로 나타나 공안부장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2017년 중앙정법위서기가 된다.

 

그래서, 쑨리쥔에게 일이 터지면, 궈셩쿤과 멍젠주는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윗선인 장쩌민 쩡칭홍도 좌불안석이 된다. 삼척동자도 모두 알고 있다시피, 장쩌민과 쩡칭홍은 실제로 한몸이다. 그리고 장쩌민은 지금 겨우 목숨이 붙어 있고, 숨만 겨우 쉬고 있는 거의 반죽음에 이른 호랑이이다. 진정 배후에서 음험한 수단을 쓰고, 악독한 수단을 쓰는 것은 바로 장쩌민의 '구두군사(狗頭軍師)' 쩡칭홍이다.

 

쩡칭홍은 중공당내와 민간에서 모두 공인된 간신이다. 사람됨이 음험하고 독랄하며 권모술수를 잘 쓴다. 양면삼도(兩面三刀)를 시전하며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탐한다. '음모가' '특무두목' '경친왕(慶親王)'등의 별호가 붙어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 쩡칭홍의 부친은 특무, 매국노로 알려져 있다.

 

쩡칭홍은 중공원로 쩡산(曾山)의 아들이다. 쩡산은 원래 장시(江西) 지안(吉安) 용허진(永和鎭)의 도축꾼이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4년 중공 장시소비에트구의 내무부장이 되어 주로 특무활동에 종사했다.

 

미국국적의 중국문혁사료연구자인 쏭용이(宋永毅)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쩡산은 중국의 항일전쟁기간동안 일찌기 일본군과 암중으로 결탁하여 국가이익을 팔아먹었다. 쩡산은 상하이와 난징에서 일본군과 담판할 때, 국민당만 치고 공산당은 치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1967년, 쩡산의 특무와 매국노 신분이 폭로된다. 홍위병이 그를 비투(批鬪)할 때, 그가 항전시기에 일찌기 일본군과 결탁한 일본특무이자 매국노라고 공격한 바 있다. 쩡산은 자신이 일본인과 결탁한 매국노라는 점을 인정했다. 다만 그는 중공중앙의 지시하에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에는 그의 말을 중국공산당의 관련부서에 확인하였고, 그후에 비로소 쩡산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쩡칭홍은 부친의 훈도하에, 어려서부터 명,청의 '동창(東廠)모델'의 궁중권력투쟁에 특히 흥미를 나타냈다. 일찌기 어떻게 하면 권력투쟁에서 반대파를 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지를 공부했고, 자신이 나중에 중공의 '특무두목'이 되는데 기초를 쌓았다.

 

같은 매국노출신이면서 비슷한 성공역사를 지녔다: 쩡칭홍은 장쩌민에 의하여 '대내총관(大內總管)'으로 뽑힌다.

 

역사는 마치 연극대본과 같다. 반복하여 사람들에게 '무교불성서(無巧不成書)'를 보여준다. 매국노집안의 쩡칭홍이 굳이 같은 매국노출신인 장쩌민을 만난다. 둘에게는 비슷한 관료사회의 성공역사가 있다. 정치적으로 뜻이 맞고, 서로를 이용하고, 나쁜 짓을 함께 하였다. 하나는 무대 위에서 하나는 막후에서, 그들은 한쌍의 멋진 파트너였다.

 

쩡칭홍의 최초 성공은 그의 부친의 동향인이자 전우이며 부총리를 지낸 위츄리(余秋里)에 의지해서이다. 쩡칭홍은 1979년 당시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으로 있던 위츄리의 비서가 된다. 1982년 위츄리의 도움으로 쩡칭홍은 석유공업부 외사사 부사장이 된다. 1984년, 쩡칭홍은 다시 그의 부친의 옛부하이자 당시 상하이시위 제1서기로 있던 천궈동(陳國棟)의 발탁으로, 상하이시 조직부 부부장이 된다. 1986년, 쩡칭홍은 상하이시위 부서기에 오른다.

 

그리고 장쩌민의 부친인 장스쥔(江世俊)은 친일정부에서 일한 매국노이다. 당시 왕정위정권에서 선전부 부부장을 지낸다. 중국공산당이 권력을 탈취한 후, 장쩌민은 자신이 공산당원인 숙부 장샹칭(江上靑)의 양자라고 거짓말을 하고, 생부인 장스쥔에 대하여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매국노의 후손이 졸지에 열사의 양자로 변신하게 된다. 장쩌민을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가 제대로 된 일을 하는 능력은 지방의 하급과장만도 못하다고. 장쩌민이 상하이에서 성공하게 된 것은 그의 '양부'인 장샹칭의 두명 옛부하 전 국무원 부총리 장아이핑(張愛萍)과 전 상하이시 시장 왕다오한(汪道涵)때문이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장쩌민이 상하이시위서기로 있을 때, 그의 아래에서 같이 일을 한 파트너는 바로 쩡칭홍이다.

 

1989년 '6.4사태'는 장쩌민, 쩡칭홍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다. 당시 쩡칭홍은 장쩌민에게 <세계경제도보>를 숙청하자고 건의했고, 장쩌민은 이로 인하여 중공원로 덩샤오핑등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하여 중공총서기로 내정된다. 장쩌민이 베이징으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쩡칭홍을 베이징으로 불러 중앙판공실 부주임에 앉힌다.

 

1993년, 쩡칭홍은 중앙판공실 주임으로 승진하고, 정식으로 장쩌민의 '대내총관'이 된다.

 

쩡칭홍은 여러번 계책을 올려 장쩌민이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을 도왔다 - 양상쿤형제, 천시통, 차오스, 리루이환

 

1992년 14대전에 쩡칭홍은 장쩌민에게 '이간계'를 건의한다. 덩샤오핑과 양상쿤, 양바이빙형제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다. 장쩌민, 쩡칭홍은 한편으로 외부에 양씨형제가 군권을 탈취하려고 기도한다고 퍼트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와병중인 덩샤오핑에게 여러번 '밀고'한다. 덩샤오핑은 결국 장쩌민, 쩡칭홍의 계책에 속아 넘어가, 양씨형제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결국 양씨형제는 군권을 잃고, 장쩌민은 이로 인하여 군대내에서의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양상쿤의 죽음은 바로 쩡칭홍이 사람을 보내 독을 쓴 것이라고 한다.

 

전 베이징시위서기 천시통은 덩시 덩샤오핑에 의하여 장쩌민을 대체할 후보로 점찍혔던 인물이다. 첫째, 천시통도 '6.4'진압에 참여했기 때문에 덩샤오핑은 안심하고 그를 기용해도 '6.4'에 대한 평가를 뒤집을 가능성이 없었다. 둘째, 천시통은 당시 덩샤오핑의 남순에 동행했고, 덩샤오핑은 당시 장쩌민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누구든지 개혁하지 않으면 그는 물러나야 한다." 이런 것들로 인하여 장쩌민은 천시통을 질투했다. 소문에 따르면, 천시통이 당시 덩샤오핑에게 장쩌민의 부친이 매국노였다는 것을 얘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쩌민은 천시통에게 더욱 원한을 품게 된다.

 

쩡칭홍은 장쩌민에게 계책을 건의한다. '부정부패와 직무소홀'을 죄명으로 삼아 천시통을 진성감옥에 집어 넣는다. 2003년, 천시통은 방광암을 앓아 보석으로 풀려나 입원한다. 그때 5만자의 신소서(申訴書)를 써서 장쩌민이 그에 대하여 정치적 박해를 한 것과 장쩌민부자의 경제범죄문제를 고발했다.

 

그외에 장쩌민이 총서기로 있을 때 당시 정치국상위에 있으면서 장쩌민의 '반대파'인 전인대상무위원장 차오스와 정협주석 리루이환이 있었다. 차오스와 리루이환 두 사람은 명망이나 경력, 능력, 민심의 모든 면에서 장쩌민보다 위였다. 그래서 모두 장쩌민이 질투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장쩌민을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파룬공 문제에서 차오스와 리루이환은 장쩌민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파룬공을 지지했고, 그래서 장쩌민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1998년 하반기, 차오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일부 전인대 은퇴노간부들은 많은 군중들로부터의 서신에 근거하여, 공안부에 파룬공신자들을 불법적으로 대하는 문제를 거론한다. 그들은 파룬공에 대하여 상당한 기간동안 조사, 연구했고, '파룬공은 국가와 백성에 백리무해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연말에 장쩌민을 대표로 하는 정치국에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 장쩌민은 차오스의 파룬공문제에 있어서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취하는데 불만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리루이환이 파룬공을 지지하는 것은 장쩌민에게 더욱 골치였다. 2012년, 베이징의 고위층인사가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당시 허베이의 300명 촌민이 파룬공지지에 지장을 찍은 일을 가지고 중국의 최고위층이 토론을 벌였다. 시진핑, 리커창이 각각 주룽지의 의견을 물어본다. 주룽지는 이렇게 말한다: "4.25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잘못한 것이다. 리루이환 본인이 파룬공을 수련했다. 그는 아주 명확하게 파룬공을 지지했다."

 

그외에 중국문제전문가인 장텐량(章天亮)에 따르면, "내가 듣기로 리루이환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들이 뇌에 종양이 생겼다. 아무리 해도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파룬공을 수련하고 좋아졌다. 그래서 나중에 장쩌민이 파룬공을 박하한 후, 모든 상임위원들이 어쩔 수 없이 장쩌민의 압박으로 그에 동의를 표했는데, 오직 리루이환만은 예외였다."

 

장쩌민이 차오스, 리루이환을 물러나게 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쩡칭홍은 장쩌민에게 '나이제한'이라는 괴초식을 건의한다. 1997년 15대때, 장쩌민, 쩡칭홍은 차오스에게 "정치국상위는 70세은퇴"라는 정책을 제시한다. 장쩌민, 쩡칭홍은 차오스가 정파(正派)의 인물이고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과연 차오스는 광명정대했고 은퇴하는데 동의한다. 2002년 16대때 장쩌민, 쩡칭홍은 다시 리루이환에 대하여 '칠상팔하(七上八下)'를 내세운다. 67세까지는 정치국상위에 선임될 수 있지만, 68세가 되면 반드시 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리루이환을 은퇴시킨다.

 

2007년 17대때 이미 68세가 된 쩡칭홍은 그제서야 발견하게 된다. '칠상팔하'이 돌맹이가 그의 발등을 찍게 되었다는 것을. 권력욕이 컸던 '구두군사'도 부득이 17대때 물러나야만 했다.

 

"손에 피를 묻히고" "죄를 지은 사람만이 승진할 수 있다" 장쩌민, 쩡칭홍은 '보시라이, 저우용캉' 정변을 기획하다.

 

 쩡칭홍이 한 모든 나쁜 짓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바로 장쩌민이 파룬공을 박해하도록 기획한 것이다. 그리고 힘을 다해서 박해했고, 이를 통해서 위로 올라갈 정치적 자본을 획득한다.

 

1999년 2월, 미국의 권위있는 잡지 <US News and World Report>에는 파룬공이 건강에 좋은 점을 언급한다: "국가체육총국 국장 우샤오주(伍紹祖)는 이렇게 말했다: '파룬공과 기타 기공은 사람들로 하여금 매년 의료비를 1,000위안 절약하게 만든다. 만일 기공을 수련한 사람이 1억이면, 1천억위안을 절약할 수 있는 것이다. 주룽지는 이에 대하여 아주 기뻐했다. 국가는 그 돈을 더욱 좋은 곳에 쓸 수 있을 것이다."

 

1999년 여름, 장쩌민은 파룬공과 그 창시자가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점을 질투하여 파룬공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다. 그러나 다른 6명의 정치국상위(그때 쩡칭홍은 아직 상위가 아니었다)는 모두 반대한다. 그리고 명백하게 반대의견을 표명한다. 주룽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가장 큰 바램은 그저 건강일 뿐이다...우리는 운동의 방식으로 사상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경제건설이라는 대전제에 불리하고, 더더구나 국가으 대외개방이미지에도 불리하다."

 

장쩌민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손가락으로 주룽지를 가리키며 소리친다: "멍청하다. 멍청하다. 멍청하다. 당을 망치는구나!" 장쩌민은 벌떡 일어나면서 다시 소리쳤다. 목소리가 사나워지자. 모두 입을 다문다. 그렇게 하여 장쩌민이 혼자서 고집하여 다른 6명 상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룬공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다.

 

당연히 장쩌민이 박해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쩡칭홍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쩡칭홍은 장쩌민에게 여러 나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이번 박해를 하는데 모든 국가기관의 자원을 쏟아붓게 된다. 그리하여 이번 박해는 장쩌민 개인이한 것일 뿐아니라, 중공체제가 한 것이 되어 버렸다.

 

장쩌민에게 나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외에, 쩡칭홍은 여러번 각지로 가서 직접 파룬공박해를 지휘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파룬공에 대한 원한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장쩌민, 쩡칭홍 뤄간(羅干)등 일당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천안문분신자살사건"을 만들어내어, 그 죄를 파룬공에 뒤집어 씌운다. 이를 통해 파룬공박해를 더욱 강화하는 핑계거리로 삼는다. 여러 파룬공신자들은 불법구금, 혹형고문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다. 심지어 많은 파룬공신자들은 장기적출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쩡칭홍은 해외의 파룬공신자들에게도 손을 뻗어, 여러 껀의 폭력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04년 남아공총격사건, 2006년 아틀란타불법습격사건, 2008년 플러싱사건, 그리고 여러해동안 홍콩청년관애협회에 침투하여 홍콩의 파룬공신자를 습격한 사건등...

 

그리하여, 쩡칭홍은 장쩌민의 '집단말살죄, 혹형죄, 반인류죄' 범죄집단의 핵신인물과 4대 간장(干將)중 하나가 된다(쩡칭홍, 뤄간, 저우용캉, 리란칭).

 

당시 덩샤오핑이 6.4의 책임이 있는 장쩌민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쩌민, 쩡칭홍도 마찬가지로 손에 파룬공신자박해의 피를 묻힌 인물을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그것은 장쩌민, 쩡칭홍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심리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그 사건을 뒤집거나, 파룬공의 명예회복을 시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가 있어야 승진한다'는 것이 중국관료사회의 숨은규칙이 되어 버렸다.

 

이는 왜 1999년 장쩌민이 파룬공에 대한 박해를 개시한 후, 중국관료사회의 '역도태'가 성행하게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도덕적으로 엉망일수록 더욱 잘 줄을 서고, 파룬공박해에 열심일수록 손쉽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류징(劉京), 우관정(吳官正), 자창린(賈慶林), 저우용캉, 보시라이, 리창춘(李長春), 우즈밍(吳志明), 리동셩(李東生), 링지화, 쑤롱(蘇榮), 류윈산(劉雲山), 장더장(張德江), 장까오리(張高麗), 한정(韓正), 쑨춘란(孫春蘭), 장웨(張越), 저우번슌(周本順) 등등등 모두가 파룬공박해를 통해 박탁된 인물들이다.

 

그중 파룬공박해의 수단이 가장 악독하고, 가장 잔인하며, 가장 일찌기 장기적출을 진행하여 피빚이 가장 많은 보시라이는 자연스럽게 장쩌민, 쩡칭홍이 가장 신임하는 중공당수의 후보자였다.

 

시진핑의 발탁은 장쩌민, 쩡칭홍의 미봉책이었음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장쩌민, 쩡칭홍은 보시라이로 하여금 2012년이전에 단련을 받아 명망과 권세를 얻게 하고, 2012년 제18댜에서 최소한 상위와 중앙정법위서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시 개략 2년이 지난 2014년경에, 보시라이가 장악한 정법위, 무경부대, 및 전국의 여러 군대인맥, 군대내의 역량등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켜, 시진핑을 끌어내리고, 보시라이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하려 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다시 장쩌민, 쩡칭홍의 천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보시라이를 도와 이 정변을 집행할 핵심인물은 당시 중공정법위서기 저우용캉이다. 그러나, 사람의 계산은 하늘의 계산을 따르지 못한다. 보시라이의 부하인 왕리쥔이 미국영사관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보시라이, 저우용캉정변이 들통나고, 결국 중도에 계획은 좌절된다.

 

"강경'이 안되면 '유연'하게. 시진핑을 죽일 수 없으면, 시진핑을 묶어놓는다.

 

'후진타오, 원자바오'의 10년동안 '정령불출중남해(政令不出中南海)'의 비참한 처지를 직접 목격한 시진핑은 자연히 자신도 그렇게 허수아비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취임하자마자 장쩌민파의 인물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왕치산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진핑의 복이다. 왕리쥔의 망명시도는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였다. 몇년동안 시진핑, 왕치산의 '타호'는 순조로웠다. 장찌민파의 거물들을 여럿 집어넣는다. 이제 '호랑이를 때려잡는 몽둥이'는 직접 장쩌민, 쩡칭홍을 향하게 되었다.

 

2015년 2월 25일, 중기위의 웹사이트에 <대청나관경친왕의 작풍문제(大淸裸官慶親王的作風問題)>라는 글이 올라와 쩡칭홍을 겨냥했다.

 

같은 해 5월 1일, 시진핑당국은 '유안필립(有案必立), 유소필리(有訴必理)"(사건이 있으면 반드시 입건하고, 소송이 있으면 반드시 심리한다)를 실행한다고 선언한다. 짧은 몇달안에 20여명의 파룬공신자와 그 가족이 실명으로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에 장쩌민을 고발한다. 장쩌민을 고소한 것을 기화로 장쩌민을 체포할 수 있었다. 시진핑에게는 천시, 지리, 인화가 모두 갖추어진 셈이다.

 

같은 해 6월 11일, 시진핑당국은 저우용캉이 이미 무기징역형을 받았으며, 저우용캉은 법정에서 죄를 인정하고 참회했다고 발표한다. 관영매체는 즉시 평론을 싣고, 다시 한번 "아무도 철모자왕이 될 수는 없다"고 얘기하며, 반부패의 '공성전, 지구전'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6월 12일, 대륙매체는 전기 <경친왕>을 출판한다. 표지에는 "너 일지(你董的)"라고 적었다. 외부에서는 시진핑, 왕치산이 곧 쩡칭홍에게 손을 쓸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당연히 장쩌민, 쩡칭홍은 극렬하게 반항했다. 죽기살기로 싸웠다. 그 과정에서 기회를 잡기만 하면 반격했다. 시진핑, 왕치산은 장쩌민, 쩡칭홍을 포위공격하는 과정에서 여러번 '암살'위협을 받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쩡칭홍이 기획한 것이라고 한다.

 

장쩌민, 쩡칭홍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되면서 부득이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강경책'보다는 '유화책'을 쓰기로 한 것이다. 2017년 19대전에 시진핑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장쩌민, 쩡칭홍은 시진핑의 '핵심'지위를 인정하고, '시진핑사상'을 당장에 넣는 덧도 동의하며, '국가주석임기제한을 폐지하는 것'도 동의하겠으며, 시진핑의 '일존(一尊)'지위도 동의한다. 이렇게 하여 시진핑에게 장쩌민, 쩡칭홍을 체포하지 않고, 장쩌민, 쩡칭홍과 함께 '보당(保黨)'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 한다.

 

장쩌민, 쩡칭홍을 체포하고, 공산당을 해체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었다. 시진핑을 운이 좋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래서 최초임기 5년간은 무슨 일을 해도 모두 순조로웠다. 아쉽고 슬프게도 권력욕에 눈이 먼 시진핑은 돌연 장쩌민, 쩡칭홍을 믿고, 장쩌민, 쩡칭홍의 사악함을 경시하며, 형세를 오판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장쩌민, 쩡칭홍과의 거래에 도으이한다.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않으면 반드시 그 해악을 입게 되며, 시기가 도래했는데도 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재앙을 입게 된다. 시진핑은 장쩌민, 쩡칭홍을 체포한 얻기 힘든 최적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러자 화난이 닥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구두군사'는 다시 '이간계'를 쓴다. 장쩌민, 쩡칭홍이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시진핑의 수족 즉 왕치산을 잘라낸 것이다. 왕치산은 19대이후 권세를 잃고, 화병신세가 된다. 그리고 시진핑에게 칼을 하나 꽂아 놓는다. 그것은 바로 왕후닝이다. 왕후닝을 시진핑을 혼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시진핑에게 여러 개의 '암기'도 심어둔다. 한정, 쑨춘란, 쑨리쥔등이 미중무역전에서 국면을 교란시키고, 홍콩문제에서 계속 동란을 격화시켜 시진핑에게 골치거리를 안긴다. 파룬공박해문제에서도 계속 시진핑을 얽어넣는다. 우한폐렴사태에서도 시진핑을 함정에 빠뜨려 시진핑이 국제적 죄인이 되게 만든다. 시진핑은 마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중공과 장쩌민, 쩡칭홍의 협공하에 한걸음 한걸음 심연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홍콩문제만 예로 들어보면, 2002년말 16대에 쩡칭홍이 정치국 상위로 들어갈 때, 그는 중공중앙 홍콩마카오공작협조소소 조장을 겸임하여, 홍콩마카오업무를 담당했다. 그때부터, 홍콩은 이 '특무두목'의 수중에 들어간다. 중앙홍콩마카오소조, 국무원홍콩마카오판공실, 중련판의 라인에 기본적으로 쩡칭홍이 배양한 특무들이 배치된다. 장더장, 한정, 그리고 몇대의 홍콩정부요직은 거의 모두 장쩌민, 쩡칭홍이 심어놓은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홍콩인들이 '낭요(狼妖)'라고 여기는 렁춘잉(梁振英)은 쩡칭홍의 심복부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홍콩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캐리람도 쩡칭홍의 사람이다. 2019년 '반송중운동'때 쩡칭홍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폭력을 사용한다. 고무탄을 눈에 쏘기도 하고, 실탄을 가슴에 쏘기도 하며, 윤간하고, 투신자살시키고, 바다에 시신으로 떠오르게 하고, '831시속열차(屍速列車)'까지...고의로 갈등을 격화시켜 시진핑으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여 홍콩에서 6.4가 재연되도록 만들려 했다. 이 음모가 성공했으면 시진핑은 국제적인 제재를 받게 되었을 것이고, 국내외로부터 욕을 얻어먹으면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그외에 쩡칭홍은 국가안전부등 실권부서를 장악하였으므로, 최근 들어, 여러 건의 세계를 놀라게할 폭력테러사건을 기획한다. 시진핑을 하야시키기 위하여, 쩡칭홍이 기획한 폭력테러사건은 최소한 2013년 천안문폭발사건, 2013년 산시성위연속폭발사건, 2014년 쿤밍기차역살인사건, 2014년 신강 우루무치폭력테러사건, 2015년 텐진대폭발사건등등이 있다.

 

이런 엄청난 죄악도 쩡칭홍의 죄악중 만분의 1도 말하지 못한 것이다.

 

장쩌민 쩡칭홍은 왜 버티며 죽지 않는가?

 

시진핑은 권력욕과 보당심리로 장쩌민, 쩡칭홍과 타협했다. 그리고 왕후닝의 기만에 속아 마르크스 사탄에 맹세했다. 그리하여 장쩌민, 쩡칭홍과 중공은 지금까지도 죽지 않은 것이다. 이는 시진핑이 스스로를 절벽끝에 몰아넣은 원인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장쩌민, 쩡칭홍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시핵심'을 지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진핑은 모르고 있단 말인가. 파룬공박해의 혈채가 없으면, 그는 장쩌민, 쩡칭홍이 지지하는 인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시진핑은 발견하지 못했단 말인가? 지금까지도 파룬공문제는 여전히 중공시국의 핵심문제인 것을 그리고 소위 '내부투쟁' '정변' '국면교란'은 그저 겉모습일 뿐이라는 것을.

 

시진핑은 잘못 인식하고 있다. 보당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그러나, 시진핑은 모르고 있단 말인가. 중공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욕하고 버리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시진핑은 알지 못한단 말인가. 중공이야말로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바이러스라는 것을. 국제사회는 우한폐렴을 중공바이러스라고 부른다. 그것이야말로 중공에 대한 최종평가가 아닐까. 시진핑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중공의 멸망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도 흩어지는 법이다. 이미 시간문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