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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진시황릉의 허실

누가 병마용(兵馬俑)의 최초발견자인가?

by 중은우시 2019. 11. 4.

글: 악남(岳南)


1. 연기(緣起)


1974년 초봄, 섬서성 임동(臨潼) 여산(驪山) 자락에 있는 서양촌(西楊村)은 가뭄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석양의 햇살이 마을 남쪽의 감나무밭을 감싸고 있었다. 오후내내 바쁘게 돌아다니던 서양촌 생산대의 대장 양배언(楊培彦)과 부대장 양문학(楊文學)은 감나무밭의 한 귀퉁이에 있는 서이반(西崖畔)에 서 있었다. 양배언은 무거운 괭이를 들어 땅바닥에 불규칙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원쉐, 바로 여기다!"


이때 두 사람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불규칙한 동그라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음 날 새벽, 서양촌의 양전의(楊全義)를 우두머리로 하여, 양신만(楊新滿), 양지발(楊志發)등 6명의 청장년이 큰 괭이를 휘두르며 양배언이 그려놓은 동그라미 안쪽을 파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큰 구경의 우물을 팔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당장의 급선무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1주일도 되지 않아, 입구의 직경이 4미터인 큰 우물이 지하 근 4미터까지 파들어갔다. 이때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그들 수중이 괭이가 그 나중에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병마용에 거의 가까워졌다는 것을.


역사는 이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1974년 3월 29일.


양지발이 괭이를 내려쳤다가 다시 들어올리려는 순간, 진시황릉 병마용의 군진이 첫번째 도편(陶片)이 출토된 것이다. 기적의 첫번째 서광이 암흑을 뚫고 병마용을 드러나게 했다 .이어서 하나하나의 머리, 하나하나의 잘린 다리가 계속 나타난다. 이때는 그저 사람들이 이것은 고대의 기와장이들이 버린 물건이라고 여겼고, 아무도 중시하지 않았다. 무거운 괭이를 들고 여전히 탕탕 내려치고 있었다.


2. 삽곡(揷曲)


역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임동현 안채공사(晏寨公社)의 수관원(水管員) 방수민(房樹民)


방수민은 서양촌에서 우물을 파면서 이미 지하 5미터 깊이로 들어갔는데, 여전히 물한방울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도대체 왜 그런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먼저 사방을 한바퀴 돌아본다. 도편을 들어서 한참을 살펴본 후에, 우물 바닥으로 내려간다. 우물의 벽은 거칠고 매끄럽지 않았으며, 도편과 부서진 벽돌이 진흙 속에 박혀 있었다. 그저 아주 작은 부위만 노출되어 있었다. 방수민은 손으로 반조각의 벽돌을 파내고, 양전의에게로 다가간다: "이 우물은 더 파내려가면 안됩니다!"


"왜?" 양전의는 깜짝 놀란다.


"보세요. 이 벽돌은 진시황릉의 능원내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원래 임동현 문화관은 이전에 진시황릉에서 적지 않은 진나라 벽돌을 수집했고, 방수민은 현문화관의 문화재간부인 정요조(丁耀祖)와 친한 친구사이여서, 평소에 문화관에서 정요조를 찾아가곤 했다. 시간이 길어지니 그는 딩야오주에게서 약간의 문화재 지식을 배웠다.


방수민은 우물을 기어 올라온 후에, 생산대 대장 양배언을 찾는다. "제가 보기로 이곳은 고대의 유적지입니다. 먼저 사원들에게 하루 쉬도록 하시죠. 제가 현에 전화를 걸어 사람이 와서 보라고 하겠습니다."


금방, 임동현 문화관의 정요조, 왕진성(王進成), 조강민(趙康民)등의 일행이 우물가에 도착한다. 몇 개의 비교저 완전한 머리없는 도용(陶俑)이 우물 아래에 눕혀져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이건 아마도 아주 가치있는 국보일 것이다. 우물은 더 파지 말라. 급히 이것들을 모아서, 현문화관에 잘 소장하자." 관장인 왕진성은 양배언에게 이렇게 당부하고는 임동으로 바로 되돌아간다.


다음날 조강민은 다시 서양촌으로 온다. 사원들을 조직하여 흩어져 있던 도용, 도편을 수거한다. 가능한 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하여, 조강민은 다시 사원들을 데리고 빌려온 쇠로 된 체를 가지고 문화재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물의 흙을 모조리 걸렀다. 많은 잔전(殘磚), 도편이 나왔는데, 거기에는 도용의 새끼손가락, 귀와 같은 조각들도 걸러져 나왔다.


조강민의 지도하에, 사원들은 도자기조각들을 3대의 수레에 싣고 수킬로미터 떨어진 현문화관으로 옮긴다. 조강민은 그 자리에서 30위안을 상금으로 준다. 농민들은 이렇게 많은 돈을 보자 말했다: "생각지도 못했다. 이들 기왓장들이 사람보다 비싼 것일줄은..." 그들은 기뻐하며 자리를 떴다. 조강민은 사원들이 보내온 문화재를 우선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가서 고찰하고 발굴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5월초 다시 우물을 파던 곳으로 사원들을 불러모아 20여일동안 발굴을 한다. 여름수확기가 되어서야 멈추었다. 이번 발굴에서, 우물의 주위를 남북으로 15미터, 동서 8미터의 갱(坑)을 발굴한다. 더 많은 도용이 발견되었다. 그후 조강민은 매일 현문화관 문화재수복실(修復室)에 앉아서 이들 머리없고 팔다리가 없는 도용과 조각들을 깨끗이 씻고, 세심하게 끼워맞추고 붙이고, 수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비교적 완전한 무사용이 수복되었다.


조강민이 조용한 문화재수복실에서 일하면서 도용을 열심히 수복시킬 때, 이해 5월말, 한 불청객이 우연히 '끼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이 지하대군은 절차봉생으로 인류의 품을 향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는 바로 신화사 기자 인안온(藺安穩)이다.


3. 전절(轉折)


인안온은 임동현 북전향 서위양촌 사람이다. 1960년 서북정법학원 신문학과에 입학하여, 1964년 졸업후 북경신화사본사로 발령나서 근무하게 된다. 그는 임동에 돌아와서, 임동현문화관에서 일하는 처와 가족을 만난다. 바로 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 왔다가 처에게서 문화관에 농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발견한 도용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루는 그가 문화재진열실 뒷면의 어두운 방을 호기심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몇 개의 크고 건장한 도용이 갑옷을 입고, 손에 병기를 들고 있었는데, 위풍당당했고, 기세에 압도당했다. 인안온은 몸과 마음이 모두 강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단언한다: "이것은 2000년전 진나라때의 병사 모습이다. 국가의 희세진보이다."


그후, 인안온은 여러번 조강민을 찾아가서 발굴과정을 듣는다. 그리고 도용에 대한 견해를 교류한다. 그리고 다시 서양촌의 우물터로 가서 현지답사도 하며, 우물을 파던 마을간부, 사원들과 얘기를 나눈다. 일련의 좌담과 조사를 통해서 그는 현지 농민들이 가거에 우물을 파거나 토지를 고를 때 도용이 여러번 드러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6월 24일 인안온은 흥분과 격동 그리고 불안한 심정을 가지고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돌아간다. 금방 <진시황릉에서 진나라때 무사의 도용이 발견되다>라는 글을 쓴다.


6월 27일 이 글은 인민일보 내참(內參) <정황회편> 제2396기에 실린다. 의외로 이 진용발견상황에 대한 첫번째 보도가 나간 후, 즉시 강청(江靑)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바로 '비림비공(批林批孔, 임표와 공자를 비판하다)', '비유평법(批儒評法, 유가를 비판하고 법가를 재평가하다)'의 정치운동중이었다. 진시황은 '사인방'이 법가인물의 대표로 떠받들던 인물이다. 혁명파이고 진짜호랑이이다. '내부참고'를 강청이 보고서, 그녀는 기뻐하는 동시에, '내참'에서 쓴 내용인 "임동현의 일부 간부동지는 본위주의의 고려에서 다른 사람들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아, 계속 비밀을 지켜왔고,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글을 보고 크게 화를 낸다. 그는 즉시 당중앙에서 선전업무를 책임지던 요문원(姚文元)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요문원에게 관련분야의 책임자로 하여금 임동션의 일부 간부에 대해 조사한 후 국무원에 보고하도록 지시킨다. 요문원은 강청의 지시를 받은 후 즉시 움직인다. 국무원에서 이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부총리 이선념(李先念)에게 강청의 입장을 전달한다. 이선념은 이 사건에 강청이 관심을 가진 것을 알게 되었으니 감히 허투루 처리할 수가 없었다. 린안원이 쓴 내참을 긴급히 문화재업무를 담당하던 국무원 부비서장 오경동(吳慶彤)과 국가문물국국장 왕야추(王冶秋)에게 하달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경동동지 및 야추동지:


강청동시는 이 일에 관심이 아주 많다. 문물국과 섬서성위가 상의하여 신속시 조치를 취하고, 적절하게 이 중요한 문화재를 보호하라.


선념

1974년 6월 30일


'내부참고'와 '비시(批示)'가 연이어 나오면서, 각 방면에서는 신속히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국무원과 국가문물국의 비준을 받아, 섬서성위는 진시황릉진용갱발굴영도소조를 조직한다. 동시에 섬서성위는 성박물관, 성문화재관리회, 임동현문화관의 3곳에서 전문가를 선발하여, 진시황릉진용갱고고발굴대를 만든고, 유적지에 대한 발굴을 진행한다. 초기에는 대원이 5명이었고, 각각 항덕주(杭德洲), 원중일(袁仲一), 굴홍균(屈鴻鈞), 최한림(崔漢林), 조강민(趙康民)이었다.


7월 15일 오후, 항덕주, 원중일등 고고대원은 몇 개의 행군침상, 모기장등 생활 및 발굴도구를 가지고, 서안을 떠난다. 천막으로 가린 자동차를 타고 서양촌에 도착한다. 생산대장 양배언의 안배로, 생산대 양식창고앞의 큰 나무 아래에 천막을 치고, 20세기 가장 장관인 고고발굴이 시작된다.


4. 여파(餘波)


진시황병마용이 세상에 나오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후, 누가 '병마용의 최초발견자'인지를 놓고 논쟁이 붙는다. 서양촌 농민 양지발은 가장 먼저 '최초발견자'로 정해진다. 진용박물관 문물상점의 요청을 받아, 관광객들의 화책서적에 서명을 해주며, 양지발 본인은 판매된 화책서적가격의 일부를 수고비로 받는다. 미국대통령 클린턴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양지발과 악수하며 얘기를 나눈 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양지발이 클린턴 대통령을 위하여 서명할 때, 그냥 동그라미만 하나 그려준다. 그러자 이 세계최강대국의 대통령인 클린턴도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다른 사라들에게 서명해줄 때는 이름을 다 써준다. 그런데 양지발은 나에게 동그라미만 하나 그려주고는 쫓아보낸다. 대단하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임동현 문화관의 조강민은 돌연 매체에 선언한다. 그야말로 '병마용의 최초발견자'라고. 그뿐아니라, 조강민은 동시에 자신이 '최초의 감정, 명명, 수복, 발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진용박물관 상점으로 가서 책에 서명해서 팔기 시작한다. 이 일은 각계의 주목을 끌었다. 어떤 사람은 양지발과 조강민은 모두 '최초'가 아니라고 말한다. 당시 수관원 방수민이야말로 진정한 최초발견자라고 한다. 만일 방수민이 적시에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이 병마용은 일찌감치 괭이질 아래에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화사기자 린안원이야말러 '최초발견자'라고 한다. 만일 인안온이 '내참'을 쓰지 않았더라면, 고위층의 관심도 끌지 못했을 것이고, 고고발굴도 진행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방면에서의 논쟁이 끊이지 않을 때, 서양촌 생산대 대장이었던 양배언은 크게 화가 난다. 신속히 우물파는 사원들을 모아서, 진용박물관의 원중일등 간부들을 찾아가서, 강력하게 자신과 다른 몇명의 우물파던 사원들에게 '병마용발견자'라는 증명서를 써달라고 요구한다. 양배언은 동시에 박물관의 한 상점에서 책에 서명하며 팔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니 전체 진용박물관에는 4,5명의 '발견자'와 '최초발견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각각의 상점에서 서명하고 책을 팔았다. 상점은 도급적인 성격이 있어서, 박물관도 관여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들 '발견자' 혹은 '최초발견자'를 누가 인정해야 법적인 효력이 있는지도 애매했다. 박물관의 간부들도 이것을 잘 알지 못했다. 더더구나 어느 부서도 이 흙탕물에 발을 담그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상을 모르는 관광객들은 서명된 화책을 산 후에, 뭔가 맞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박물관의 간부를 찾아가서 따졌다. '도대체 누가 최초발견자인가? 어떻게 하여 4,5명이 나타나서 모두 자신이 최초발견자라고 하는가? 왜 벌건 대낮에 이런 거짓이 횡행하는가'등등. 박물관의 관장인 원중일등은 이 점이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들은 어느 부서에서 혹은 사회각계인사들이 혹은 시나닷컴과 같은 포탈사이트에서 누가 진정한 최초발견자인지 정해주기를 바랐다. 만일 최초발견자가 확정되어 각 분야의 인사들이나 당시 우물을 파던 농민들의 인정을 받게 되면, 모든 문제는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관광객들도 서명된 화책을 사고는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누가 어느 부서에서 나서서 정한단 말인가? 이것이 다시 머리아픈 문제가 되고 만다. 더욱 골치아픈 점은 중국에서 출판된 비교적 권위있는 사전인 <사해(辭海)>에서는 '발견'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래 있던 사물 혹은 규율을 탐색, 연구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을 '발견'이라고 한다. 확실히 당시 우물을 판 농민들은 연구를 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규율'적인 것은 알지도 못한다. 만일 <사해>의 해석과 정의를 기준으로 한다면 우물을 판 농민은 당연히 발견자가 아니다. 만일 <사해>의 해것이 잘못되었다면 우물을 판 농민이 비로소 '발견자'가 된다. 다만 도대체 누가 최초 발견자인가? 이것은 또 어느 각도에서 판단해야 하고, 누가 결정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