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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서예

상(商)나라때 붓으로 글씨를 썼을까?

by 중은우시 2019. 9. 24.

글: 강보군(姜寶君)



금년은 갑골문(甲骨文) 발굴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전에 필자는 '건강쾌차'친자탐방단을 따라 안양의 은허박물관(殷墟博物館)으로 가서 현장에서 3천여년전의 중화문명의 신비와 매력을 느끼고 왔다.


은허박물관에 갑골문의 요소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박물관의 입구에는 석각의 갑골문 "복(福)"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형태로 보면 '복'자의 원시적인 의미는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술잔을 들고, 선조에게 제사를 지낸다. 초기의 문명에서 주기(酒器)는 중요한 예기(禮器)였다. 은허에서 출토된 청동기중 반이상은 주기이다.


시간을 120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1899년의 어느 날, 경성의 금석학자인 왕의영(王懿榮)은 학질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약방에 가서 '용골(龍骨'이라고 부르는 약재를 구매한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용골'의 위에 전문(篆文)과 비슷한 부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여러해동안 금석고물을 감정한 감각으로 그는 이것이 상고시대의 문자일 수도 있겠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약방에서 글자가 새겨진 흔적이 있는 '용골'을 모조리 구매해서 가져온다. 깊이있고 세심한 연구를 거쳐 왕의영은 "우(雨)", "일(日)", "산(山)", "수(水)"등의 글자를 찾아냈다. 그 후에 다시 몇몇 상나라때의 군왕의 이름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그는 단정했다. 이들 새겨진 흔적은 귀갑(龜甲)과 수골(獸骨)에 새겨진 고대문자라고.


왕의영이 사망한 여러해 이후에 비로소 나진옥(羅振玉, 나중의 '갑골사당(甲骨四堂)'중 한 명)이 이들 갑골은 하남 안양 원하(洹河)의 가에 있는 소둔촌(小屯村)에서 출토되었다고 확정한다. 이후, '일편갑골경천하(一片甲骨驚天下)' 소둔촌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된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더 많은 갑골을 파낼 뿐아니라, 이를 통해 장관을 이루는 갑골문연구가 형성된다. 또한 상나라때의 도성유적지를 발굴해낸다: 바로 은허이다. 현재도 은허의 고고발굴작업은 여전히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은허박물관의 갑골문전시구역에서 아주 특별한 문물이 하나 있다. 주서옥과(朱書玉戈). 백색의 병과형 옥기에 보일듯 말듯 담홍색의 문자가 보인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들 문자와 갑골문은 거의 같은 종류의 문자라고 보인다. 전문가의 해석에 따르면, 옥과상의 이 몇 글자는 이런 뜻이라고 한다: 누군가 조(兆)의 땅에서 사람을 하나 잡았다. 나아가 윗사람에게 포로를 바치거나 혹은 기물을 바쳤다.


해설원은 이렇게 소개한다. 이 문물이 설명하는 것은 상나라때 문자가 이미 아주 성숙되어 있다는 것이다. 갑골문은 상나라때 문자의 전부가 아니다. 당시의 사회생활에서 사람들은 다른 경우에 사용하던 문자가 갑골문보다 훨씬 풍부했다. 그 외에, 옥과의 글자는 홍색이다. 이는 당시에 주사(朱砂)에 찍어서 썼다는 것을 말해준다. 먼저 글자를 쓰고 다시 새긴 것이다. 글자를 쓴 것은 아마도 붓일 것이다.


3천여년전에 벌써 붓이 있었다니. 이는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끄는 이슈이다. 그렇다면 상나라때 정말 붓이 있었을까?


필자는 고궁박물원의 부연구원이며 서예가인 양빈(楊頻)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가장 오래된 출토물인 붓의 실물은 전국시대의 것이다. 다만 붓의 사용은 분명히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1954년, 장사시(長沙市) 좌가공산(左家公山)에서 발굴된 전국시대 초묘(楚墓)에서 붓의 실물이 출토되었다. 고고학자들이 처음에는 죽관(竹管)을 하나 발굴했는데, 나중에 정리하면서 비로소 발견했다. 죽관의 안에는 아주 완벽하게 보존된 붓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붓의 대는 대나무로 만들었고, 털은 상등의 토끼털이다. 붓대의 한쪽 끝은 몇 개의 줄을 내놓았다.


"비록 상나라때 붓을 사용한 실물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상나라때 혹은 그 이전의 문명단계에서 확실히 이미 붓을 사용했었다. 단지 당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용하는 범위가 비교적 좁았다. 주로 통치계층에 집중되어 있다. 게다가 연대가 오래되어 보존이 힘들었다. 그래서 실물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현재의 고고재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초기문명의 대표인 채도(彩陶)의 위에는 도안이 있는데, 붓을 사용한 흔적이다. 그것이 보여주는 도안과 선은 나뭇가지등 단단한 물체로 그려낸 도면이나 선과는 구별이 된다.


양빈은 보충해서 말한다. "책(冊)", "전(典)"등의 글자는 갑골문의 상형문자이다. 즉 간독(簡牘)의 형상이다. "이는 설명한다. 상나라때의 정령, 율법조문 및 귀족간의 계약등은 모두 아마 간독에 썼을 것이다. 갑골문은 주로 점복에 쓰였다. 당시 간독을 쓰는 것은 아마도 갑골문을 새기는 것보다 훨씬 빈번했을 것이다." 이는 주서옥과가 보여주는 정보와 부합한다.


양빈은 이렇게 소개한다.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에서, 소수의 주사로 쓰거나 아직 새겨지지 않은 문자가 있다. 이는 설명한다. 일부 갑골문은 붓으로 먼저 쓰고 다시 청동칼 혹은 옥석칼로 새긴 것이다. (각도(刻刀)는 안양에서 출토된 실물이 있다). "당연히, 붓으로 먼저 쓰고 다시 새긴 것은 단지 일부 상황이다. 그러나, 많은 갑골은 모두 직접 새긴 것이다. 정인(貞人)은 연습을 통하여 글자의 구조가 익숙해지면 일반적으로 먼저 쓸 필요가 없다." 


갑골문에 관하여 '선서후각(先書後刻)'인지 '불서이각(不書而刻)'인지 1920,30년대에도 논쟁이 있었다.


갑골문연구의 전문가인 동작빈(董作賓, 1895-1963)은 갑골문이 '선서후각'견해의 대표인물이다. 그는 일찌기 <은허문자을편(殷墟文字乙編)>의 서언에서 하나의 갑골을 예로 들어서 그의 견해를 펼친다: 이 갑골의 정면의 좌상각의 문자는 새긴 것이다. 획은 가늘고 힘이 있다. 뒷면의 우상각의 문자는 거치지 않고 새긴 것이다. 획이 두텁고 부드럽다. 뒷면의 4단 문자는 쓰기는 마쳤지만 새기지 않았다. 그중에는 '정호(貞乎)'라는 두 글자가 있는데, 자체가 아주 두껍다. 이것은 모두 선서후각의 실례이다.


또 다른 갑골문연구의 전문가인 장병권(張秉權) 선생도 갑골 하나를 연구해서 발견했다. 이 갑골 위의 어떤 글자의 옆에는 이 글자를 쓸 때의 흔적을 볼 수가 있따. 즉 이 글자를 새길 때 완전히 쓰여있는 굵기대로 새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서이각"의 견해를 견지하는 대표인물은 저명한 문학가인 진몽가(陳夢家, 1911-1966)이다. 그는 각사(刻辭)중의 파리머리만큼 작은 글자가 있다. 이것은 선서후각이 쉽지 않다. 호후선(胡厚宣, 1911-1995)의 견해는 두 파의 견해를 종합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작은 글자는 불서이각이고 큰 글자는 선서후각이다." 그가 보기에, 복사중의 큰 글자는 여러번 파야만 완성할 수 있다. 그래서 반드시 먼저 쓰고 뒤에 새긴다. 그중의 작은 글자는 왕왕 칼을 한번 휘두르면 바로 글자가 된다.


갑골문의 선서후각의 견해와 실물은 상나라때 붓을 사용하였다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더 많은 실물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