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야도(野渡)
제1대
양업(楊業)의 본명은 양중귀(楊重貴)이고, 그의 부친 양신(楊信)은 인주(麟州)이 토호(土豪)였다. 오대의 혼란을 틈타 인주를 검거하고 스스로 인주자사(麟州刺史)를 칭한다. 그후 시국의 변화에 따라 차례로 북한(北漢), 후주(後周)에 귀순한다.
젊고 용맹했던 양중귀는 유계업(劉繼業, 북한의 황실은 유씨이다)으로 개명한다. 유계업은 전공이 탁월하고, 전투에서 무적이어서, 당시 나라사람들은 그를 '무적'이라고 불렀다. <구국지>는 이렇게 유계업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중의 이 역사에 대한 기록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지 않고 있다. <요사>에는 요나라장수 야율사진이 유계업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너는 우리나라와 삼십여년간 싸웠는데, 오늘 무슨 면목으로 서로 보는가. 이를 보면, 유계업은 북한시기 주오 적수는 요나라였다. 비록 북한이 공식적으로는 요나라에 칭신하여 신하로 칭했지만, 강세의 요나라는 자주 북한의 변방을 침범했고, 유계업은 북한의 변방을 수비했고, 자주 쳐들어오는 요나라군대와 싸웠다. 비록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30여년간 열세로 밀리지는 않았다. 이런 경력은 유계업으로 하여금 변방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주었다.
북한이 멸망한 후, 유계업은 북송에 귀순한다. 송태종은 유계업의 위명을 일찌감치 들어서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좌영군대장군, 정주방어사로 임명한다. 양계업은 귀순한 후, 원래의 성인 양(楊)으로 되돌리고, 이름은 외자인 업(業)으로 바꾼다. 송태종은 양업이 요나라와 싸운 풍부한 경험을 높이 사서, 그를 대주(代州)로 파견하여 병마를 지휘하게 하고, 반미(潘美)의 절제를 받게 한다.
요나라의 대군이 안문관(雁門關)으로 대거 진공하자, 양업은 샛길로 수백의 기병을 이끌고 나가 요나라군대의 배후로 우회한다. 반미의 부대와 앞뒤에서 요군을 협공하여, 요나라의 절도사부마시중 소돌리(蕭咄李)를 죽이고, 마보군지휘사 이중회(李重誨)를 생포한다. 그리고 많은 병사, 갑옷과 전마를 획득한다. 양업은 전공으로 운주관찰사로 승진한다. 그후 요나라는 양업의 깃발만 보면, 싸우지도 않고 물러갔다. 변방을 수비하는 장수는 양업의 위명을 겁내어 여러번 송태종에게 상소를 올려 양업을 비난한다. 송태종은 그 상소문을 양업에게 건네주며 양압에 대한 신임을 드러낸다.
옹희3년, 송태종은 삼로의 대군으로 요나라를 정벌하러 떠난다. 그중 반미는 서로군의 총사령관이고, 양업이 부총사령관이다. 처음에 각로의 진격은 순조로웠는데, 나중에 요나라 10만대군의 반격을 받는다. 양업은 요군과 오랫동안 싸워와서 변방의 지세를 잘 알았다. 적과 결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다만 호군 왕신(王侁)과 유문유(劉文裕)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요나라군대와 정면대결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양업이 적에게 겁을 먹었다고 비웃는다. 결국 양업이 그들과 논쟁을 벌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위험을 안고 출격하게 된다. 그후 왕신등은 다시 약속대로 양업을 위해 매복을 하지 않는다. 양업은 하루종일 힘껏 싸우다가, 지원오는 인마가 없는 것을 보고는 크게 분개하여, 다시 부하를 이끌고 힘껏싸운다. 양업은 몸에 수십곳의 상처를 입고, 좌우의 부하들이 모두 죽었다. 그래도 적군 수십명을 죽인다. 양업은 힘을 다하고, 전마도 부상을 입어, 결국 요군에 생포된다. 양업의 아들 양연옥(楊延玉), 그리고 부장 왕귀(王貴), 하회포(賀懷浦)는 모두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다. 양업은 포로로 잡힌 후에도 굴복하지 않고, 3일간 단식후에 사망한다.
제2대
양업은 양가장의 제1대이다. 명성이 가장 높았고, 희생이 가장 장열했다. 양가장 제2대의 대표인물은 양업의 아들인 양연소(楊延昭)이다. 양연소의 본명은 양연랑(楊延郞)이다. 피휘를 위해 이름을 양연소로 개명한다.
어린 양연소는 말이 적었다. 그러나 항상 행군작전의 놀이를 좋아했다. 양업은 그것을 본 후에 이렇게 말한다. "이 아이는 나를 닯았다." 그후 출정할 때면 반드시 양연소를 데려갔다. 양연소는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훈도받았다. 성년이 된 후에 그는 직업군인이 된다. 옹희3년 북벌때 양연소는 부친, 형과 같이 출정한다. 삭주(朔州)를 공격할 때, 양연소는 선봉이 되어 진격했다. 그러다가 화살에 팔이 관통당한다. 그래도 그는 더욱 용맹하게 싸웠다.
양업이 죽은 후, 양연소는 공봉관에서 숭의부사로 승진한다. 나중에 보주연변도순검사를 맡는다. 하북의 변방전선을 책임지는 자리이다. 북송 함평2년, 요나라가 남하하여 공격한다. 양연소는 마침 수성(遂城)에 있었고, 양연소는 기발한 계책으로 수성을 지켜낸다. 여기에서 그는 군사재능을 발휘한다. 이 공으로 그는 막주자사(莫州刺史)가 된다.
그후 양연소는 수시로 요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 그와 당시 또 다른 변방의 맹장인 양사(楊嗣)는 이양(二楊)으로 나란히 불린다. 양연소등은 탁월한 전적으로 조정의 일부인들에게 질시를 받는다. 송진종은 재상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양사와 양연소는 나란히 바깥에 나가서 충성과 용맹으로 보답했다. 조정에는 그들을 질투하는 자들이 많은데, 짐이 지금까지 극력 비호해 왔다."
함평5년, 요나라가 보주를 공격한다. 양연소와 양사는 부대를 이끌고 지원나간다. 아직 진을 갖추기도 전에 요군의 기습을 받는다. 부대의 손실이 아주 컸다. 송진종은 두 사람이 평소에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들어 죄를 사면해 준다. 양연소는 여전히 막주단련사를 맡는다. 함평6년, 양연소는 다시 연변도순검에 임명되고 다시 영변군부서로 옮겨간다.
경덕원년, 송진종은 양연소의 병마를 만명이상으로 늘여준다. 요군이 공격해오면 정융군(靜戎軍)의 동쪽에 주둔하여 그가 알아서 조치하도록 한다. 도부수 왕초(王超)의 지휘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이다. 전주의 전투에서 양연소는 의화에 반대한다. 양연소의 주장과 당시 재상 구준의 주장은 일치했다. 그러나 북송조정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양연소는 자신이 인마를 이끌고 요나라 경내로 진입하여, 고성을 함락시키고, 적지 않은 전과를 거둔다. 그후 전주에서 전연지맹을 맺는다. 양연소는 변방을 수비한 공로로 여러번 승진한다. 경덕2년, 양연소는 고양관부도부서가 된다. 양연소는 대중상부7년 임지에서 사망하니 향년 57세이다. 송진종은 그 소식을 듣고 극히 비통해 하며 사자를 보내서 영구를 호위하여 돌아오게 한다. 하삭의 백성들은 모두 영구를 보면서 눈물흘렸다. 북송조정은 양연소의 세 아들에게 관직을 내린다. 그리고 양연소의 문객들 중에서 재능이 있는 자들에게도 관직을 내린다. 양연소는 용맹하게 잘 싸웠고, 받은 하사품은 모조리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본인은 검소하고, 영을 내릴 때는 엄명했다. 병사들과 같이 고생하고 같이 먹으며, 양업의 풍모를 이어받았다.
제3대
양문광(楊文廣)은 양연소의 셋째아들이다. 양문광은 도적 장해(張海)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서 전직(殿直)이 된다. 나중에 섬서를 안무하는 범중엄을 만나고, 범중엄은 얘기를 나누다가 양문광의 재능이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를 곁으로 데려온다. 적청(狄靑)이 광서를 정벌할 때, 양문광이 따라간다. 이대의 양문광은 아직 무명지배였다.
그후의 일련의 전투에서 양문광은 비범한 군사재능을 발휘한다. 송영종은 양문광이 명장의 후예라고 여기고 그리고 공로도 있어서, 여러번 발탁한다. 그를 지경주진융군, 정주로부총관에 임명하고, 보군도우후에 봉한다. 요나라는 송나라와 대주의 국경선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다. 양문광은 조정에 진도(陳圖)를 올려 유연십육주를 회복시킬 전략을 바친다. 그리고 조정의 회신이 내려오기도 전에, 양문광은 임지에서 사망한다. 북송조정은 그를 동주관찰사로 추증한다.
기실 역사상의 양가장에는 사태군(佘太君)도 없고, 양종보(楊宗保)도 없으며, 목계영(穆桂英)도 없다. 양업을 해친 것은 왕승이지 반미가 아니다.
양연소는 왜 양육랑(楊六郞)으로 불리는가? 역대 양가장 전설에서, 양연소는 양업의 여섯째 아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양육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기록에 따르면, 양연소는 장남이다. 요나라에는 이런 미신이 있었다. 하늘의 북두칠성중에서 여섯째 별이 요나라의 극성이라고. 양연소는 요나라사람들에게 위하력이 있으므로, 요나라사람들은 그가 북두칠성 여섯째 별이 인간세상에 내려온 것이라고 여겨서 그를 양육랑이라고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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