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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고대인들은 어떻게 욕을 했는가?

by 중은우시 2016. 8. 3.

글: 퉁가액이근(佳額爾瑾)


지금은 두 사람이 일단 의견이 맞지 않으면, 쉽게 인터넷에서 욕을 해댄다. 욕설은 무척이나 거칠다. 기실 이건 고대인들에게 배우는게 좋다. 욕을 하면서도 거친 말을 하지 않고, 듣는 사람이 할 말없게 만들며, 그 안에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중국고대에 자주 쓰는 저주의 말은 "무후(無後)" 즉, 자손이 끊긴다는 말이다. <맹자.양혜왕상>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중니(공자)가 말하기를, 가장 먼저 사람인형으로 순장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손이 끊길 것이고, 좋게 죽지 못할 것이다. 너무나 덕이 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욕하는 말이 있는데, "불몰(不沒)"이다. 이는 정상적으로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 수종정침(壽終正寢)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수종정침은 살만큼 산 다음에 자신의 침실에서 정상적으로 죽는 것을 말한다. "불몰"이라는 욕은 상당히 심각하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은 자신이 "득사위행(得死爲幸, 행복하게 죽고)" "사득기소(死得其所, 죽을 자리에서 죽는 것)"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살만큼 살고 죽을 때 죽는 것 그것은 일종의 행복이다. <좌전>에 이런 말이 있다. 초왕은 불몰하지 않았느냐" "수종하지 못했다"


사람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문인상경(文人相輕)" 문인은 서로 상대방을 존중해주지 않는다. 서로 멸시하고 조소한다. 문인들이 상호경만(相互輕漫)하고 피차비박(彼此菲薄)하는 것은 문단의 통상적인 현상이다. 비록 문인들은 체면을 중시하지만, '문인상경'은 문인의 한가지 특색을 말해준다. 어쨌든 가장 욕을 잘하는 사람은 문인이다. 욕을 하나의 학문으로까지 승화시켜, 욕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게 만든 것도 바로 그들이다.


공자는 우리가 보기에 가장 온문이아(溫文爾雅)하고 심성이 선량한 어른이다. 어찌 군자의 풍도를 제창한 사람이 욕을 할 때 악독하기 그지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전해지는 바로는 그에게는 제자 재여(宰予)가 있는데, 하루는 낮에 잠을 자고 있었다. 공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욕을 한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가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장은 손질을 하더라도 매끈하게 할 수 없다. 재여에게 뭘 나무라겠는가?" 이 말은 천고에 욕하는 절구(絶口)가 된다.


그러나, 문인들의 욕으로 각박하고 악독한 것으로 따지자면, 삼국시대 진림의 격문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관도지전때, 진림은 원소의 수하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원소를 위하여 격문을 초안했는데 조조를 크게 욕했다. 조조의 조부로부터 부친까지 그리고 조조 자신에 이르기까지. 조조의 조부가 환관이었으므로 부친은 조부의 양자였다. 진림은 조조를 이렇게 욕한다: "조췌엄유추(操贅閹遺醜, 조조는 환관의 대를 이어 추하게 남은 자이다)". 조조가 그 글을 보고는 두통이 발작으 일으킨다. 원소를 겨개한 후 조조는 포로로 잡힌 진림을 심문한다. 나를 욕하는 것은 상관없는데 왜 조종3대를 욕했는가?


비교하자면, 삼국시대의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심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멀쩡한데 제갈량에게 욕을 먹고 죽은 사람이다. 공명이 부대를 이끌고 조위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을 때, 전쟁전에 서로 욕설을 한바탕 했다. 가련하게도 노신 왕랑(王郞)은 제갈공명에게욕을 심하게 얻어먹은 후 화가나서 간담이 찢어져서 말아래 떨어져 죽고 만다. 대신을 욕으로 죽여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고대에 사람을 욕하는 말은 아주 많다. 어떤 것은 지금도 쓰이고 있다. <맹자.등문공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양씨의 위아(爲我)는 무군(無君, 임금이 없는 것)이다. 묵씨의 겸애(兼愛)는 무부(無父, 부친이 없는 것)이다. 부치도 없고 임금도 없으면 금수(禽獸)이다." 금수는 사람을 욕하는 말이다. 또 한가지 욕하는 말이 있다. "식기육(食其肉)" 너무 미워서 네 살을 먹고 싶다는 말이다. 고인의 말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오식기육(吾食其肉), 불이분인(不以分人)" 나 혼자서 네 살을 먹어도 부족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니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가 없다. 또 이런 욕도 있다. "이하지(爾何知)" 이것도 욕하는 말이다. 그 뜻은 "네가 뭘 알겠느냐?"이다. 그 외에 "획이류(劃爾類)"가 있다. 그 뜻은 너 같은 자들은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잔수자(殘竪子)"라는 욕도 있다. 그외에 "여귀(厲鬼)", "사귀(死鬼)' "역부(役夫)", "천화(賤貨)", "역인(役人)", "역신(役臣)"등등이 있는데 모두 욕하는 말이다.


홍문연때, 범증은 계속하여 항우에게 유방을 제거하라고 암시한다. 항우는 하지 않는다. 결국 범증이 화를 벌컥 낸다: "수자(竪子)와는 천하를 같이 도모할 수 없겠다. 항왕에게서 천하를 빼앗는 자는 패공(유방)일 것이다." 여기서 수자는 유치하고 무지한 자를 가리킨다. 한고조 유방은 나중에 역생(酈生)을 수유(竪儒)라고 욕한다. 그 유생을 수자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한고조는 스스로를 내공(乃公)이라고 했는데, 내(乃)는 너(汝)라는 뜻이다. 결국 내공은 너의 어르신이라는 뜻이다. 자칭 너의 어르신이라고 한 것이고, 상대방을 수자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한고조는 한편으로 그를 수자로 욕하면서, 자신을 어르신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왜 '수자'가 욕하는 말이 되었는가? <설문>의 해석에 따르면 '수'는 직립(直立)이다. '수(竪)'의 독음은 '유(孺, 젖먹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수자는 바로 '유자'이다. 즉 젖먹이 어린아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소자(小子)'와 비슷한 뜻이다. 다만 다른 점도 있다. 이전의 '수자'는 나이가 얼마나 많든지 간에 네가 멍청하다고 여기면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유방이 욕을 할 때는 일반적으로 '수유'라고 욕하는 경우가 많았고, '수자'라고 하는 경우는 적었다. 유방이 살아있을 때 무수한 사람들을 '수자' 혹은 '수유'라고 욕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4백년이 지나서 완적(阮籍)이 이 욕을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는 산수를 즐기며 유람하다가 초한상쟁의 전쟁터를 지나다가 이렇게 탄식한다: "아 당시에는 영웅이 없어서, 수자(竪子)'가 공명을 이루었구나."


이와 비교하자면, 문인들이 욕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의 계통을 이룬다. 심지어 문장을 이루어 욕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부득이 낙빈왕의 그 유명한 격문 <위서경업토무조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낙빈왕은 격문에서, 무측천이 임금을 시해하고, 모친을 독살하며, 나쁜 마음을 품고 신기를 훔쳤다고 하여, 후궁의 은밀한 일을 들춰내어 개인인격을 모욕했다. 무측천을 구혈분두(狗血噴頭)하도록 욕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로 인하여 노화충천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의 재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를 가지고 재산이 제대로 인재를 살피지 못한 과실이 있다고 책망한다. 낙빈왕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은 이 뛰어난 격문이 후세에 <고문관지>에 실리게 되어, 후세의 학자들이 배우는 모범글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인들의 욕은 고대에 많은 경우 문인간에 서로 놀리는 것이다. <송서.사령운전>에는 하장유(何長瑜)가 육전(陸展)을 욕해서 말하기를, "육전염빈발(陸展染鬢髮) 욕이미측실(欲以媚側室), 청청불해구(靑靑不解久), 성성행부출(星星行復出)" 원래 동료의 나이를 가지고 놀린 것이다. 그는 나이도 많으면서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하여 새로 취한 소첩에게 잘보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료사회에서는 이런 유머를 이해해주지 못해서, 이렇게 놀린 것을 '욕'으로 취급해서, 욕을 한 사람이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두보는 일찌기 "이조신형구민멸(爾曹身形俱泯滅), 불폐강하만고류(不廢江河萬古流)"(너희들이 왕양노락(왕발, 양형, 노조린, 낙빈왕의 사걸)을 비웃지만, 너희들의 몸과 이름이 다 없어지더라도, 그들의 시는 장강처럼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라고 초당사걸의 시를 경박하다고 비웃던 사람들을 욕한 것이다. 역시 시성 두보의 솜씨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비록 욕을 하긴 하지만, 지저분하지 않고 시원스럽게 한 것이다. 고금에 이런 수준에 비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건륭연간에, 상서(上書) 화신과 시랑(侍郞) 기효람이 화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돌연, 개 한마리가 그들의 곁을 지나갔다. 화신은 고의로 개를 가리키며 기효람에게 묻는다: "시랑시구(是狼是狗)?"(늑대냐 개냐라는 뜻이지만 시랑은 시랑 기효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시랑은 개냐라는 의미도 된다), 기효람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는다. "미수위랑(尾垂爲狼), 상수위구(上竪爲狗)"(꼬리를 내리면 늑대이고 꼬리를 위로 올리면 개이다. 그런데 상수는 상서와 발음이 같다. 즉, 상서가 개이다라는 말이된다)


문인들 사이에서는 서로 욕하기를 즐기는 경우가 있다. 황제도 자주 참지 못하고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을 욕하기 좋아한 황제는 유방 한 사람만이 아니다. 옹정제는 '절자공(折子控)'이다. 자주 하루에 십여시간을 상소문을 검토하고 회신하는데 썼고, 지루해하지 않고 이를 즐겼다. 그리고 상소문(절자)에 적지 않은 재미있는 '회신'을 남긴다.


옹정제는 절자(황제에게 올린 글)에 가벼운 유머를 썼다. "이 자는 낮에도 깨지 않던 사람이다. 짐이 그때 집에서 그를 욕하며 놀았다. 그를 '구(球)'라고 불렀고, 거칠고 멍청하기 그지없다. 등극한 후에 어디에서 관리로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짐은 왕숭을 불러들였는데, 너를 보니 그저 쓰레기이고, 얼굴에 비속한 기운이 가득하다." 옹정제는 욕할 때도 수준이 있었다. 욕을 하면서도 풍자하고 비꼬았다: "너는 신선이냐? 이렇게 미치고 엉터리같은 말을 어찌 군부(君父)의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인단 말인가?" "짐과 같이 평범한 황제가 어찌 너와 같은 사람을 기용할 수 있겠는가?" "너에게 상을 더 주어서, 네가 아부해서 승진하는데 쓰도록 해야겠구나."


욕하는 걸 얘기하자면 한 사람을 빠트릴 수가 없다. 그는 바로 노신이다. 노신에게 욕을 얻어먹은 사람이 어찌 백명에 그치겠는가? 노신은 그가 욕한 사람들에 대하여 죽을 때까지도 마음상태가 동요되지 않았다. 죽기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명도 용서할 수 없다." 당초 좌익문학청년이 양실추를 이렇게 욕한다. "자본가의 핍주구이다(資本家的乏走狗)" 노신은 그 글을 보고 욕한 사람의 필력이 아직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가 나서야 했다. 잡문을 하나 쓰는데 <상가의 자본가의 핍주구이다>라는 글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 양실추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가 이 글을 보고나서는 화가나서 온몸을 덜덜 떨었다고 한다.


노신과 양실추의 욕은 어느 정도 문인들의 감정싸움의 측면이 있다. 특수한 시대정치적 원인으로 노신에게 욕을 먹은 사람은 대가급의 호적, 그리고 노신 자신의 친동생인 주작인도 있다. 그 시대의 문단에서 노신은 마치 독불장군같았다. 여기저기 나서다보니 그에게 욕을 먹은 사람이 문단의 상하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모두 문단현상에 대한 욕이었다. 그는 사람을 욕하는데 있어서 마음상태가 이상하리만큼 담담했고 굳건했다: "내 생각에, 욕을 하는 것은 중국에서 아주 보통의 일이다. 아쉽게도 모두 욕하는 것만 알지, 어떻게 욕을 하고 누구를 욕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안된다. 현재 우리는 반드시 욕을 하는 도리를 지적하고 다시 욕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주 재미있다. 그래서 욕하는 것에서 욕하는 것이상의 일이 나오게 된다."


그 자신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나 자신은 알고 있다. 중국에서 나의 붓은 비교적 날카로운 편이다. 말할 때 어떤 경우에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리,정의의 미명으로, 정인,군자의 휘호로, 온량,돈후의 가면으로, 유언,공론의 무기로, 탄토곡절의 문자로, 사리사욕을 취하고 칼도 붓도 없는 사람들이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드는지를 알고 있다." 이는 자연히 노신의 일관된, "기린의 가죽 아래 마각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후에 "물에 빠진 개를 실컷 두들겨 패야 한다"는 전투원칙이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까지도 "한 명도 용서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노신이 욕하는 것은 많은 경우 시대의 폐해에 대한 것이고, 중국인의 뼛속에 붙어 있는 악독한 고름을 파내기 위한 것이다.


고인들이 사람을 욕하는 것이 범죄일까 아닐까? 욕을 먹은 사람은 그저 참고만 있어야 했을까? 대명률, 대청륭의 <형률.매리(罵詈)>에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1) 무릇 사람을 욕하는 자는 곤장 10대; 서로 욕을 한 자는 각각 곤장 10대.

(2) 급절매(級節罵): 부민, 군사, 이졸이 본부 5품이상 상관을 욕한 경우, 곤장 100대, 급별로 내려간다. 반드시 '친문(親問), 내좌(乃坐)"한다.

(3) 비존매(卑尊罵): 첫째, 노비가 가장을 욕하면 교감후(絞監候), 만일 노비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렸고, 옛 가장을 욕한 경우에는 일반사람을 욕한 것으로 처리한다. 고용인이 가장을 욕하면 장80대, 유기징역2년에 처한다. 둘째, 손아래사람이 형, 누나를 욕하면 장100대, 큰아버지, 큰어머니, 작은아버지 작은 어머니, 고모, 외조부모를 욕한 경우, 유기징역 1년, 셋재, 자손이 부모, 조부모를 욕하거나, 처나 첩이 남편의 부모, 조부모를 욕한 경우에는 모두 교(絞)형에 처한다. 넷째, 처,첩이 남편의 친가 어른을 욕한 경우 만일 시마(緦麻. 상복의 일종 오복의 하나)이상이면 남편을 욕한 것과 같은 죄로 처벌한다; 첩이 남편이나 처를 욕한 경우 장80대. 처,첩이 남편의 사망으로 개가한 후 옛 남편의 부모, 조부모를 욕한 경우에는 아직 의(義)가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구고(舅姑)를 욕한 것과 같은 죄로 처리한다. 만일 쫓겨나면 이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이상은 모두 반드시 "친고(親告), 내좌(乃坐)"해야 한다.


이를 보면, 고인들이 사람을 욕하는 것은 학문이면서, 일정한 리스크가 있었다. 문인들처럼 사람을 욕하면서 험한 말을 하지 않으면 욕을 먹는 사람이 할말이 없게 되면 그만이다. 만일 험한 말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실을 잡히면, 곤장을 맞아야 한다. 고대문인이 사람을 욕하는 지혜를 어떻게 배울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이 직접 깨닫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