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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하(夏)나라의 공갑(孔甲)은 황음무도했을까?

by 중은우시 2019. 3. 26.

글: 과기대환단(過期大還丹)


공갑은 하왕조의 열네번째 국군이다. 재위기간은 겨우 9년인데, 후세에 명성이 아주 나쁘다. <사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공갑은 미신을 믿고 황음무도했다. 그리하여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하왕조는 이때부터 쇠락한다. 그리고, <국어.주어>에는 더욱 악독하게 평가하고 있다. "공갑란하(孔甲亂夏), 사세이운(四世而隕)"(공갑이 하왕조를 어지럽혔고, 4대만에 하왕조는 멸망하게 된다)라고 하여 하왕조 멸망의 책임을 공갑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렇다면, 공갑은 정말 하나라를 어지럽힌 원흉인가. 필자가 관련문헌을 연구해본 결과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갑란하'의 사적으로 전해지는 것은 많지 않은데, 그것들도 의문점이 많다. 필자가 정리해보니 다음의 몇 가지이다.


계위(繼位)문제


소강(少康)의 복국(復國)이후, 부전자(父傳子) 즉 부친에게서 아들로 왕위가 전해지는 계승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공갑에 이르러 변화가 발생한다. 제불항(帝不降)은 왕위를 아들 공갑에게 전하지 않고, 동생인 경(扃)에게 전한다. 그리고 경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 근(廑)에게 왕위가 넘어가고, 제근(帝廑)이 죽은 후에 비로소 왕위가 공갑에게 전해진다. 이 왕위계승순서는 아주 기괴하다. 후인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공갑이 '미신을 믿고 황음무도했으므로(好方鬼神, 事淫亂)" 불항은 자신의 아들이 미덥지 못하다고 여겨서, 동생인 경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아주 억지스럽다. 상고시대에는 무술(巫術)을 신봉했고,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욱이 "절지천통(絶地天通)"을 시행한 이래로 신령과 소통하여 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집중시키면서 무왕(巫王)과 제왕(帝王)의 신분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런 방면에서 본다면, 공갑이 '호방귀신'한 것은 오히려 왕위를 계승하는데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하지는 않는 일이다. 사실상, 공갑이 나중에 왕위를 계승받은 것은 바로 이 귀신을 공경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기재에 따르면, 제근이 재위할 때 "하늘에 변고가 생겨, 10개의 해가 동시에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징벌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제근이 죽은 후 비로소 귀신을 더욱 공경하는 공갑을 왕위에 올려 하늘의 용서를 빌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후계자를 고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제근의 아들이나 동생.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미 왕위에서 멀어져버린 공갑을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다시 말해서, '사음란'이라는 말은 <예기>에서 도덕적으로 형편없고, 기풍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서사에 기재된 공갑의 사적은 도덕이 형편없다고 하기 힘들다(뒤에 상술하겠음)


그러므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불항이 왕위를 공갑에게 넘기지 않은 것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불항의 동생인 경과 권력다툼이 있었다든지. 구체적인 것은 고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파부(破斧)>노래의 의문


<파부>노래가 최초로 기록된 것은 <여씨춘추> 음초편이다. 동음(東音)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쓴 것이고, 공갑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음악적 재능을 칭찬하는 뜻이 있다. 후세에는 이를 가지고 공갑이 사냥을 즐기고, 정무를 게을리하고, 인민들에게 잔혹하게 했다고 해석한다(예를 들어 주일량의 <신편중국통사>). 이에 대하여 필자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겠다: 정말 죄를 뒤집어 씌우려면 무슨 말이든 못하겠는가. <국어>의 공갑란하의 평가에 끼워맞추기 위하여, 정말 뭐든지 가져다가 방증으로 사용하려 했던 것같다.


우리는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하후씨 공갑이 동양산으로 사냥을 갔다. 하늘에 큰 바람이 불어 캄캄해진다. 그래서 공갑은 길을 잃고 민가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 주인이 마침 아들을 낳는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왕께서 오셨으니, 아들은 반드시 대길할 것이다"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런 복은 감당할 수 없다. 아들에게 반드시 재앙이 미칠 것이다."라고 한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 아들을 자신이 거두어 돌아가며 말한다: "내 아들로 삼겠다. 누가 감히 이 아이에게 재앙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아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었는데, 장막이 흔들려 기둥이 무너지면서 도끼에 발이 잘리게 된다. 왕은 그에게 문을 지키는 임무를 맡기며, 이렇게 말한다. "오호라. 다쳤구나. 이것도 운명이다!" 그리고 '파부'라는 노래를 지었는데, 이것이 실로 동음의 시작이다.


이를 보면, 확실히 공갑이 사냥갔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냥을 즐겼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고대에 제왕이 사냥을 하는 것은 무력을 과시하는 것과 인재를 선발하는 기본적인 활동이다. <주례>에는 그것을 예의로 삼아 후세에 따르도록 했다. 공갑의 방식은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는다면 명군의 모습이다. 그가 민가에 들어간 후에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웃으면서 얘기를 나누지 않는가. 만일 공갑의 악명이 널리 퍼져 있었더라면, 아마도 민중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 아이에게 반드시 재앙이 올 것이다'라고 했을 때, 공갑의 행동은 정의감과 책임감에 넘친다. 전혀 폭군의 모습이 아니다. 화를 내서 헛소리한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이를 거두어 왕궁으로 데려가서 엄밀히 보호한다. 제왕의 기운으로 아이를 보호하려 한 것이다. 이게 무슨 잔혹한 모습인가. 마지막으로 그래도 아이가 재앙을 받아, 다리가 잘리게 되었지만, 공갑은 그를 포기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문을 지키게 했다. 폭군이 이렇게 하는가. 아마도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의 생사를 신경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당연히 굳이 공갑이 이렇게 한 것을 가지고, 그 목적이 자신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본다든지, 그가 이렇게 함으로써 골육이 서로 떨어져 살게 되었다든지락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천 사람의 눈에는 천 명의 햄릿이 보이는 법이니까.


"공갑호룡(孔甲好龍)"의 의문


공갑호룡은 <좌전>에 기재되어 있다. 개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공갑이 용을 몇 마리 얻는데, 유루라는 사람에게 용을 돌보도록 시킨다. 그리고 그를 어룡씨(御龍氏)로 봉한다. 그리고 원래 시위씨(豕韋氏)의 영지였던 땅을 그에게 봉토로 내린다. 그런데 유루가 용을 돌보다가 한 마리를 죽이게 된다. 그리하여 용고기로 고기죽을 만들어 공갑에게 바쳤다. 그리하여 공갑은 영광스럽게도 세계최초로 용고기를 먹은 인물로 등재된다. 나중에 공갑이 다시 용고기가 먹고싶어하자, 유루는 겁을 먹고 도망친다.


원문에는 "(공갑)요어유제(擾於有帝), 제사지승룡(帝賜之乘龍)"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요어유제'는 다시 공갑의 품성이 나쁘다는 증거로 얘기된다. 그러나, 청나라때의 양옥승(梁玉繩)은 <국어>에서 공갑이 음란하고 도덕적으로 형편없다고 한 것은 바로 '요(擾)'자를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교'라는 것은 인사한다는 예의용어이다. 어지럽힌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어>의 말은 믿기가 어렵다. 이에 대하여, 필자도 양옥승의 말이 맞다고 여긴다. 기본적인 사실 하나는 만일 천제를 어지럽혔다면, 천제가 용을 하사할 리가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죄상은 바로 공갑이 수하를 다루는데 무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제후의 봉지를 빼앗았고, 그리하여 제후들이 이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첫째, 필자의 고증에 의하면, 상고의 용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아직 순치되지 않은 준마이다. 야생마는 중원지역에서 순화된 때가 약 5500년전이다. 하나라때는 아직 귀했다. 마리 순화된 후에는 기병과 전차에 쓰였다. 아주 높은 전략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귀성으로 보나, 전략적 가치로 보나, 우수한 말조련사가족은 공갑에게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설사 유루가 무능하다고 하더라도, 공갑의 전략적 안목과 인재에 대한 갈구를 알아볼 수 있다. 이는 명군의 모습이다. 다음으로, 시위씨는 하계(夏啓)때 귀순하여 신하로 되었다. 한요대하(寒澆代夏)때, 소강이 복국하는 것을 돕는다. 단지 그가 돼지는 기를 줄 알지만, 말을 기를 줄 모른다고 하여 봉지를 박탈했다면 확실히 인심이 흔들릴 일이다. 다만, 시위씨는 사실상 하왕조에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고, 걸왕대까지, 시위씨는 극력 하왕조의 통치를 옹호한다. 그리하여 성탕이 토벌할 때 첫번째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후들이 이반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


당연히 <열선전>에는 공갑이 뒤를 이어 용을 기른 사문(師門, 사람이름)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가의 말이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여기서 토론할 것은 아니다.


"청화간(淸華簡)"의 기록


청화간은 청화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전국시대의 죽간(竹簡)이다. 그중 <후보(厚父)>편에는 공갑의 또 다른 일면이 보인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하걸(夏桀)이 선철왕(先哲王) 공갑(孔甲)의 전형(典刑)을 쓰지 않아서, 천명을 잃고 나라도 망했다. 여기에서 아무 명확하게 공갑을 선철왕이라고 높이 받들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전형을 후세의 모범이라고 칭찬한다. 이를 보면, 전국시대에 공갑은 명군이라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공갑란하'설은 증거가 부족하다. 공갑은 설사 명군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혼군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왕조의 멸망의 책임을 공갑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은 불공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