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엽서도(獵書徒)
손무(孫武)는 비록 '병성(兵聖)'으로 떠받들어지고, 이름이 천고에 유명하며, 그가 저술한 <손자병법(孫子兵法)>은 더구나 병가의 성서로 인정받으며, 전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데, 그가 존재했던 인물인지 여부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아 왔다. 원인은 복잡하지 않다. 손무의 평생사적에 대한 문자기록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사마천이 쓴 <사기.손자,오기열전>이다. 그보다 이른 선진시대의 사서인 <좌전>, <전국책>등에는 그의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외에, <사기>에 기록된 손무가 오왕합려와 초나라를 정벌한 기록은 <좌전. 정공, 정공4년>의 기록과 충돌된다. <좌전>의 기술에 따르면, 제후들과 연합하여 초나라를 정벌하자는 계획을 세운 사람은 오원(伍員, 즉 오자서)이고, 전군총사령관은 오왕합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무라는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역사인물의 평생사적은 그가 생활했던 연대와 가까운 사서일수록 기술이 더욱 명확하고, 시간이 멀어질수록 불명확해진다. <좌전>, <전국책>, <여씨춘추>등등의 전국시대에 만들어진 사서에는 손무라는 이름과 사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확실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의문을 품는 것은 정상적이다. 다만, 만일 이에 근거하여 손무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그것도 너무 성급한 결정일 수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상호 모순되는 명제를 가지고 그것이 증명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사마천이 맞았다. 손무라는 사람은 확실히 존재했다 둘째, 사마천은 틀렸다. 손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첫째 명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마천이 옳았고, 손무라는 사람은 확실히 존재했었다.
먼저, <좌전>등 선진사서에는 오왕합려가 초나라를 정벌한 일에 대하여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좌전.정공,정공4년>의 글을 보면, "동(冬), 채후(蔡侯), 오자(吳子), 당후(唐侯), 벌초(伐楚)." 그리고 백거지전(柏擧之戰)의 과정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점은 아무런 의문이 없다.
다음으로, <좌전>에서 제공하는 백거지전의 세부사항을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삼국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오왕합려이다. 연속 2회 출동한 것은 합려의 동생인 부개왕(夫槩王)이다. '위장(爲將)'의 손무는 물론이고, 오자서의 이름조차도 마찬가지로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오, 채, 당의 삼국이 초나라를 정벌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기원전506년이며, 춘추시대이다. 그래서 명확하게 춘추시대의 특징을 나타낸다. 군대의 지휘계통은 세습귀족 위주이고, 직업군인이 맡지 않았다. 그래서 손무나 오자서는 비록 군대내에 있었지만, 두각을 나타낼 기회는 없었다. 하물며 두 사람은 모두 외지에서 온 '객경(客卿)'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마천은 아무런 근거없이 손무를 창작해 낼 이유가 없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할 때, 한고조 유방을 깡패로 묘사했다. 그것은 한무제가 그를 고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복수한 것이다. 저명한 전투를 묘사할 때 병력을 대부분 더 많이 적었다. 하나는 편의를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사서 편찬시 대부분 허수(虛數)를 썼기 때문이다. 사마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사마천이 아무런 근거없이 절세명장 손무를 만들어 낼 동기는 전혀 없다. 또한 <사기>에 다른 유사한 사례도 전혀 없다. 사마천은 역사학자이고, 그가 쓴 것은 분명히 원천이 있을 것이고, 절대로 아무런 근거없이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마천이 손무라는 사람을 기록한 것을 보면 분명히 일정한 자료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의 점을 종합하면, 첫째 명제는 성립될 가능성이 매우 놓다. 필자는 절대적으로 70%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30%는 선진시대 자료의 결핍에 기인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다시 둘째 명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마천이 틀렸다. 손무라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손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즉각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1. <손자병법>의 작자는 누구인가? 2. <사기.손자.오기열전>에 기록된 사적은 누구의 것인가?
문제1: <손자병법>의 작자는 누구인가?
춘추전국시대에 전쟁이 빈번했고, 걸출한 군사가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전해져 내려오는 병서는 많지 않다. 근거를 가지고 조사해서 찾아낸 것은 <손자병법>외에 손빈의 <손빈병법>, 오기의 <오자>, 작자미상의 <육도>, 위료의 <위료자>, 작자미상의 <사마법>, 이들 병서의 내용에는 확실히 일부가 <손자벙볍>고 겹치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작자는 분명히 따로 있는 것이다.
'자(子)'는 선진시기에 존칭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낼 수 있는 결론은 이러하다: <손자병법>은 '손'씨성의 사람이 쓴 것이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명장중 손빈을 제외하고 다른 손씨성의 장수는 없다. 만일 손빈이 바로 손무라면,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다. 같은 사람이 왜 두 권의 서로 내용차이가 많이 나는 병서를 썼을까? 그게 가능한가? 여기서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은 <손빈병법>과 <손자병법>이 모두 손빈이 쓴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이름으로 본다면, <손자병법>은 이름없는 그러나 군사적인 견식이 뛰어난 어떤 소인물이 쓴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 그럴 견해는 거의 제로라고 본다.
문제2: <사기: 손자.오기열전>에 기록된 사적은 누구의 것일까?
선진사서에는 확실하게 오왕합려가 초나라를 토벌할 때 참여한 명장은 오자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 '오궁교전(吳宮敎戰)'과 같은 객경의 면접시험에 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오자서에게 해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자서는 일찌감치 오왕합려가 공자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화사첨족의 병법시연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자서가 아니라면, 이런 일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적합한 후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의 두 가지 문제를 종합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손무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면, 의문점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논리적으로 들어맞지 않는 부분도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이럴 가능성은 30% 이하라고 본다.
이상에서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필자는 손무라는 사람과 그의 사적은 존재했다고 본다. 그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원인은 다음의 몇 가지 때문일 것이다: 하나. 춘추시대는 귀족전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둘, 오왕합려는 조심스러웠다. 셋째, 그의 직위가 너무 낮았다. 넷, 일찌감치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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