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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중이(重耳)와 그 주변 인물들...

by 중은우시 2018. 11. 1.

글: 왕조귀(王兆貴)


기원전637년, 국외로 도망간 진공자(晋公子) 중이가 조(曹)나라에 도착한다. 조공공(曹共公)은 중이의 늑골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는 호기심이 생겨서, 몰래 중이가 목욕할 때 훔쳐보게 된다. 이렇게 몰래 훔쳐보는 행위는 예교를 지키던 시대에 체통을 잃는 일이다. 설사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다. 대부(大夫) 희부기(僖負羈)가 말려보았지만, 조공공은 듣지 않았다. 중이는 조공공의 이러한 행위를 증오했지만, 당시는 국외로 망명중인 상황이어서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희부기의 처는 중이를 따르는 사람들을 관찰해보고는 이들은 모두 입국안방(立國安邦)의 인재들이라고 판단한다. 그들이 보좌한다면, 중이는 분명히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국군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국군에 오른 후에는 반드시 천하의 패자인 제후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된 후에는 반드시 비례(非禮)의 무리들을 토벌할 것인데, 조나라가 분명히 첫번째로 당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중에 발생한 일도 역시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중이가 강성해진 후에 조공공를 호되게 혼내준다.


<좌전>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나중에 많은 사관과 학자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 기녀자(奇女子)이 혜안이 출중하다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반드시 남다른 인물이 있다. 그리고 남다른 사건이 생긴다. 남다른 사건이 생기면 남다른 공이 있다. 남다르다는 것은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희부기의 처의 관찰과 판단에서 알 수 있듯이, 중이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다.


춘추시기, 진헌공(晋獻公)은 적자를 폐위시키고, 서자를 세워서 여희(驪姬)의 난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태자 신생(申生)은 자결하고, 공자 중이와 이오(夷吾)는 멀리 타국으로 도망친다. 중이는 국외에서 19년간 떠돌아 다녔다. 8개 제후국을 돌다가 62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귀국하여 국군의 자리에 오른다. 9년이 되지 않는 기간내에 진나라는 강성해지고, 성복(城濮)의 전투로 국가위신을 크게 떨친다. 그리하여 마침내 춘추오패(春秋五覇)중 두번재 패주가 된다. 그리고 제환공과 나란히 "제환진문(齊桓晋文)"으로 불린다. 진문공이 이렇게 업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서를 많이 읽고 겸허하며 배우기 좋아하고, 인후한 마음을 가진 데다가 망명하면서 단련된 것 외에 그의 곁에 있던 훌륭한 신하들과도 큰 관계가 있다. 그가 실의했을 때이건, 그가 즉위했을 때이건, 이들 현명하고 덕망이 있는 인사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좌전>, <국어>와 <사기>의 기재를 종합해보면, 중이를 좋게 보고 쫓아다녔던 사람들 중에 조쇠(趙衰), 호언(狐偃), 가타(賈佗), 선진(先軫), 위주(魏犫)를 사마천은 "오현사(五賢士)"라고 불렀다. 이들이 핵심구성원이다. 함양과 식견이 남달랐고, 충신이면서 쟁신(諍臣)이다. 숙향(叔向)은 조쇠, 호언을 "복심(腹心)"이라고 불렀고, 위주, 가타를 "고굉(股肱)"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설사 친척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만두지 않았다. 죽어라 중이를 따르며, 대업을 함께 이루었다. 혹은 계책을 내고 혹은 격려하고 간언하며 중이가 위험을 넘기게 하고, 곤경을 벗어나게 하며, 바닥을 치고 올라가서 다시 위풍을 떨치게 하였다.


호언은 중이의 외삼촌이다. 그는 노련하고 무게가 있었으며 장기적인 안목이 있었다. 중이가 도망치던 초기에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제나라로 갈 것인가, 초나라로 갈 것인가. 호언은 분석을 마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제,초는 비록 강하지만 갈 길이 멀다. 아직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했으니, 적(狄)국으로 먼저 가는 것이 좋겠다. 적국은 가까이 있고, 외교적인 골치거리도 없었다. 거기서 쉬면서, 시국을 살펴봐서 변화에 맞춰서 대응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적국은 중이의 생모가 태어난 고향이다. 그곳에 도착한 후, 환영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귀국해서 국군의 자리를 계승할 기회까지 왔다. 진헌공이 사망한 후, 권신인 이극(里克)이 여희의 꿈을 깨버리고, 사람을 보내 중이를 맞이하려 한다. 그러나 중이등은 속임수일지 모른다고 의심하여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극은 다시 이오를 맞이하여 국군의 자리에 앉히니 그가 바로 진혜공(晋惠公)이다. 이오는 진(秦)나라의 유상원조하에 즉위했으나, 그는 즉위한 후 배신하여, 진목공(秦穆公)이 크게 혼을 내준다. 놀란 진혜공은 침식을 편안히 하지 못하고, 중이가 와서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까봐 걱정했다. 그리하여 발제(勃鞮)를 보내 중이를 암살하려 한다. 그 소식을 들은 후, 이미 처자식이 있던 중이는 약간의 미련이 있었지만, 호언등이 "대업을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어찌 편안히 살 수가 있습니까?"라고 권하여, 적국에서 12년간 머무르고 있던 중이는 적국을 떠나 다시 망명길에 오른다.


도중에 위(衛)나라를 지나게 된다. 위문공(衛文公)은 그를 예의로 접대하지 않았다. 오록(五鹿)이라는 곳까지 갔는데,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밭에서 식사하고 있던 농부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한 농사꾼이 장난을 쳐서 진흙 한 덩어리를 가져다 준다. 중이는 대노하여 바로 채찍을 휘둘러 그를 때린다. 호언이 급히 다가와서 말리며 말한다. 이것은 하늘이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받아서 수레에 가져다 놓고 머리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제(齊)나라에 도착하자, 제환공은 중이에게 강(姜)성의 여자를 처로 주고, 80필의 말을 보낸다. 중이는 낙불사촉(樂不思蜀)으로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호언등이 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러자 강부인과 모의하여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길을 떠난다. 귀국후, 호언등은 진문공을 보좌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성복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진나라가 중원의 패주가 되는데 탁월한 공헌을 한다.


조쇠는 '조씨고아' 조무(趙武)의 선조이다. 글을 읽고 이치에 밝으며 모략이 있었다. 사람됨은 조용하고 진퇴를 잘 알았다. 젊었을 때 중이와 친하게 지낸다. 중이가 망명길에 오르는 날부터 끝까지 따른다. 자신은 배를 곯더라도 중아에게는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음식을 관리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외에 조쇠에게는 '문담(文膽)'이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중이가 귀국하여 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 주었다.


중이가 진(秦)나라에 간 후, 진목공은 5명의 공족여자를 그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연회에 초청한다. 호언이 말하기를, 나는 조쇠만큼 글재주가 없으니, 조쇠가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선진시기에, 제후가 회맹하며 연회를 베풀 때면, 주인과 손님이 왕왕 시를 읊는 방식으로 함축적으로 자신의 태도와 바램을 전달하곤 했다. 중이는 소아(小雅)의 <면수(沔水)>를 읊었다. 이를 통해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듯이 자신에게도 귀국하고 싶은 생각이 있음을 나타낸다. 진목공은 소아의 <육월(六月)>을 읊는다. 이를 통해 중흥지신이 주천자를 보좌한 사적을 찬미했다. 조쇠는 그의 시를 듣자, 바로 이것은 진목공이 공자 중이에게 주왕실을 보좌하는 사명을 맡기려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여 즉시 반응을 보인다. 조쇠가 옆에서 일러주자, 중이는 급히 진목공에게 감사인사를 올린다.


얼마 후, 진목공은 병력을 보내 중이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고 정권을 차지하도록 도운다. 진문공 시대의 서막이 이렇게 열린 것이다. 그후 조쇠는 공로가 크지만 이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에게 양보했으며, 여러번 진문공이 내린 고위직을 극곡(郤縠), 난지(欒枝), 선진등에게 양보한다. 자신은 그들의 부수(副手)가 된다. 진문공은 감동하여 말했다: "조쇠는 세 번이나 양보하며 의리를 잃지 않았다. 양보한다는 것은 현명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이고, 의리라는 것은 덕이 넓은 것이다. 덕이 넓고 현명한 인재가 오니,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조쇠이 덕을 표창한다. 진문공은 일찌기 신군(新軍)을 만들어 조쇠를 장수로 앉혔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겨울의 태양"이라고 불렀다. 후세에는 그를 현사의 모범으로 본다. "공성불필재아(功成不必在我)" 공을 이루는 것을 반드시 내가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조쇠는 잘 실천했다.


19년의 망명생활에서, 생명의 위험도 있었고, 배고픔의 고통도 있었으며, 위난이 연이어 닥치기도 했다; 냉대를 받기도 하고, 무례를 당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시험이 계속되었다. 바로 이런 현명하고 덕망있는 사람들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고, 계속하여 채찍질해주었기 때문에, 중이는 버텨낼 수가 있었고, 견딜 수가 있었다. 편안하게 살면서 교만하고 자부심강하며 하고싶은대로 살던 일개 공자에서 인욕부중하고 여정도치하는 일대웅주로 성장한 것이다. 당대의 명군, 현신 그리고 후세의 식견있는 인물들은 모두 그들을 추앙했다.


<국어.진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진공자는 좋은 일을 하는데 싫증을 내지 않았다. 호언을 부친으로 섬기고, 조쇠는 스승으로 섬기고, 조타는 형으로 섬겼다. 이 세 사람이 실은 그를 좌우했다. 공자는 그들과 가만히 있을 때는 반드시 자신을 낮추고, 움직일 때는 반드시 물어보았다." 


중이와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의 경력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지도자의 곁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라인지, 어떤 사람을 중용하는지를 보면 너무 많은 문제를 설명해주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이런 것은 알 수가 있게 된다. 지도자의 품격이 높은지 낮은지, 일을 성공할 확률이 높을지 낮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