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삼갑제사(三甲第四)
춘추전국시대 사대부들은 윗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했으며, 그 방식은 오화팔문이었다. 그중 가장 표신입이(標新立異)하고 예의염치를 다 버린 것으로는 전성자 전상(田常)을 꼽아야 할 것이다.
전성자에 대하여 얘기하면 아마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전씨대제(田氏代齊), 즉 제나라의 국군이 강씨에서 전씨와 바뀐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전성자는 바로 전씨가족의 제8대 종주(宗主)이다.
가족의 제나라정권탈취라는 거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성자는 복잡한 정치투쟁을 겪었고, 심지어 자신의 명예와 절개마저도 포기했고, 스스로 나서서 대녹모(戴綠帽, 녹색모자를 썼다는 말로, 부인이 외간남자와 바람피우는 것을 의미함)하여, 가족사업을 위해 탁월한 공헌을 한다.
전항(田恒)은 바로 전성자(田成子)인데, 가족이 진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진항(陳恒)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때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의 이름과 같아서 피휘를 하여 '전상(田常)'이라고 고쳐부른다. 그는 제나라로 온 전씨가족의 제8대 우두머리였다.
기원전485년 즉 제도공(齊悼公, 제나라의 끝에서 다섯번째 국군)4년, 전상의 부친인 전걸(田乞)이 사망하고, 전상이 전씨집안의 종주가 된다.
전상이 종주에 오르자마자 왕실정변을 겪게 된다. 제도공이 대신 포목(鮑牧)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당연히 이 사건은 전상의 돌아가신 부친과도 큰 관계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의 부친이 숨어서 저지른 일에 대하여는 까발리지 않도록 한다.
제도공이 죽은 후, 제간공(齊簡公)이 즉위한다.
전성자와 감지(監止)는 제간공의 좌우상(左右相)이 된다. 감지는 제간공의 총애를 깊이 받아서 제나라의 국정을 장악한다. 냉대를 받는 전성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감지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전성자는 정력을 가족의 명망을 높이는데 투입한다. 세금을 거둘 때는 소두(小斗)로 거두고, 양식을 나눠줄 때는 대두(大斗)를 썼다. 그렇게 제나라 백성들의 인심을 계속 얻어간다.
기다릴 줄 아는 정치인의 운은 나쁠 수가 없다.
4년이 지난, 기원전481년, 전성자에게 기회가 온다.
감지의 가족중에 자아(子我)라는 자가 있는데, 전씨집안과 원한이 있었다. 마침 자아의 부하중에 전표(田豹)라는 문객이 있었는데, 전씨집안의 먼친척이었다. 자아가 뭔가 잘못먹었는지 아니면 전표를 너무 신임해서인지, 전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씨 적친(嫡親)을 멸족시키려고 하는데, 네가 전씨의 종주가 되면 어떻겠는가?"
전표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전씨와 이미 소원해졌고, 설사 종주가 된다고 하더라도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얼마 후, 전표는 전성자를 찾아가서 말한다: "자아가 전씨종족을 주살하려 합니다. 만일 우리가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멸문의 화가 닥칠 것입니다."
전성자는 과감하고 독랄했다. 그 자리에서 선발제인(先發制人)을 결정한다.
당시 자아는 아주 총애를 받고 있었고, 왕궁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성자와 4명의 형제들은 군대를 이끌고 왕궁으로 쳐들어가 자아를 죽이려 한다.
이때, 제간공은 미녀와 궁중에서 술마시고 놀고 있었다. 전성자가 왕궁을 침입하여 자아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개를 때리려면 주인을 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명을 내려 전씨형제를 주살하라고 한다. 아마도 전씨들이 그동안 인심을 매수한 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인지, 아니면 전씨가 더욱 잠재적인 실적주라고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태사(太史) 자여(子餘)가 나서서 제간공에게 말한다: "전상이 어디 난을 일으킬 사람입니까. 그는 그저 해로운 자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제간공도 결국 포기하고 만다. 전성자는 제간공이 분노하였다는 말을 듣자 피살될 것을 우려하여 도망치고자 한다. 그의 형제 전자행(田子行)은 담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성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망설이는 것은 일을 망치는 화근입니다."
형제의 격려에 전성자는 다시 용기를 얻는다. 그리하여 병력을 이끌고 자아를 공격한다. 자아는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빠져나가 도망치다. 전상의 부하는 쫓아가서 자아를 죽인다.
두 집안이 싸울 때, 제간공은 멍해진다: 그저 해로운 자를 제거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찌 내란으로 번진단 말인가. 그리고는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발을 담그려 하지 않고, 빠져나가 몸을 피한다.
제간공은 전성자를 잘못 보았다. 전성자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비록 제간공이 나를 죽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숨어버렸지만, 이전에 나를 죽이려 한 자이다. 그건 안될 말이다.
잘못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빠져나가게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전성자는 제간공도 추살하라고 명을 내린다. 결국 서주에서 제간공이 죽임을 당한다.
제간공(?-481)은 성이 강(姜)이고, 씨는 여(呂)이다. 이름은 임(壬)이다. 제나라의 국군이며 제도공의 아들이다. 기원전484년에서 481년까지 재위하고, 즉위하기 전에는 공자임(公子壬)이라고 불리웠다.
제간공이 죽은 후, 전성자는 제평공(齊平公)을 옹립하고, 전성자가 재상이 된다. 비록 시군범상(弑君犯上)이 춘추말기에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전씨집안에서는 이 일이 처음도 아니다. 전성자의 부친도 이런 일을 벌인 적이 있다.
다른 제후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대외적으로 전성자는 목린우호의 외교책략을 세운다. 원래 점령했던 노(魯)나라, 위(衛)나라의 토지를 돌려주고, 진(晋), 한(韓), 위(魏), 조(趙)의 조이씨들과는 맹약을 맺으며, 오(吳), 월(越)과는 사신을 교환한다. 가급적 시군이 가져온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고자 한다. 그리고 내내적으로, 전성자는 상을 내리고, 군대를 정돈하며, 백성들에게 친근한 정책을 써서 금방 국내형세를 안정시킨다.
나아가 그는 지위를 공고히 하며, 세력을 확대한다.
전성자는 처음에 목적을 가지고 제평공을 기만한다: "군주가 은혜를 베풀고 상을 내리는 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께서 시행하십시오. 죄를 정하고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렇게 5년이 지나니, 전성자는 제나라의 형벌대권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정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연이어 포(鮑), 안(晏), 감지(監止) 그리고 공족중 비교적 강성한 종족을 제거한다. 안평(安平, 진나라의 치박 임치구)에서 동으로 낭야(지금의 임기시)의 토지를 봉읍으로 차지한다. 제평공의 봉읍보다 넓었다.
지반이 커지는데 지킬 사람이 없다. 그러면 가족사업은 언젠가 몰락할 것이다. 전성자는 그 이치를 잘 알았다.
가족의 흥왕발달을 위하여, 전성자는 천고에 유명한 일을 벌인다.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전성자는 제나라에서 수백명의 피부가 곱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다리가 긴 젊은 여자들을 불러보아 후궁으로 들인다. 그녀들을 데리고 무엇을 했을까?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수백명의 여자들을 상대하기에는 전성자 혼자의 힘으로는 부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의 빈객(賓客)들이 자유롭게 후궁을 드나들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이렇게 하여 전성자가 사망할 때까지, 후궁여자들은 모두 70여명의 아들을 낳는다.
신생역량이 가입하니, 십여년후, 즉 기원전461년, 한, 위, 조가 지백(智伯)을 죽이고, 전씨의 제9대종주인 전양자(田襄子)는 자신의 모든 형제가족들에게 제나라의 전국각지의 성의 대부를 맡기고, 전씨가 마침내 사실상 제나라를 차지한다. 제나라의 국군을 몰아내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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