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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마니교(摩尼敎): 중국에서 천년간 이어진 종교

by 중은우시 2019. 1. 9.

글: 강산사(江山社)


김용의 무협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그의 경전적인 작품인 <의천도룡기>를 읽어보았을 것이다. 이 책은 주로 원나라의 멸망에서 명나라의 건립에 이르는 기간동안의 강호의 은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원나라말기이므로 소설에서는 주원장의 원나라말기의 일부 강호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소설에서 묘사된 주원장은 명교의 제자이다. 그리고 그의 수하로 있는 많은 장수들 서달, 상우춘등도 명교출신이다. 그리고, 이들 명교의 영웅호한들은 여러 경력이 독자들 앞에 하나하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소설은 어쨌든 예술적인 특징으로 허구가 너무 많다. 그렇다면 역사상 정말 이런 교파가 존재했을까?


주원장의 원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첫 이름이다. 전혀 귀한 느낌이 없는 이름에서 우리는 그가 사회의 하층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주원장이 속했던 계층은 실제로 최하층중에서도 하층이다. 바로 십등인인 거지(乞丐)이다.


그래서 주원장은 "출신이 가장 비천한 황제"이다. 천년전의 깡패황제인 유방은 그래도 사수정장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원장이 이룬 업적은 전무고인 후무래자(前無古人, 後無來者)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원장과 명교의 관계를 정리하도록 하려면, 먼저 이 교파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상 "명교"는 역사상 진실로 존재했다. 다만 이 명교는 소설의 '명교'와 같이 보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원래, '마니교'라고 불리고, 페르시아에서 발원한 것이다.


마니교는 아주 특색있는 종교교파이다. 동시에 회흘인의 국교이기도 하다. 그 후에 중국에 전해진다. 이것은 그노시스주의색채의 이원론종교이다. 주요 교의는 '이종삼제론(二宗三際論)'이고, 광명(光明)을 숭상한다. 교의상 선동적이고 반동적이므로, 많은 농민반란때 가장 많이 지도강령으로 채택되었다. 저명한 '방랍의 난'을 포함해서.


마니교의 이 특색은 기본적으로 역대조정이 모두 명교의 전파를 금지한 이유이다. 그리하여 마니교는 숨어서 비밀리에 각종 종교활동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마니교가 나중에 중국에서 흥기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설사 무측츤 이전에 이 교파가 중국에서 소규모로 전파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무측천시대에 이르러 이 종교는 점차 발전하게 된다.


그 주요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무측천은 여자이다. 천하의 지존이 되려면 자신의 등극에 대한 이론적 기초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여 천하를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 경전에서 이유를 찾아서 사람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여자가 황제에 오르는 것은 사상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적을 찾아서 참고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마니교의 교의중에는 여자가 최고통치자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있다.


이렇게 하여, 무측천은 즉시 사람을 찾아 마니교의 교의중 핵심을 <대운경(大雲經)>으로 편찬하게 한다. 이 경서의 주요내용은 바로 '정광천녀(淨光天女)"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무측천이 마니교를 인정한 것은 실제로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마니교는 신속히 발전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당무종의 회창5년 멸불(滅佛)때, 마니교도 중대한 타격을 입는다. 그리하여 비밀종교로 전환한다. 또한 도교와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마니교를 '명교'로 개칭한다. 북송말기부터, 절강, 강서, 안휘등지에서 명교의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그후 명교는 미륵교, 백련사와 결합하여 명나라말기의 백련교로 발전한다.


당무종때 불교는 가장 엄청난 겁난을 당하는데 바로 '회창멸불'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당무종의 재위기간동안 회흘국에서도 폭력충돌이 발생한다.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어디에 붙어 있을 것인가? 그래서 회흘국의 국교인 마니교는 몰락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모두 알다시피, 주원장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겨국은 황각사로 가서 화상이 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태조와 불교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명교가 아니라.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당나라이후, 몇세기의 시간동안 명교는 그저 암중으로 지하활동을 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조정의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발전하기 위하여 명교는 불교의 이름을 빌렸다. 겉으로는 불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명교이다.


원나라 말기에 이르러, 조정이 부패하고, 여러 대신들은 그저 밥만 축내고 있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몽골, 한족 두 민족간의 갈등도 점점 심해졌다. 이렇게 하여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주원장은 바로 이들 농민반란군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당시 유명한 반란군인 홍건군(紅巾軍)에 가담한다.


처음에 홍건군의 수령은 바로 백련교의 교주였다. 이름은 한산동(韓山童)이다. 자칭 송휘종의 8대손이라고 했다. 그가 건립한 정권은 "송(宋)"이다. 연호는 용봉(龍鳳)이라고 했다. 이때는 이미 명교와 백련교는 융합되어 하나로 되어 있었다. 그는 광범위하게 이런 말을 퍼트린다: "천하가 대란에 빠지면 명왕이 세상에 나타난다." 긜고 미륵불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세상을 구할 '대명왕(大明王)'이라고 한다.


그리고, 백련교는 선교때, 명교, 미륵교, 심지어 도교에도 삼투했다. 이렇게 되니, '홍건군'과 명교는 복잡다단한 관계를 갖게 된다.


한산동이 죽은 후, 주원장은 기회를 보아 그의 아들 소명왕을 죽이고, 최고지도자의 자리를 꿰찬다. 그리고 농민반란군의 최고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후 자신의 실력으로 결국 중국의 만리강산을 차지하고,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의 패주가 된다. 현재까지는 주원장이 일찌기 명교의 신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명확한 것은 그와 그의 수하는 이 교파와의 관계가 복잡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주원장이 국호를 "명(明)"으로 한 것이 기실 명교와는 그다지 관계없다는 것이다.


주원장이 국호를 "명"으로 한 것은 심사숙고한 결과이다. 일설에 따르면, 그를 따르던 장수와 부하들의 '명왕출세(明王出世)'의 바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설에 따르면, 고대제왕이 등극할 때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의 통치지위가 합법적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군권신수를 얘기해야 한다. '明'자를 나누면 '日'과 '月'이다.이를 통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보임으로서 민심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원장이 국호 '명'으로 한 유래는 아마도 이런 원인들일 것이다. 그리고 '명교'라는 단어는 청나라때 이미 더 이상 문헌에서 보이지 않지만, '명왕출세'라는 말은 민간에서 여전히 전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