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망천변적단정(忘川邊的但丁)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음력새해 첫날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새해 인사드립니다.
어제 저녁의 춘만(春晩, 春節晩會의 줄임말로 매년 구정전날저녁에 하는 공연행사를 가리킴)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볼만한 프로그램중에 필자의 생각에 가장 좋았던 것은 개략 <차산(借傘)>입니다. 전체 프로그램의 스토리가 교묘하여 각종 지방극을 교묘하게 하나로 엮었습니다. 특히 결말부분에 예퉁(葉童)과 자오야즈(趙雅芝)가 나오는 장면은 적지 않은 관중들에게 멀지만 분명한 청춘의 기억을 끄집어내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이 프로그램은 횡적으로 여러 희극버전의 <백사전(白蛇傳)>을 비교했기 때문에, 여러 장면은 특히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도 주목했을지 모르지만, 원래 버전과 비교적 가까운 천극(川劇)버전에서 소청(小靑)은 기실 남자이고, 원형은 청사(靑蛇)가 아니라 대청어(大靑魚)입니다. 그래서 배우가 극에서 입는 복장도 청어같은 흑색이 됩니다.
![](https://blog.kakaocdn.net/dn/pOLVx/btsL6X3BkHw/5pqkrkiFZhDmDlmPz7xoj0/img.jpg)
기실 여러분들에게 삼관(三觀,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무너뜨려버리는 진상을 말씀드리바면, <백사전>의 최초버전에서 이 이야기는 원래 요괴의 인류에 대한 '선인도(仙人跳, 미색을 이용하여 남자의 돈을 뜯어내는 것)'에 가깝습니다.
<당전기(唐傳奇)의 일편(一篇)은 <백사기(白蛇記)>인데, 한 서생이 경성으로 과거를 치러 가다가, 도중에 아름답고 돈많은 과부를 만났고, 그 과부는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합니다. 서생은 원래 고향이 부인이 있지만,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과부를 따라가고, 그녀의 집에서 삼일밤낮을 지냅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큰 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합니다. 처는 그의 몸에서 갈수록 농후한 뱀의 비린내를 맡기 시작합니다. 그 연유를 물어보자, 서생은 임종때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죽습니다. 죽은 후에 몸은 비린내가 나는 고름물로 바뀌고그저 두개골만 남기게 됩니다. 처는 매우 두려워하여, 남편이 말해준 과부가 살던 집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이미 황폐해진 집만이 남아 있습니다. 주변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에는 평소에 사람이 살지 않고, 그저 큰 백사(白蛇)가 출몰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원래 아주 공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만들어 "권세(勸世)"하는 의미는 기실 찬미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집밖으로 나간 서생들에게 가볍게 다른 사람을 믿지 말고, 함부로 바람을 피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요물에게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나라 중후기에 과거제도의 굴기와 하층민의 지속적인 몰락으로 이렇게 과거를 치러가는 서생의 성기갈을 이용하여 재물을 빼앗고 목숨도 빼앗는 "선인도"의 사기극이 흥성했습니다. <백사기>의 전체 이야기는 그런 세상풍습에 대한 권고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에 이르러 풍몽룡(馮夢龍)의 <삼언이박(三言二拍)>에 <백낭자영진뇌봉탑(白娘子永鎭雷峰塔)>의 이야기는 약간 수정됩니다: 첫째, 백낭자가 허선(許仙)을 유혹한 동기가 악의적인 선인도에서 인간에 대해 진짜 감정이 생긴 것으로 바뀝니다. 둘째, 허선은 처가 있으면서 바람을 피우는 쓰레기남자에서 순수한 남자주인공으로 바뀌어, 두 사람은 진실로 서로를 사랑합니다. 셋째, 법해(法海)라는 고승이 돌연 나타납니다. 허선(許仙, 기실 이 판본에서는 許宣임)이 원래버전에서처럼 고름물로 바뀌기 전에 끼어들어서 마치 담임선생님이 사랑에 눈뜬 쌍방에게 너희는 같이 있으면 안된다고 풍몽룡이 이렇게 개편한 것은 기실 의도가 원래 버전처럼 높지가 않다. 다만 재미있는 문제는 그가 왜 이렇게 고쳐놓고 득의만면해 했을까이다.
최소한 송(宋)나라이후에는 정주이학(程朱理學)을 대표로 하는 중국고대문화가 점차 일종의 "결핍문화"로 바뀌어 갑니다. 지리환경의 제한은 갈수록 가혹한 황권강화를 불러왔고, 민간에 분배할 수 있는 부의 총량은 고정불변이 됩니다. 심지어 점점 축소됩니다(왜냐하면 황권이 가져가는 비율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해결방법은 개략 민중정신을 거세화시키고 왜소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소위 "존천리(存天理), 멸인욕(滅人欲)". 무엇이 천리이고 무엇이 인욕인가?
예를 들어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밥을 먹는다. 이것은 천리이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밥을 먹고싶다. 이것은 인욕이다.
남자가 어른이 되면 장가가고, 여자가 어른이 되면 시집간다. 이것은 천리이다; 그러나 자유연애를 하려 하고 반드시 자신이 좋아하는 사내나 아가씨를 고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인욕이다.
네가 살면서, 매일 황제의 은혜를 칭송하는 것은 천리이다; 그러나 어느날 네가 갑자기 계몽되어, 프랑스의 몽테스키외처럼 <법의정신>같은 책을 써서, 황제에게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나를 통치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인욕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천리와 인욕은 당시의 도덕시스템에서 대립되는 것이다. 천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욕을 추구하는 사람은 법해와 같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인물이 '대법'을 시전해서, 좋은 명목을 붙여 너를 금산사(金山寺)에 가두어두어야 한다. 더더구나 풍몽룡같은 대작가가 곁에서 부추기면서 <백낭자영진뇌봉탑>을 썼다. 풍몽룡선생이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은 백낭자를 동정해서가 아니다. 그저,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경우와 비교하여 분수를 지키지 않게 되면 화를 당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너는 요괴이면서 요괴로서 수행이나 잘 할 것이지, 하필이면 선을 넘어 허선을 사랑한단 말이냐. 감히 법해 대법사의 권위에 도전한단 말인가? 너는 뇌봉탑에 평생 갇혀 있어야 한다!
당연히, 송명예학의 이런 "결핍문화"식의 안배는 두 가지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첫째, 명나라이후 중국의 본토 토양에서 기실 영원히 자생적으로 과학기술혁명, 사회혁명과 산업혁명이 발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법해가 말하지 않았던가. 좋은 것을 먹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인욕이다. 사람의 '과도'한 추구와 자유는 부정되어야 하고 죄악시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변혁의 동력은 제거되는 것이다.
둘째, 허선과 같은 중국의 엘리트계층의 남자(서생, 지식분자)의 정신을 거세시켜 깜짝 놀랄 수준에 이르게 했다.
이 점에서, 필자는 이중텐(易中天) 선생이 쓴 <중국의 남자와 여자>라는 책이 기억난다. 거기에는 중국전통희극이야기의 남자는 왜 그처럼 쓸모없는 인간인지에 대하여 반성하는 문장이 있는데, 정곡을 찌른다:
"중국의 희곡무대에서, 우리는 실로 이런 장면을 적지 않게 보게 된다: 무슨 일이 닥치면 여자측은 들고 일어나서 투쟁한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뒤에 숨거나, 혹은 그녀의 앞에 서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두 손을 흔들며 이렇게말한다: '안돼, 안돼, 부인, 그러면 안돼' 그렇지 않으면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면서, 직접 놀라서 바닥에 쓰러진다. <백사전>의 허선은 바로 그렇게 놀라자빠진 적이 있다. 백낭자가 임신한 몸으로 그를 위해 선초를 훔쳤다.
이처럼 담량이 적은 사람이 이 몇 사람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중국인들의 '통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인은 어려서부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남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시비에 휘말리지 말라고 교육받기 때문이다. "밥먹을 때는 목메지 않도록 조심하고, 길을 걸을 때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吃飯防噎, 走路防跌)"는 말처럼 밥먹고 길걷는 것같은 사소한 일조차 자유자재로 못하게 만드니 다른 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내 생각에 이중텐 선생의 이 관찰은 더할 나위없이 정확하다. <백사전>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당전기>에서 <삼언이박>까지 백사전은 기실 무슨 사랑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공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국인은 시종일관 공포 속에서 살아왔다. <당전기>에서 두려워한 것은 무규칙사회의 낯선 사람이 너에게 무슨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에 이르러 <삼언이박>에서 허선이 두려워한 주요대상은 엄격한 규칙을 정하고 보호하는 법해이다. 그는 법해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그에게 잘보이고 애쓰고, 그를 숭배한다.
부인도 가깝고, 아들도 가깝지만, 법해만큼 가깝지 않다. 법해화상의 한마디이면 부인이고 자식이고 다 버릴 수 있다. 뇌봉탑에 가두어야 한다고 하면 뇌봉탑에 가두어야 한다. 절대로 이 사요(蛇妖)와는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한다!
이런 남자는 실로 전혀 사랑스럽지 않고, 오히려 역겹다. 그의 인식능력은 그의 고난을 불러올 만하다.
아마도 풍몽룡의 이번 개편이 너무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명청 내지 민국시대의 후기개편에서는 다시 <백사전>에 몇 가지 수정을 덧붙인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바로 백낭자가 낳은 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장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탑을 열어 모친을 구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기실 중국식 잔머리의 산물이다. 제도가 너를 묶어 놓았고, 네가 자유와 인욕을 누리지 못하게 막고 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시험을 쳐서, 장원이 되고, 제도에 진입한 후에는 제도를 바꾸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일가족만 구해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개편은 더욱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준다. 그것은 바로 소청(小靑)의 추가와 미화(美化)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백사전>에서 사람들은 모두 청사(靑蛇)가 극내에서 가장 인격적 매력이 있는 인물로 본다. 이것은 바로 소청이 대표하는 것은 바로 일체의 속박을 부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사의 일가족은 부모부터 아들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그저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이나 영명위대한 법해존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일가족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비는 것이다. 단지 소청이라는 국외자만이. XX. 이게 뭐냐. 내 언니가 자유연애를 하는데 너희 신선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느냐. 수십년이나 잘못 가둬놓고는 사과조차도 하지 않고, 오히려 네게 감사하란 말이냐고 소리치는 것이다.
소청은 전체 <백사전>에서 유일하게 허선의 거세된 인성의 자유와 자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요괴이면서 사람보다 더욱 사람같다. 혹은 최소한 사람이 원래 가져야할 그런 모습을 지니고 있다.
다만, 이처럼 용기와 양식을 지닌 "여기사(女騎士)"는 <백사전>에서 결국은 조연이다. 주연은 시종 허선과 백낭자라는 생활에 대하여 공포를 가지고 애걸하는 남녀이다. 그들이 평생 유일하게 조금이라도 바라면서 노력하는 점이라면, 그저 신선과 법해에게 원래 그들이 가져야했던 것을 부여해주도록 부탁하는 것뿐이다.
다행히 청산은 가릴 수 없고, 강물은 동쪽으로 흘러간다. 현대사회에 들어선 후에 다시 여러번 개편을 겪는다. <백사전>은 마침내 우리가 오늘날 보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신백낭자전기(新白娘子傳奇)>에 이르러, 왕왕 백낭자 자오야즈(趙雅芝)와 소청 천메이치(陳美琪)의 당시 미모를 칭찬하지만, 실제로 만일 전통극과 비교해 본다면 기질의 변화가 가장 큰 것은 바로 예퉁이 남자로 분장한 허선이다. 예퉁은 개편후의 허선을 문약하지만 그래도 담량이 있고, 최소한 정의감을 가진 이미지를 잘 연기했다. 다시는 옛날 극에서처럼 거세되고 척추뼈마저도 없던 것같던 쓸모없는 인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바라건데, 이런 변화가 중국인의 국민성을 투영한 것이면 좋겠다. 바라건데, 우리가 앞으로는 더 이상 우리가 원래 가져야했던 권익과 자유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감사해하지 않게 되면 좋겠다.
두려움이 없고, 인격이 완전한 사람만이 대담하게 사랑을 추구할 수 있다.
이전의 <백사전>은 기실 주제가 사랑이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민족의 집단적 잠재의식중에 있던 공포였다. 서로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박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행복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앞으로는 그저 용기와 사랑만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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