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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조광윤의 죽음과 관련된 2명의 소인물

by 중은우시 2019. 1. 28.

글: 백가잡평(百家雜評)


중국역사상의 풍운인물로서 조광윤의 일생은 전설로 충만하다. 그는 여러가지 수수께끼를 남겼는데, 그중 가장 큰 수수께끼는 바로 그의 죽음이다.


976년 십월 십구일 밤, 조광윤은 동생 조광의를 불러서 술을 마신다. 다음날 새벽에 조광윤이 돌연사하니 향년 50세이다. 그러므로 조광윤의 죽음에대한 한 가지 소문은 바로 조광의가 모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윤은 조광의가 모살한 것일까? 이 궁정권력투쟁은 아마 영원히 진상을 밝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광윤은 병사인가 아니면 타살인가? 당시에 두 명의 소인물의 거동은 천고의 수수께끼를 남긴다.


조광윤의 죽음에 관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소문은; 촉영부성(燭影斧聲)이다. 소위 촉영은 누군가 멀리는 촛불 아래에 조광의의 그림자를 보았다는 것이다. 소위 부성은 누군가 곶광윤이 주부(柱斧)로 땅을 자르며 큰 소리로, "잘 했다." 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조광의가 도끼로 조광윤의 머리를 베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음 날 조광의는 유조(遺詔)를 받들어 황제에 오른다.


이 궁정변고에 대하여, 사마광은 <속수기문(涑水紀聞)>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이 술을 마신 후, 조광의는 황궁을 떠난다. 다음 날 새벽, 조광의는 급사한다. 이 기재를 보면, 마치 조광윤은 돌연하게 죽은 것이고, 최소한 조광의와는 관계가 없는 것같다.


역사의 진상은 도대체 어떠할까? 이 두 소인물의 거동을 살펴보면 아마도 답안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첫째, 태감 왕계은(王繼恩)이다. 황후는 조광윤이 죽은 것을 보고, 태감 왕계은에게 황자 조덕방(趙德芳, 조광윤의 넷째아들, 당시 18살)을 모셔와서 황제위를 계승하게 시킨다. 그런데, 왕계은은 조덕방을 찾아가지 않고, 조광의를 찾아간다. 그후 조광의는 황궁으로 들어가서 등극한다. 황후는 조광의를 보자 깜짝 놀라지만,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보고, 그저 조광의의 등극을 묵인한다.


둘째, 의관 정덕현(程德賢)이다. 사경때 왕계은이 조광의의 부저(府邸)를 찾았는데, 거기서 정덕현을 본다. 원래 조광의는 정덕현을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경때 왔고, 계속 진왕부(晋王府)에서 기다렸다. 후촉국의 맹창(孟昶), 남당의 이욱(李煜), 오월국왕 전숙(錢俶)은 모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정덕현에게 독살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마도 정덕현이 독약을 조광의에게 건네고, 조광의가 형에게 독을 쓴 것일 수 있다.


확실히, 이 두 명의 소인물의 이상한 행동을 보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황제의 신변에 있는 태감인 왕계은은 왜 조광윤의 아들을 찾아가지 않고 조광의를 찾아갔을까? 왜 의관 정덕현은 조광윤이 죽는 날 밤에, 조광의가 이경때 그를 불러서 만났을까? 확실히 독약의 발작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덕현을 통제해야할 필요가 았었을까?


이 모든 문제에 아직 답안은 없다. 오히려 조광윤의 사인에 대하여 더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단지 여기에 여전히 하나의 문제가 있다. 조광의가 만일 '황위를 찬탈'한 것이라면, 왜 조정의 상하에 아무도 나서서 반대하지 않았을까?


기실 아주 간단하다. 조광의와 조광윤의 관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좋지 않았었다. 첫째, 황제의 곁에 있는 왕계은 조차도 조광의의 사람이었다. 이를 보면 조광의의 암선(暗線)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둘째, 조광의는 개봉부윤으로 당시 이미 조광윤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그래서 조광윤이 천도하려 한 것이다. 그래야 조광의의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광의의 반발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만다. 그러므로, 조광윤은 중국에서 가장 우울한 개국황제라고 할 수 있다. 이연보다도 더 심하다.


당연히 경성의 상하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를 제외하고, 오대십국의 혼란과도 관련이 있다. 정권교체가 빈번하고, 성두변환대왕기(城頭變幻大王旗)하는 것을 대신들은 너무나 자주 봐 왔었다. 


결론적으로 조광윤이 왜 급사하게 되었는지 역사에서는 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기록된 이 두 소인물의 이상한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광의가 조정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조광윤이 50세에 돌연사한 것을 보면 "모살찬위(謀殺簒位)"가 아마 역사의 진상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비록 조광윤은 원인불명으로 죽었고, 울적하게 황제로 있었지만, 중화문명을 전성기로 끌어올렸다. 대가인 진인각은 이렇게 평가했다: "화하민족의 문화는 수천년간 변화해왔는데, 조송때 최고조에 달한다." 진인각의 눈에, 조광윤이 개창한 송나라야말로 중국문화의 최고봉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