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귀산야화(貴山夜話)2017
배경설명
1. 조광윤은 후주(後周)의 황제인 주세종(周世宗) 시영(柴榮)의 수하 애장(愛將)이었다. 주세종 시영은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시기에 가장 명망있고 업적을 이룬 일대군주이다. 민간의 평서, 화본에서는 시영과 조광윤이 일찌기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시영이 만일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다면, 오대십국의 혼란국면을 끝낸 것은 절대로 조광윤의 판도가 좁은 대송이 아니라, 시영의 대주였을 것이다. 대송왕조는 실력이 웅후한 후주르 평화롭고 완전하게 계승하고 개창했다.
2. 후주 현덕7년(960년) 정월, 주세종 시영이 죽은지 6개월이 지나다. 주세종 시영의 넷째아들이자 나이 겨우 7살인 시종훈(柴宗訓)이 영전에서 즉위했는데 그가 주공제(周恭帝)이다. 이제 고아과부, 주소국의(主少國疑)인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경전적인 사건의 일막이 이런 배경하에서 서막을 연다.
의문점 하나: 현덕7년 정월, 정말 거란이 북한(北漢)과 연합하여 대주(大周)를 공격하는 사건이 있었는가?
이것은 전체 "황포가신"사건의 최대의문점이다.
북송 설거정(薛居正)의 <오대사.주서.공제기> 및 사마광의 <속수기문(涑水紀聞)>을 종합하면, 현덕7년 정월 삭일(즉 음력 정월초하루), 마침 음력설날이고, 아직 주세종 시영의 장례기간중이지만, 대주의 문무백관은 여전히 법도에 따라, 나이 겨우 7살이고 즉위한지 겨우 6개월된 주공제 시종훈에게 '진명봉하(進名奉賀)'한다. 아침일찍부터 조당에 줄을 서서, 어린 황제를 향헤 조하정단(朝賀正旦)하고 있었다.
이때, 주나라조종은, 진주(鎭州), 정주(定州) 두 개주의 보고를 받는다: "거란이 북한과 합세하여 침입했다." <속수기문>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하다: "(조광윤)이 당시 귀덕군절도사, 전전도점검으로 주공제의 조서를 받아, 숙위군을 이끌고 막으러 갔다." "계묘일, 군대가 출발하고, 진교(陳橋)에서 숙박한다." 그리고 그날 밤에 장병들은 황포를 강제로 조광윤에게 입힌다. 억지로 그를 옹립하고, 후주의 도성 개봉으로 돌아온다. 북상하여 거란, 북한의 공격을 막는다는 일은 이후 흐지부지한다.
후주 현덕7년, 즉 대요 거란 목종 응력10년, <요사.목종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요목종은 응력10년 정월, 요나라 거란은 병력을 일으킨 기록이 없다. <요사>는 몽원정쟁으로 거란이 멸망한 후 218년에 작성되었다. 그러나 무슨 피휘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북한과 연합해서 대거 남하하여 후주를 공격했다면, 이렇게 큰 군사행동이 <요사>의 제왕본기에 절대 빠질 수는 없다.
이 이상한 거란이 북한과 연합하여 남하하고 후주를 공격했다는 군사행동에 관하여, 송나라사람들이 쓴 것은 등극과정에 필연적으로 언급한 것을 제외하면, 현재 같은 시대의 기타 정권인 서하, 후량, 후당, 후진, 후한의 역사서적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후주 및 나중에 평화적으로 승계한 대송의 역사에는 모두 확실하다는 듯이 대요거란이 현덕7년 정월 '본국'에 대하여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요거란은 억울하다. 그런 일이 없다. 나는 아예 모르는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외에 북송 설거정이 주편인 <오대사.주서.세종본기6> 및 재상 토토(脫脫)이 쓴 <요사.열전8.소사온>전의 기재를 분석해보면, 조광윤이 "황포가신"하기 6개월전에, 대요거란은 주세종 시영에게 형편없이 패배하여 원기를 크게 잃었다. 거란은 짧은 6개월만에 후주를 향해 이렇게 대규모의 군사행동을 일으킬만한 힘이 없었다.
원재상 토토가 쓴 <요사.소사온>전에는 "주주(周主, 후주세종 시영)이 다시 북침했다.....역,영,막등 주를 함락시키고, 경기인(요국도성 상경임황부)는 모두 깜짝 놀라서 왕왕 서산으로 도망가서 숨는다." 이 해(구체적으로는 후주 현덕6년 육월, 즉 대요거란목종 응력9년 육월) 나라가 상을
당했다는 것을 듣게 되고(즉, 주세종 시영이 붕어함), 연의 주민들은 안정되고, 군대를 되돌린다."
즉, 요나라는 주세종 시영에게 대패하였고, 거란인들은 후주가 다시 공격해 올까봐 걱정되어 속속 도망갔다가, 후주황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거란인은 비로소 안정되기 시작했으며, 소사온은 시영이 죽었으니 만사대길이라고 여기고, 군대를 되돌려 돌아갔다. 이런 상황하에서 거란이 남하하여 후주를 침범할 능력이 있었을까?
여기서 언급해야할 것은 <요사> 소사온전의 현덕6년 육월에 주세종 시영이 군대를 이끌고 거란의 역, 영등주를 함락시켰다는 기록은 <오대사.주서.세종본기6>의 기재와 일치한다.
여러가지 단서를 보면, 현덕7년 정월초하루, 후조조정이 거란이 북한과 연합하여 남하해서 침입했다는 경보는 거짓이다. 그 목적은 바로 조광윤이 황위를 찬탈하기 위함이다. 중병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는 충분한 이유와 기회를 잡기 위함이다. 조광윤이 '황포가신'한 후에는 북상하여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다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청나라때의 저명한 사학자 조기(趙冀)는 이런 명구를 남겨서 문제를 설명했다:
천추의안진교역(千秋疑案陳橋驛)
일착황포편파병(一著黃袍便罷兵)
천추의 수수께끼같은 사건의 진교역
황포를 걸치자마자 전쟁이 끝나버리네.
군대가 주둔한 지점을 선정한 것도 기가 막힌다. 즉 개봉성 밖에서 멀지 않은 진교역이다. 반나절이면 도성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의문점 둘: 한림학사 승지 도곡(陶穀)이 조광윤을 송별할 때, 행동거지가 아첨하고 괴이하며 말하는 도중에 '천기'를 누설했다.
조광윤이 명을 받아 계묘일에 출병하기 전, 당시 한림학사 승지이자, 신평사람인 도곡등은 송별연을 베풀어 준다.
남송 원문(袁文)의 <옹유한평(翁牖閑評)>의 기재에 따르면, 송별연때, 도곡의 조광윤에 대한 예절은 겸비(謙卑)하고 아첨해서, 아주 괴이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말이 많이 애매했다. 그는 마치 조광윤의 이번 길에 무엇이 발생할 지를 알았던 것같다. <옹유한평>의 기재에 따르면, "북정, 아직 가기 전에, 여러 사람이 송별연을 방림원에서 열었다. 도곡은 치배(致拜)를 고집하고, 말하기를 '돌아오면 더 이상 읍작(揖酌)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도곡은 조광윤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려 했을 뿐아니라, 당신이 돌아온 후에는 우리가 다시는 이렇게 마주 마시지 못하고 나는 다시는 당신에게 읍을 하는 평례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자의 경박함과 미리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은 정말 놀라울 정도이다.
주목해달라. 이 도곡이 나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문전 셋: 시간도 없었는데, 그 유명한 황포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늘까?
어떤 사람은 그저 황색의 옷감을 조광윤의 몸에 걸쳐서 시늉만 했다고도 말한다. 어디에서 오조금룔(五爪金龍)을 정교하게 자수를 놓은 옷감을 가져온단 말인가. 그러나 명황(明黃) 옷감만 하더라도 황실 전용이다. 누구든지 함부로 휴대하면 그 자체로 살신지화를 부른다. 이것은 그러나 등극의 시작이다. 시씨천하를 자기에게 명의이전하려는 음모를 꾸민지 오래된 조광윤으로서는 황포같은 걸 갖는데 뭐 미안해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남송 왕칭의 <동도사략>과 남송 이도의 <속자치통감장편>의 기록에 따르면, 계묘일 조광윤이 병력을 이끌고 출발하는 날, 선휘사(宣徽使) 잠거윤(昝居潤)이 그를 위해 송별연을 할 때 조광윤은 술에 취했다. 밤에 진교역에서 숙박할 때, "술에 취해서 각의 안에 있었고, 깨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바깥에서 장병들이 소리치고, '점검"을 천자로 옹립하는 사정(조광윤은 후조의 전전도점검이다)을 조광윤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모든 것은 그의 동생이고 당시 '내전저후공봉관도지'였던 조광의(趙光義) 그리고, 조광윤의 심복이자 당시 귀덕절도사 장서기인 조보(趙普)가 처리한 것이다.
갑신일 여명이 되어, 즉, 병력을 출발시킨 다음 날 새벽이 되어, 장병들이 조광윤을 천자로 옹립하자는 말이 벌써 "들판을 뒤흔들었다." 이대 동생 조광의와 장서기 조보가 들어가서 조광윤에게 어찌된 일인지 알린다. "놀라서 일어나 옷을 입고 아직 응대도 못했는데, 부측해서 대청으로 모시고 나와 황포를 몸에 입힌다. 그리고 절을 하며 만세를 외친다." 이를 보면, 저명한 황포가신은 일찌감치 준비된 것이었다.
주의할 것이 있다. 송별때 조광윤이 술에 취하게 만든 그 선휘사 짐거윤이 뒤에 마찬가지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문점 넷: 누가 조광윤을 위하여 성문을 열어주었는가?
남송 이도의 <속자치통감장편>의 기록에 따르면, 진교역에서 이미 황포가신한 조광윤은 사람들의 뜻을 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중요한 발언을 한다: "너희들이 스스로 부귀를 탐하여, 나를 천자로 세웠다. 나의 명을 듣겠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의 주군이 될 수 없다." 여러 장병들이 모두 표시한다. 조광윤의 명이라면 무조건 따르겠다고. 그리하여 조광윤은 여러 장수들과 2가지를 맹세한다.
1. 주공제, 선의황태후 부씨 및 주나라조정의 여러 대신들을 잘 대해준다. 능욕해서는 안된다.
2. 도성에 들어간 후, 살인약탈방화는 허용하지 않는다.
이상의 두 가지를 어기면 "너를 족주(族誅, 일가족을 주살하는 것)하겠다"
이어서 "전체 군대가 인화문(仁和門)으로 들어오고, 추호도 법을 어기지 않았다." 이를 보면, 조광윤이 병력을 이끌고 황성에 들어간 문은 바로 "인화문"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는다.
문제는 조광윤이 주공제의 명을 받들어 북상하여 적을 막으러 갔다. 현재 외적과 싸우기도 전에 조정의 명령도 없이 군대를 되돌려서 중병을 황성아래에 주둔시켰는데, 그는 무엇을 하려 했는가? 그리고 누가 이렇게 묵계가 있어 그를 위해 성문을 열어주었는가?
아마도 남송 이도가 <속자치통감속폄>을 저술할 때 이러한 상황의 변화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는 그래서 한 장면을 추가한다. 동생 조광의과 장서기 조보가 밖에서 조광윤을 천자로 옹립하는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동생 조광의는 이미 위대군사(衛隊軍使) 곽연윤(郭延贇)으로 하여금 도성으로 되돌아가서 그날 밤에 진교역에서 있었던 상황을 전전도지휘사인 준의 사람 석수신(石守信)과 전전도우후 낙양사람 왕심기(王審琦)에게 통보하도록 했다. "석수신, 왕심기는 모두 일찌감치 조광윤에게 마음이 돌아간 사람들이다. 장병들이 둥글게 열을 지어 새벽까지 기다렸다." 이를 보면 '장병들이 둥글게 열을 지어 새벽까지 기다렸다.'는 것은 조광윤이 병력을 이끌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속자치통감장편>의 이 장면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교에서의 성공여부를 불문하고, 모두 도성으로 달려가서 알릴 필요가 있었다. 안에서 호응할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할 지를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진교에서 성공하면, 너희가 성문을 열고 조광윤을 맞이하여 성안으로 들여보내야 할 것이고, 만일 진교에서 황포가신을 하지 못하게 되면,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조광윤은 계속 북상하여 적을 막아야 한다.
다만, 사전에 미리 얘기해놓지 않았다면, 그리고 충분한 자신이 없었다면, 석수신과 왕심기가 이렇게 빠른 시간내에 그리고 아주 기꺼이 중대한 사태에 참여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을까? 일단 실패하면 이는 구족을 멸할 대역죄인데...
의문점 다섯: 비록 병변이 급작스럽게 일어났지만, 주공제 시종훈이 조광윤에게 선양하는 조사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황포가신의 조광윤은 그날 저녁 장병들에 의하여 옹립되어 도성으로 돌아온 후, 재상 범질(范質), 왕부(王溥)등은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보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다. 서로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마침내 조광윤을 숭원전(崇元殿)으로 모셔서 "선양"의 예를 행한다. 그 후에 백관들이 열을 지어 참배한다.
규구(規矩)가 없으면 방원(方圓)을 그릴 수 없다. 나이 겨우 7살의 주공제 시종훈ㅇ이 만일 '선양조서'를 조광윤에게 내리지 않으면 천하의 명의이전절차는 성립되지 않는다. 조광윤은 평생 절차에 문제가 있어서 황위를 정당하게 얻은게 아니라는 오명을 남기게 될 것이다.
<속자치통감장편>의 기록에 따르면, 백관들이 열을 맞춘 후, "오직 주공제의 선양조서가 없었다." 이때 한림학사 승지, 신평사람 도곡(일찌기 조광윤을 송별할 때 행동거지가 아첨하고 말이 애매했던 그 사람)이 적시에 나선다. 그리고 조용히 소매에서 주공제의 '선양조서'를 꺼낸다. 그리고, "이미 조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그후에 읽는다. 선휘자 고당사람 잠거윤(조광윤이 병력을 출발시키던 날 조광윤을 술취하게 한 사람)은 조광윤을 용서(龍墀) 북쪽으로 모셔가서 절을 받게 한다. 조광윤은 이렇게 정식 등극하니, 송왕조가 개창된 것이다.
아무리 글재주가 있더라도 선양조서를 어찌 금방 만든다고 만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도곡이 조광윤을 송별할 때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조광윤이 진교역에서 도성으로 돌아온 후에는 더 이상 동급으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것을 조광윤에 대하여 '읍'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는 시간이 충분했다. 사전에 조광윤을 위하여 '선양조서'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큰 공이다.
그는 원래 한림승지로 조서를 쓰는 것이 본연의 임무였다.
<속자치통감장편>에 기록된 또 하나의 장면은 당시 주왕조대신들이 조광윤의 "진교병변"에 대한 '첫느낌'을 말해준다.
조광윤이 병력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온 후, 재상 범질과 왕부는 아직 조조(아침조회)에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는 범질이 급히 계단을 내려가, 왕부의 손을 잡고 말한다. "황급히 장수를 보내다니, 우리들의 죄입니다." 우리는 재상이면서, 북방의 군사동향의 진위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황급히 조광윤에게 병력을 이끌고 나가게 해서, 오늘의 병변이 일어난 것이니, 바로 자신들의 죄라는 것이다.
<장편>에는 또한 경황이 없다보니 범질이 왕부의 손을 너무 꽉 잡아서, 손톱이 왕부의 살을 파고들었다고적었다. 그래서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범질의 자책하고 후회하는 말을 들으면서 왕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범질, 왕부 두 재상은 모두 조광윤이 일찌감치 음모를 꾸며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재상으로서 이 지경이 되어서야 깨달았으니, 후회막급인 것이다.
이상의 다섯가지 의문점에 비추어보면 소위 "황포가신"이 엄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사건을 살펴보면 계묘일에 병력을 이끌고 나가서, 여러 장수들이 황포가신하고, 밤을 새워 도성으로 돌아오고, 다시 을사일 신시(오후 3-5시)에 선양조서를 잃는다. 조광윤은 북면에서 절을 받고, 황제로 정식등극한다. 기껏해야 48시간만에 시씨천하가 조씨천하로 바뀐 것이다. 이는 행운유수 일기가성(一氣呵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체 과정동안 단지 태원사람 한통(韓通)과 그의 처, 자식 3명만 죽였을 뿐이다. 한통은 당시 후주정권의 천평절도사, 동평장사, 시위마보군부도지휘사였다. 그는 내정에서 대세가 좋지 않다고 보고 황급히 달려나가 무리를 이끌고 결사저항을 하려 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조광윤의 휘하대장인 낙양사람 왕언승(王彦昇)과 도중에 만난다. 왕언승은 한통을 집까지 쫓아가서, "한통과 처, 자식을 죽였다."
마지막으로 진교역에 걸려 있는 대련으로 본문을 마칠까 한다:
진교병변전송대기업(陳橋兵變奠宋代基業)
황포가신정조씨건곤(黃袍加身定趙氏乾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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