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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조광윤은 주세종의 아들들을 어떻게 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18. 12. 2.

글: 왕국동(王國棟)


960년, 조광윤은 진교병변으로 후주(後周)의 강산을 빼앗아 북송(北宋)정권을 건립했다. 그러나 후주세종 시영(柴榮)의 가족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그의 큰 난제였다.


주세종 시영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시종의(柴宗誼), 차남 시종성(柴宗誠), 삼난 시종함(柴宗諴)은 모두 시영의 생전에 후한(後漢)의 은제(隱帝) 유승우(劉承佑)에게 살해된다. 이들은 사후에 각각 월왕(越王), 오왕(吳王), 한왕(韓王)에 추봉된다. 이는 곽위(郭威)와 시영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이다. 후한은제 유승우는 곽위와 시영의 가족들을 죽였고, 결국 곽위는 자식이 없게 된다. 결국 주세조(周世祖) 곽귀가 천하를 빼앗고도 황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어서, 부득이 외조카인 시영에게 황위를 넘기게 된 것이다


시영의 사남은 바로 후주공제(後周恭帝) 시종훈(柴宗訓)이다. 생모는 대부황후(大符皇后)이고, 계모는 소부황후(小符皇后)이다(주세종 시영의 두 황후는 친자매간이다). 진교병변때 그의 나이 겨우 7살이었다. 1년간 황제위에 있다가 조광윤에게 선위(禪位)한다. 당시 조광윤은 시영의 결의형제의 명목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시영은 생전에 조광윤에게 잘 대해 주었었다. 그래서 조광윤은 시종훈에게 독수를 쓰지 않았다. 시종훈을 정왕(鄭王)을 강등시켜 봉한 후, 방주(房州)로 옮겨 거주하게 했다. 거기서 왕야로 편안히 살 수 있었다. 조광윤은 시종훈에게 "단서철권(丹書鐵券, 免死金牌)"을 내려, 시종훈의 자손이 부귀영화를 주리고, 설사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처벌받지 않게 해준다. 그러나 시종훈이 자라서 성인이 된 후에 조광윤에게 자신의 강산을 빼앗긴 것을 가슴에 품지만 시국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우울증이 병이 되어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향년20세이고, 자식을 두지 못했다.


시영의 오남은 시종양(柴宗讓)이다. 일명 시희양(柴熙讓) 혹은 영희양(寧熙讓)이다. 시영의 생전에 좌효위상장군(左曉衛上將軍)을 받고,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진다. 시종훈이 즉위한 후에는 조왕(曹王)의 작위를 받는다. 진교병변때, 시종양의 외가인 영씨(寧氏)는 상황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몰래 그를 궁밖으로 데려나가 성과 이름을 숨기고, 보통사람으로 생활한다. 조광윤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시종양은 성을 녕으로 바꾸고, 이름을 희양으로 개명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의 유명한 은사(隱士)인 진박(陳搏)의 제자가 되고, 이름을 시명황(柴明皇)으로 고치고 호를 충이(蟲二)로 하였다고 한다. 송진종시기까지 살다가 죽는다. 향년 53세이다. 아들 시소영(柴少嬰)이 있고, 현재 강서 길안시 영풍현의 시씨들의 개산비조이다(이 갈래의 시씨자손은 정사에서 시영의 후손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시영의 육남은 시희근(柴熙謹)이다. 기왕(紀王)에 봉해졌다. 진교병변때 유아였다. 조광윤은 주위의 심복들에게 시희근을 어떻게 처리할지 물어보니, 어떤 사람은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장 반미(潘美)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궁의 기둥을 쳐다보며 멍하니 있었다. 조광윤은 그에게 왜 그런지 물어보니, 반미가 대답한다: "선제께서 저에게 박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만일 저에게 그의 아들을 죽이라고 할까봐, 마음이 불안합니다. 만일 제가 시희근을 죽이지 않으면, 폐하께서는 저의 충성심을 의심할테니 제가 말을 감히 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광윤은 그의 말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시희근을 반미에게 넘겨 부양하게 한다. 그리고 평생 그에 대하여 다시는 묻지 않았다. 반미는 시희근을 반유길(潘惟吉)로 개명하고, 자신의 아들처럼 길렀다. 다만 그가 자신을 부친으로 부르지는 못하게 하고, 숙부라고 부르게 했다. 나중에 반유길은 관직에 나가서 지방관리가 되어 백성들에게 잘해준다. 그리하여 송진종으로부터 칭찬을 듣는다. 반유길은 1010년에 죽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영의 후예는 반유길의 갈래뿐이다.


시영의 칠남은 시희회(柴熙誨)이다. 원래 이름은 시종형(柴宗炯)이다. 기왕(蘄王)에 봉해진다. 진교병변때 막 태어난 영아였다. 반란에 참가한 시위들이 조광윤의 마음을 헤아려, 기왕(紀王)과 기왕(蘄王)을 붙잡아서 죽이고자 한다. 두 어린아이는 대경실색하여 곡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그 참상은 노염(盧琰)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노염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송태조 조광윤에게 간언한다: "요순은 선양받고 주균을 죽이지 않았는데, 지금 후주의 선양을 받으시고 어찌 그 후손을 남기지 않으시려 합니까?" 대장 반미도 대답한디: "신이 어찌 감히 안된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이치에는 맞지 않습니다." 송태조는 소기왕과 소기왕을 다시 데려오게 한다. 그리고 반미는 소기왕(小紀王)을 안고 가고, 노염은 소기왕(小蘄王)을 안고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나중에 노염은 시희회의 이름을 노선(盧璇)으로 고치고, 양자로 삼는다. 그가 성년이 된 후에는 자신의 딸 노금(盧錦)을 그와 결혼시켜, 양자이며 사위가 된다.


노선은 계속하여 양부 노염과 함께 절강에 은거한다. 노염이 사망한 후, 노선은 10년상을 지내서 미담으로 남는다. 송진종때, 노선은 관직에 올라 무열후(武烈侯)에 봉해진다. 지금의 절강성 영강, 무의, 동양, 선거, 진거, 포강, 강유등의 현시에 있는 노씨자손들은 모두 노선을 개산비조로 보고 있다.


그외에 부득이 언급해야할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시영의 부친인 시수례(柴守禮)이다. 진교병변때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래서 조광윤이 주목하게 된다. 다행히 시수례는 시무를 알아서, 조광윤이 등극하여 황제를 칭하는 것에 찬성함으로써 화를 면한다. 비단 그뿐아니라, 조광윤은 시수례에게 예우를 잘 해주어, 하반생을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었다. 967년, 태자소부의 관직을 가지고 사망한다. 시수례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고, 모두 후손이 많았다. 그의 자손은 후주공제 시종훈의 봉작을 이어받는다. 그래서 양송때 말하는 시씨후인은 기본적으로 모두 시수례의 자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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