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춘지와(春之蛙)
263년, 위나라는 대장 등애(鄧艾)를 파견하여 촉한을 정벌한다. 위군의 기세가 대단하여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금방 성도성 아래까지 간다. 그러나 촉한정권이 멸망하려 할 때, 서남지구에 있는 오랑캐족부락은 왜 병력을 보내어 촉국을 구원해주지 않았을까? 오히려 두 눈 멀거니 뜨고 촉한정권의 멸망을 지켜봤을까?
먼저, 촉한정권의 멸망은 두 단계로 나뉘어진다: 제1차는 유선이 등애의 군이 성도에 도착했을 때 성문을 열고 투항한 떄이고, 제2차는 강유가 종회(鍾會)를 부추겨서 익주의 독립을 시도하다가 패전하여 피살된 때이다. 등에의 군이 제갈첨의 군을 격파하고 성도에 도착했을 때, 기실 유선의 수하는 분명 2만 내지 3만의 병력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수성의 유리함에 강유가 한중 검각일대에 주둔시킨 수만의 병력을 합치면 촉한정권은 최소한 7,8만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실력은 비록 위나라 대군을 최종적으로 막아낼 정도는 아니겠지만, 절대로 손쉽게 빨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촉한의 제1차멸망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력으로 점령당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유선이 투항을 선택한 것이다.
촉한시기, 서남지구는 아직 개화되지 않은 지구이다. 촉국의 변방지구는 많은 부락이 분포해 있었다. <삼국연의>에서는 서술의 편의를 위하여, 맹획을 남만지구의 통일수령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 서남지구는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락간에는 연맹관계가 없었다. 서남지구는 길이 험하고 밀림이 분포되어 있어서, 매 부락은 그저 자신의 주변비구만 통치했을 뿐이다. 매 산동에 흩어져 있는 동주(洞主)야말로 씨족사회의 통치자이다. 그러므로 남마부락은 통일된 부락연맹이 아니었다.
위나라군대가 성아래에까지 다가왔을 때, 맹획은 설사 촉한의 은정을 생각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남만부락의 수령이 아니다. 출병하여 구원해주고 싶어도, 반드시 다른 부락과 연맹하여 공동으로 출병해야 했다. 생사존망의 순간에 부락이 너무 많아서, 각각의 수령은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므로, 아예 출병하는데 동의할 가능성이 없다. 그리고 당시 남만부락은 단지 촉한에 의부(依附)하고 있을 뿐, 촉한정권의 군현체제의 일부분은 아니었다. 촉한은 그저 '이이제이'의 책략으로 관할했을 뿐이다. 만족이 촉한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을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촉한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므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명목상의 주군을 구해주는 건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촉한이 삼국중 하나로서, 법리상 멸망의 기준은 당연히 유선이 위에 투항한 때일 것이다. 맹획이 역사상 존재했는지 여부는 아직 더 연구해야 한다. 다만 남중(南中)의 만족(蠻族)은 촉한의 내신(內臣)이 아니라, 외번(外藩)이라 할 수 있다. 촉한의 사실상의 '번국(藩國)'으로서 만일 천자가 조서를 내려 근왕(勤王)을 명했다면 출병에 명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선은 천자이면서 먼저 투항을 했는데, 외번이 무슨 이유로 싸우러 간단 말인가. 구하러 갔다가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도 없이 신왕조에 죄를 짓는게 된다. 구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아주 난감하다. 천자는 너를 부르지도 않았는데. 뭐하러 왔느냐는 것이다.
기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족 자신의 실력이 아예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북방에서 생활하는 유목민족처럼 아주 강한 전투력을 지니지 못했다. 서남의 만족은 원시사회와 노예사회에 처해 있으며, 생산력이 아주 낮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에는 무기가 필요하다. 만족의 야금기술은 높지 못해서, 장비가 우선 좋지 않았다. 대규모의 조직적인 중원군대를 상대하여 중원지역에 와서 작전을 벌이면 승리할 가능성이 아주 낮다. 그리고 남만에서 촉한까지는 거리가 머라. 만족의 병력운송능력은 아주 박약하여 성도에 도착할 때쯤이면 촉한이 몇번이나 멸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럴 의사가 있었을까? 제갈량이 남정한 이후 취한 통치방식은 직접 현지부락의 귀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통치하는 것이었다. 촉한조정이 직접 관리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촉한에 대한 충성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제갈량의 남정 이전에도 비록 한왕조에 명목상으로는 속해 있었지만, 실제로 한왕조는 효과적인 통치와 관리를 한 적이 없다. 그저 그들이 반란만 일으키지 않고, 골치만 썩이지 않으면 감사할 일이었다. 더더구나 대규모의 개발이나 생산력기술의 개조는 진행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원시시화와 노예사회에 처해 있고, 생산력수준이 아주 낮았다. 그래서 그들은 중원에서 온 조직화된 군대와 싸울 수준이 되지 못했다.
촉한정권은 외래의 군사식만정권이므로, 파촉지구에서 오랜 시간 머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제갈량과 강유는 모두 북벌로 중원지역을 탈취해서 천하통일하고자 한 것이다. 계속하여 궁병독무(窮兵黩武)하고, 촉한의 영토는 그다지 확대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촉한의 통치계급은 분화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집단이 나타난다. 게다가 태감 황호(黃皓)가 권력을 농단해서, 촉한에서 북벌로 중원을 차지하려고 생각한느 사람도 이미 많지 않아졌다. 그러므로, 조위가 성도로 진공할 때, 유선의 첫번째 반응은 바로 투항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그렇게 했다. 만족이 와서 구원해주지 않은 것은 아마도 유선이 아예 만족에게 와서 구해달라고 성지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촉한의 군신이 그들에게 구원해줄 시간과 기회를 주었을까? 등애가 음평으로 몰래 넘어온 후, 촉한이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저항한 것은 면죽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자, 촉한은 더 이상 효과적이 저항을 조직하지 못한다. 등애의 군대가 성도에 도착하자, 소식을 듣고 신속히 회군한 강유가 성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촉한군신은 이미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더구나 남방의 밀림에 있던 만족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남방부락이 성도로 구원병을 보내지 않은 것은 첫째, 그들이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둘째, 그들이 가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럴 능력이 없었고, 셋째, 그들이 그러기를 원하고 그럴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촉한군신은 그들에게 그럴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맹획등 만족은 촉한을 지켜야 겠다는 생각이 아예 없었다. 양자는 계속하여 갈등관계였고 가끔 전쟁도 일어났었다. 그래서 촉한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인화(人和)"를 잃은 것이다. 다음으로 위군은 세력이 크고, 병력도 정예이며 군량미도 충분했다. 음평은 이미 무너지고 그들은 촉한을 구할 수 없다. 이것은 "지리(地利)"를 잃은 것이다. 촉한은 이미 내우외환이고 유선이 남중으로 도망치기에는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것은 "천시(天時)"를 잃은 것이다. 그래서 맹획등 남방부락은 촉한을 구해줄 수 없었다.
남만부락은 천하통일의 야심도 없고, 그들은 그저 그들의 땅만 지키고 살면 되었따. 촉한이든 조위이든 만족은 자신의 땅만 잃지 않는다면, 명목상의 두목이 바뀌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촉한이 멸망할 때, 맹획등 남만부락은 구원하러 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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