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공자)

중국제일가족: 2천년간 이어내려온 공자후손

by 중은우시 2019. 1. 17.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1


1920년 2월 23일, 곧 태어날 영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체 곡부(曲阜)는 임전태세였다.


이전 3개월, 공자의 제76대적손이자 동시에 제30대 연성공(衍聖公) 공령이(孔令貽, 1872-1919)가 돌연 북경에서 사망했다. 향년 47세였다. 복송때부터 세습하여 '연성공'을 맡아온 집안으로서 '연성공'은 공자의 적계 남자자손만 계승할 수 있는 작위이다. 공령이는 생전에 딸만 둘이 있었다. 유일하게 희망을 건다면 공령이의 소첩인 왕씨(王氏)가 이때 임신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왕씨가 곧 낳을 아이를 빼앗길까봐 즉 제31대 연성공이 될 수도 있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당시 북양정부 총통 서세창(徐世昌)은 군대ㅡㄹ 보내어 공부와 산방(産房)을 포위했다. 그리고 장군을 한명 보내어 공부(孔府)에 주재하게 한다. 당시 산동성 성장이던 굴영광(屈映光)과 맹자, 안회, 증자 삼씨(三氏)의 봉사관(奉祀官)들도 역시 현장에 나와서 감독하고 있었다.


영아가 순조롭게 태어나고, 사내아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체 곡부성은 진동을 한다. 그후 곡부성은 폭죽을 터뜨리고, 북양정부도 명을 내려 곡부에서 13발의 예포를 쏘아 '성예불철(聖裔不轍)'을 축하했다.


같은 해 6월, 공덕성(孔德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아이는 태어난지 백일만에, 당시 중화민국 총통인 서세창의 특별명령으로 강보에 쌓인 상태로 제31대 연성공이 된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이다.


2


공덕성이 태어났을 때, 공자가족은 세계에서 연속하여 세습된 기간이 가장 긴 귀족가족이었다. 이미 2000여년간 존속하고 있었다.


이는 왕조교체와 강산변혁을 초월한 세습귀족이다.


기원전219년, 진시황이 동순할 때, 특별히 공자의 9대손 공부(孔鮒_를 노(魯)의 문통군(文通君)으로 삼는다. 문통군은 그저 명예칭호이지 공자를 제사지내는 전문적인 봉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진시황은 공자의 적계자손을 봉상하는 선례를 열었다.


한고조때, 유방은 기원전195년 노의 땅을 지나면서, 다시 공자의 9대손 공등(孔騰, 공부의 동생)을 '봉사군(奉祀君)'으로 임명하고, 전문적으로 공제의 제사업무를 맡게 한다.


한원제에 이르러, 기원전43년, 한원제는 다시 공자의 13대손 공패(孔覇)를 태사(太師)로 임명한다. 그리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내리고 식읍8백호를 주며, 포성군(褒成君)이라는 호를 내리며, 식읍으로 공자의 제사를 지내게 한다. 이는 공자후예에게 세습작위를 주어 제사지내게 한 시초가 된다.


한무제때 파출백가, 독존유술한 이후, 공자가족의 지위는 점점 더 올라간다. 그후에 역대왕조가 모두 존경하는 귀족세가가 된다. 북송에 이르러, 북송은 당나라중기이후 군인할거의 상황을 막기 위하여 극력 '숭문억무(崇文抑武)'정책을 집행한다. 이런 배경하에서, 1055년, 송인종은 정식으로 공자의 46대손 공종원(孔宗願)을 연성공에 봉한다. 그후 연성공이라는 이 세습작위봉호는 북송, 금과 남송, 원, 명, 청, 중화민국을 거쳐 계속 31대나 이어졌다. 즉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때 이미 800여년간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송나라때, 연성공은 팔품관(八品官)이었다. 원나라대는 삼품(三品)으로 올려주고, 명나라초기에는 일품(一品)문관이 된다. 그후에는 다시 "문관의 으뜸"이 된다. 청나라때는 특별히 자금성에서 말을 탈 수 있고, 어도(御道)를 지나갈 수 있게 허용한다. 역대 연성공이 거주하던 연성공부(衍聖公府, 즉 孔府)는 전국에서 명청황궁의 바로 다음가는 대저택이었다. 세습작위를 받는 귀족세가로서 공자의 적계가족이 누리는 존경과 혁혁함은 자고이래로 최고였다.


3


비록 후세에는 지위가 혁혁해 졌지만, 공자가족이 처음에는 인정조령(人丁凋零)했다.


공자부터 공자가족은 7대를 연속하여 독자로 이어졌다. 제8대 공겸(孔謙)이 비로소 세 아들을 낳는다. 동한 한장제시기에, 공자가족중 20세이상의 남자는 겨우 60여명이었고, 이때는 공자(기원전551-기원전479)로부터 이미 500년이 흘렀다.


설사 당나라말기라 하더라도 당시 오늘날 산동 곡부일대에 정착해 있던 공자후예는 겨우 10호 가량이다. 그러나 오대십국이후 공자후예는 대거 늘어나기 시작한다. 곡부의 정통의 집안에 있는 인원이 급증했을 뿐아니라, 외지로 나간 공씨인구도 점점 늘어난다.


공자가족의 전설 가운데, 공자가족이 흥성하게 된 전환점은 사람이 깜짝 놀랄만한 멸족도살사건과 관련이 있다.


후량 건화3년(913년), 오대십국의 난세에 공자가족의 세습노비의 후예인 공말(孔末, 원래는 劉씨인데 공자가족을 따르며 성을 공씨로 고쳤음)은 공자후예가 누리는 영화부귀를 보고는 욕심을 품는다. 그리하여 폭도를 이끌고 곡부에 거주하던 공씨가족을 도살하여 멸문시킨다. 역사에서 "공말난공(孔末亂孔)"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당시 공자의 제43대 적손 공인옥(孔仁玉)은 겨우 생후9개월이었는데, 마침 외할머니댁에 가 있는 바람에 화를 면한다.


공자의 적계자손이 멸문된 후, 공말은 공자의 적손을 사칭하며 사기를 치기 시작한다. 17년후에 후당의 당명종 장흥원년(930년), 누군가 공말이 공자의 후손을 사칭한 건을 조정에 고발한다. 사실확인을 해본 결과 후당의 조정은 공말을 주살하고, 17살된 공인옥이 곡부의 공부로 돌아온다. 공인옥은 이로 인하여 공씨가족의 '중흥조(中興祖)'가 된다.


비록 역사,고고등 자료에서는 '공말난공'사건의 진실성에 대하여 의문이 있지만, 공인옥이 공씨집안을 진흥시킨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그후 원나라전기 공자53대손까지 공자의 적계자손은 이미 84명에 달한다. 상하몇대를 합치면 모두 334명이다. 오대십국이전과 비교하면 공자가족은 1쳔년간 발전했지만 여전히 인원이 많지 않았는데, 오대십국의 제43대적손 공인옥때부터 시작하여 공자가족의 인구는 대발전을 이루게 된다.


명나라 57대손에 이르러 공자가족의 인원(여성은 포함하지 않음)은 이미 만명을 넘어 섰다. 청나라 건륭연간에 공자후손은 10만명을 돌파한다. 민국시대에는 이 숫자가 다시 56만명으로 늘어났다. 현재, 공자후손은 이미 400여만명이다. 그리고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고, 한국에만도 7만여명에 이른다.


4


왕조도통(道統)과 국가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서, 공자가족은 난세에 전패류이(顚沛流離)할 수밖에 없었다.


북송 정강지변후 1128년, 공자의 48대적손인 '연성공' 공단우(孔端友)가 공씨가족을 데리고 공씨집안의 '세전진보(世傳珍寶)'인 공자부부해목상(楷木像)과 화상(畵像)을 가지고 송나라황실과 함께 남쪽으로 이주하여 절강성 구주(衢州)로 간다. 다음해인 1129년, 송고종은 공단우가 구주에 공부, 공묘를 짓는 것을 비준한다. 이것이 바로 공씨남종(孔氏南宗)의 시작이다.


이와 동시에, 국가도통의 정통성을 차지하기 위하여, 여진인이 건립한 금나라는 공단우의 동부이모(同父異母)의 동생 공단조(孔端操)로 하여금 연성공을 맡아 곡부공묘의 제사를 주관하게 한다. 이것이 공씨북종(孔氏北宗)의 시작이다. 이때부터, 공씨가족은 남북종의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후, 공자가족의 남북종다툼은 쿠빌라이가 결정을 내려야 하게 되었다. 당시 쿠빌라이는 원래 가장 적계정통인 공자53대적손이자 남종의 연성공인 공수(孔洙)로 하여금 산동 곡부로 돌아오도록 하려 했다. 이렇게 하여 공자가족의 연성공 남북종다툼을 끝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 공수는 스스로 나서서 말한다. 공자남종은 당시에 절강 구주에서 이미 5대나 내려왔고, 조상을 모시고 있으므로(제48대,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그 자신은 차마 선조를 버리고 떠날 수가 없다. 하물며 북종 공씨가족도 어쨌든 적계자손이고, 난세에 곡부의 공부와 공묘를 지킨 공로가 크니, 자신은 남종연송공의 봉호와 작위를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공자가족의 남북종다툼은 끝이 난다.


당시 연성공이 누리던 세습영화부귀는 만만치 않았다. 천하의 다른 가족들은 꿈에도 그리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공수는 스스로 포기하다니 쿠빌라이는 이를 보고 감탄한다. 그는 공수가 "차러리 부귀영화를 버릴 지언정 조상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니 정말 연성공이다."라고 칭찬한다.


나중에 공자남종자손이 북종과 다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쿠빌라이는 특별히 안배하여 사람을 시켜 구주공씨남종 가규(家規)를 제정하여 남종공묘가묘에 걸어두게 한다. 공자북종의 곡부자손이 연성공을 세습하는 것은 바꿀 수 없다. 만일 남종자손이 함부로 분쟁을 일으키면 중벌에 처하겠다.


5


드어마 돈바다볻늬 전패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화국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1935년, 민국정부는 결의를 내놓는다: 일체의 봉건작위를 폐지한다. 그리고 '연성공' 공덕성의 작위는 '대성지존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으로 고친다; 일찌감치 몰락한지 오래 된 공자남종, 절강 구주의 공자적계자손은 '대성지성선사남종종사관(大成至聖先師南宗奉祀官)'으로 임명한다.


중국도통의 상징인 연성공을 차지하기 위하여, 일본인은 항전이 전면적으로 발발하기 전날, 여러번 사람을 곡부로 보내어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을 일본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중국의 '도통'을 지키기 위하여, 1937년 12월, 곡부가 함락되려 할 때, 장개석은 특별히 국군72사단의 손동훤(孫桐萱)을 파견하여, 당시 이미 17살이 된 공덕성을 곡부에서 빼내와 보호한다.


공덕성이 공부를 떠난지 2시간후에 일본군은 곡부 공부를 점령한다.


나중에 공덕성의 당제(堂弟)이자 같이 공자의 77대손인 공덕용(孔德墉)은 이렇게 회고한다. "지금 보니까, 장개석이 좋은 일을 한 것이다. 만일 공덕성이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면,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다. 최소한 그를 일본에 납치해갔을 것이고 공자를 모시는 것은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다."   


중화문명의 상징인 곡부 공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하여 일찌감치 일본군은 곡부를 점령하기 전에 결정했다. 일본 동경대학 교수인 다카다 신지(高田眞治)는 일본군부에 이렇게 말한다:


"산동작전에서 만일 곡부의 고적을 파괴하면 일본은 세계문화유산을 파괴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본군부는 특별히 전선부대에 명령하여 곡부일대의 전투에서 일본군이 공묘를 점령한 후, 다른 곳에서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지만, 시종 곡부의 공묘는 건드리지 않았다.


곡부의 현지백성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곡부가 함락된 기간동안, 일본군은 공부의 자동차만 보아도 절을 했고, 민간주택에 들어갔다가 공자의 초상만 보여도 절을 했다.


곡부가 함락된 동안 부친 공령욱(孔令煜)을 모시고 함게 공부를 지켰던 공덕용은 이렇게 회고한다:


"120명의 일본군이 공부를 점령했다. 그들은 공부내에서는 비교적 착실하고 규율을 지켰다. 공부건물에 '내택, 지보(內宅, 止步)'라는 글자를 붙여 놓았고, 만일 상급의 지시가 없으면 일본군은 함부로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한 소장을 접대한 바 있는데, 그는 나의 윗자리에 감히 앉지 못해서, 내가 윗자리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스스로 아랫자리로 가서 앉았다. 관리가 그의 곁에 앉고, 나머지 사암들은 모두 바깥에 서 있었다."


공령욱은 이렇게 회고한다. 일본인은 오랫동안 중화문명의 훈도를 받았기 때문에 공자를 존경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하여 곡부를 점령한 기간동안 일본인은 공부를 신처럼 모셨고, 일본군에서 참관단을 보낼 때도 줄을 서서 예의를 지켜서 관람했다.


6


그러나 시대는 다시 공씨가족에게 미친 폭풍우같은 일격을 날리게 된다.


1949년, 중국의 '도통' 상징을 쟁탈하기 위하여, 장개석은 '대륙학인긴급주조계획'을 시행하는 외에, 유불도 삼가의 상징인 공자77대손,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 그리고 도교 제63대천사(天師)인 장은부(張恩溥), 그리고 티벳불교계통의 제7대장가(章嘉)를 대만으로 데려간다.


이때부터, 국내에 공인된 공자적계 연성공의 후예는 바다를 건너 대만으로 가게 된다.


이때는 혁명의 폭풍우가 곧 밀어닥치려는 때였다.


1966년 11월, 북경에서온 홍위병이 곡부의 공묘, 공부, 공림에 들어선다.


그후 공씨선조의 분묘, 그리고 중화문명 도통의 상징인 공묘, 공부, 공림이 파괴된다. 공덕성 부보의 시신도 모욕을 당한다. 멀리 대만의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은 마음이 찢어졌다.


그후에 개혁개방이 되었지만, 2008년 사망할 때까지 대륙에서 여러번 초청했지만,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은 죽을 때까지 대륙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공덕성이 대만에 있지만, 공덕성의 누나 공덕무(孔德懋)는 대륙에 거주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원인으로, 공덕성이 대륙으로 돌아오지 못하자, 1949년이후 이들 오누이는 한번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41년간 헤어져 있었다. 1990년 공덕무는 동생인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이 일본 레이타쿠대학(麗澤大學)에서 강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가서 공덕성이 강연하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가 지나갈 복도에서 기다렸다.


41년간 서로 헤어져 있다가, 두 나이든 공자적계자손이 마침내 이국타향인 일본에서 만났다. 누나를 보자 공덕성은 바로 오열하고 눈물이 얼굴을 적신다. 그리고 누나 공덕무와 꼭 뜰어안았다.


1993년, 대만에 있던 공덕성은 특별히 대련을 하나 쓴다:


풍우일배주(風雨一杯酒)

강산만리심(江山萬里心)


그리고 사람을 시켜 대륙에 있는 누나 공덕무에게 보낸다. 그녀에게 부모의 빈 무덤앞에서 절을 하고 종이를 태워달라고 말한다. 공덕무는 동생 공덕성의 이 대련을 객청에 걸어둔다.


2008년 공덕성이 대만에서 사망한 후, 공덕성의 아들 공유익(孔維益)은 이미 1989년 먼저 병사하였으므로, 2009년 민국정부가 내린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의 직위는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의 적손인 공유익의 외동아들 공수장(孔垂長)이 승계한다.


그후 원래 사업에 종사하던 공수장은 공자의 제79대적손으로 유가문명을 선양하는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공수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장과정에서 자신이 태생적으로 사명을 지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음 속으로 반항심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것이 내 운명이다."


공자가족혈맥으로 2006년 공수장의 아들 공자의 제80대 적손인 공우인(孔佑仁)이 대만에서 태어난다.


이 사명을 안고 태어난 증손자의 이름을 지어주기 위하여, 당시 여전히 살아있던 공덕성은 1달여나 생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공우인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우(佑)'는 항열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인(仁)'은 바로 공자사상의 핵심이다.


7


대륙에는 공자남종의 적계전인인 공자75대적손 공상해(孔祥楷)가 있다. 그는 1947년 민국정부로부터 '대성지성선사남종봉사관'에 임명된 사람이다.


1956년, 공상해는 대학입시후 서안건축공정학원(지금의 서안건축과기대학)의 건축공학과에 합격한다. 대학졸업후, 공상해는 하북당산의 금광에서 기술원이 된다. 오랫동안 외지의 광산에서 일했기 때문에 공상해는 기적적으로 역대 정치운동을 피해갈 수 있었다.


나중에 공상해는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큰 난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계속 보통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종 노동자와 함께 일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절강 구주의 고향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구주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비림비공'때 노공(老孔, 공상해)는 분명히 맞아죽었을 것이다."


이런 곡절을 겪은 후, 1993년 절강구주시위는 공상해가 일하던 중국황금총공사와 여러번 협상을 한 후에, 1956년이후 고향을 떠나있던 '남종마지막 봉사관' 공상해를 고향으로 모셔온다.


나중에 어떤 학자는 공자남종의 적계전인으로서, 공상해가 자신을 공자의 '적장세계'의 신분으로 보고해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공상해는 이렇게 말한다:


"고맙다. 사람은 해야할 일도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다."


그리고 사망후에 대만의 삼협공묘에 묻힌 공덕성에 대하여, 공덕성의 당제이자 세계공자후예종친연의총회 회장인 공덕용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바램은 그가 낙엽귀근하는 것이다. 곡부의 조상선영인 공림 안에 모시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자리를 비워 놓았다."


같은 시기에 공상해도 한 가지 일을 한다. 절강 구주에 있는 공자남종 가묘를 수리할 때, 어떻게 공자의 패위를 쓸 것인가에 대하여, 누군가 여전히 옛날에 하던대로 "대성지성선사지신위(大成至聖先師之神位)"라고 써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공상해는 거절하고 이러헤 말한다: "부자께서 말씀하시길 '제신여신재(祭神如神在)'라고 하셨다. 이를 보면 공부자께서도 '신'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공부자조차도 신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자신이 '신'이 되었을 것인가? 이 패위에서 '신'자는 빼는 게 좋겠다."


그때는 공자가 사망한지 이미 2400여년이 지난 후이다. 그의 후예자손은 일찌기 해협양안 그리고 전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