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공자)

공자(孔子) 소정묘살인사건의 진상

중은우시 2018. 7. 5. 12:31

글: 연비(燕飛)

 

여러분 안녕하세요. <비어고금(飛語古今)>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연비입니다.

 

고금중외, 인류역사상 수많은 의문사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는 것처럼 애매모호하고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는 사건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쪽은 공자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공자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쌍방 모두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소송은 이천년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선진(先秦, 진나라이전)문화를 얘기하면서 이 역사적인 미스테리한 사건에 대하여 저는 약간 새로운 발견을 했고, 새로운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얘기해볼까 합니다.

 

먼저, 우리가 간단하게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사건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사건은 이렇습니다. 공자가 막 노(魯)나라의 대리국상이 된지 7일만에 소정묘라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역대의 유생들도 그러했습니다. 모두가 놀라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소정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후세의 사람들도 그런 기록을 보지 못했습니다. 완전히 무고한 사람인데 공자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둘째, 공자가 죽인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소정묘의 소정(少正)은 관직입니다. 경대부(卿大夫)에 속하는 조정의 고위관직입니다. 이 소정묘는 노나라에서 당시에 영향력이 아주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그를 죽여버린 겁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셋째 원인입니다. 즉 공자의 이미지는 완전히 무너져버리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공자는 일관되게 인정(仁政)을 주장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관직에 앉자마자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게다가 바로 얼마전에 노나라의 정경(正卿) 계강자(季康子), 즉 노나라 최대의 실권자가 막 공자와 치국지도에 대하여 담론을 벌인 바 있습니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묻습니다: "만일 무도(無道)한 사람을 죽여서, 도를 세우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여 말합니다: "그대는 정치를 하겠다면서 어찌 죽이겠다는 겁니까(焉用殺)."

 

들었습니까? 공자의 회신은 명확하지 않습니까: 어찌 죽이겠다는 겁니까. 어떻게 살인하느냐. 설사 그가 무도하더라도, 마음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머리는 배추가 아니어서 잘라버리고 나면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모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곤혹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스승님은 죽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여버린 겁니까?

 

이런 질문을 받고, 공자는 자신의 해명을 합니다. 당당합니다.

 

"사람에게 악한 자는 다섯가지가 있다. 도둑은 해당하지도 않는다; 첫째 심달이험(心達而險), 둘째 행벽이견(行癖而堅), 셋째 언위이변(言僞而辯), 넷째, 기추이박(記醜而博), 다섯째, 순비이택(順非而澤). 이 다섯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해당하는 자라면 군자의 주살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소정묘는 여러가지를 겸하고 있었다. 그가 거처하는 곳은 무리들을 모으기에 충분했고, 그의 말은 나쁜 말로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고, 그의 강함은 반란을 일으켜 독립할만했다. 이는 소인의 걸웅(傑雄)이다.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순자.유좌>)

 

원문이 비교적 길어서 하나하나 해석하지는 않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공자는 소정묘가 내심이 험악하고, 말을 잘하는 여론의 영수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왕왕 요사스러운 말로 무리를 현혹시키고 영향력이 크니 반드시 미연에 방지해야 하고, 가장 좋은 것은 이런 자가 세력을 얻기 전에 미리 제거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비록 소정묘의 여러가지 '죄상'을 열거하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소정묘가 기실 무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런 실질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입니다.

 

공자는 제자들이 여전히 의혹을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자, 스스로도 살인의 이유로는 불충분하다고 느낀 것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역사상의 몇몇 역사적 인물들을 끌어들여서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 상탕(商湯), 주문왕(周文王), 강태공(姜太公)등등. 공자는 말했습니다. 이들도 모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이 당시 죽인 사람들도 내가 지금 죽인 소정묘와 같다. 모두 사상, 언론에 문제가 있었다. 그들도 죽였는데, 나라고 못죽일게 뭐냐. 죽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공자는 언론치죄(言論治罪)하여 소정묘를 죽인 것입니다.

 

이어서 이 사건은 여러가지 버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나중의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이야기가 이렇게 바뀝니다: 공자는 소정묘를 죽였을 뿐아니라, "시어조(屍於朝)"했다. 즉 시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겁주었다는 것입니다.

 

동한(東漢)에 이르러 <논형(論衡)>에서는 다시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개인적인 동기가 추가됩니다. 이 소정묘는 대단한 학자였고, 역시 학교를 개설하였는데, 그의 학생이 공자의 학생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공자의 학생들이 모조리 소정묘에게로 가서 배우다보니, 공자에게는 겨우 안회(顔回) 한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공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가 관직을 얻자마자 가장 먼저 소정묘를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누가 들으면 가장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누가 이런 이야기를 가장 좋아할까요.

 

그것은 바로 역대왕조의 황제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너무 좋다. 앞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있으면 내가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예를 들어, 한무제는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것은 너무나 잘 죽였다고 여깁니다. 그는 명을 내려 공자가 소정묘에게 붙인 그 죄상을 모조리 <왕제(王制)>에 써넣게 해서, 국가의 법률조문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되자 골치아파졌습니다. 공자의 그 다섯가지는 아주 주관적인 것들입니다. 아무런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없습니다. 한 사람의 생각이 좋은지 나쁜지,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누가 판단합니까? 그건 모두 황제가 결정하면 그만이 아닙니까. 그가 맞다면 맞는 것이고, 그가 틀렸다면 틀린 것입니다. 그가 죽이고 싶으면 그냥 고혹인심(蠱惑人心)이라는 간단한 죄명을 붙여버리면 됩니다.

 

서진(西晉)의 명사 혜강(嵇康)은 사마씨를 위해서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죽림에 들어가 철장포를 차립니다. 그리고 쇠를 다루며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사마소(司馬昭)의 심복인 종회(鍾會)는 혜강과 같은 고인과 사귀고 싶어 그를 찾아옵니다. 그러나 혜강은 그를 완전히 무시합니다. 종회는 화가 나서 돌아가 사마소에게 혜강을 죽이라고 진언합니다. 사마소는 말합니다: "아무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때 종회가 말합니다: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공자가 소정묘를 죽일 때 무슨 이유가 있었습니까?" 얼마후 사마소는 핑계를 찾아서 혜강을 죽여버립니다.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이 일은 완전히 황제들이 '언론치죄'하는데 쓰이게 됩니다. 자신과 뜻이 다른 자를 주살하는 아주 좋은 모범사례가 된 것입니다. "소정묘"는 살인의 구실이 됩니다. 2000여년동안,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일은 계속 재연되었습니다. 많은 사상의 선구자들은 통치자에 의하여 '소인'으로 지목되어 속속 구금되고 처형되었습니다...

 

역으로 말해서, 공자가 소정묘를 죽였다는 이 이야기를 가장 믿지 않는 사람은 바로 유생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치는 아주 간단합니다. 일부 유생들은 계속하여 '종도부종군(從道不從君)', 도를 따르지 군왕을 따르지 않는다는 유가이념을 지켜왔습니다. 자신들은 진리를 따르지 황제를 따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황제로서는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황제가 기분나빠지면 그 결과는 심각합니다. 직접 요언혹중(妖言惑衆)이라는 죄명을 붙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생의 조사인 공자도 그렇게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사건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중 가장 전형적인 사람은 바로 주희(朱熹)입니다. 주희를 대표로 하는 이 일파는 공자를 일대 성인(聖人)으로 모십니다. 그는 계속하여 '위정이덕(爲政以德)' 덕으로 정치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제지이형(齊之以刑)' 형벌로 다스리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절대로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공자는 부임한지 겨우 7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이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순자.유좌>편인데, 동시대의 다른 문헌에는 상응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희는 주장합니다.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일은 기실 제나라, 노나라의 일부 사람들이 위조한 것이다리고.

 

주희의 주장은 이치에 맞는가?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불충분합니다.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공자가 인정을 주장하고, '위정이덕' 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설득력이 없습니다. 고금중외에 많은 정치가들은 말은 그렇게 해도 행동은 다르게 합니다. 인정을 기치로 내걸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직에 오르기 전에는 좋은 말들을 한무더기 내뱉다가, 일단 권력을 잡으면 특히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면,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을 죽이는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어집니다. 이런 사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관건은 그가 어떻게 말했느냐를 봐야하는게 아니라 어떻게 행동했느냐를 봐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공자가 부임한지 7일밖에 안되어서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도 기실 전혀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관상임삼파화(新官上任三把火). 새로 관리가 부임하면 세가지 큰 일을 저지른다는 말이 있듯이 막 부임했을 때 놀라운 일이 더 많이 벌어집니다.

 

예를 들어, 그 이름도 유명한 소동파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공자가 하루빨리 소정묘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이삼일 늦추웠더라면, 이미 소정묘에게 당했을 것이다." 즉, 공자는 먼저 손을 써서 이긴 것이라는 겁니다.

 

그외에 주희는 공자가 소정묘를 죽였다는 사건을 후인들이 위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의심일 뿐이고,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

 

주희를 제외하고,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공자가 살인하지 않았다고 논증합니다. 예를 들어, 공자가 대리한 국상(國相)은 국가의 예의를 주재하는 관직이고, 사람을 죽이는 권한은 없다는 겁니다. 이런 논증은 각각의 도리는 있지만, 그래도 설득력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논쟁은 계속도고, 누군가는 여전히 죽였다고 하고, 누군가는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로 의견이 대치하고 있을 때, 제3의 견해가 나타납니다.

 

이 일파는 공자가 소정묘를 주(誅)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소정묘를 주(誅)했다는 것이 소정묘를 죽였다(殺)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주'는 "책(責), 토(討)"의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소정묘를 주했다는 것은 기실 소정묘의 행위가 단정하지 못하고 언론이 부당하여, 공자가 그를 견책하고 징벌한 것일 뿐, 그를 죽였다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일파의 견해는 이치에 맞을까?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설문해자>에서는 "주(誅), 토야(討也). 종언주성(從言誅聲)"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를 견책, 성토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겁니다.

 

다만, 이런 해석은 철두철미한 단장취의(斷章取義)입니다.

 

만일 "공자위노섭상(孔子爲魯攝相), 조칠일이주소정묘(朝七日而誅少正卯)"라는 구절을 가지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어서 공자가 열거한 사례들은 역사상 그들 정치가들이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문왕이 반지(潘止)를 주(誅)한 것이나, 주공이 관숙(管叔)을 주(誅)한 것등입니다. 반지나 관숙은 확실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문장들을 보면 공자 자신의 말로도 소정묘를 죽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의 '주'는 주살했다고 해석해야지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정말 소정묘를 죽였을까요?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이 사건은 여러가지 판본이 있습니다. <공자가어>, <사기>에 모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순자.유좌>입니다. 다른 판본은 모두 이 기초 위에서 바꾼 것들입니다.

 

그래서 답안을 아려면, 반드시 순자의 그 문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순자.유좌>의 글이 나온 것은 공자가 관리를 지낸지 이미 거의 200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이 200년간, 아무도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일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치래도라면, 이 것은 큰 사건입니다. 노나라의 두 유명인사가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괴하게도, 노나라의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어>에도 없고, <전국책>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공자를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두 사람 있다는 것을. 한 명은 묵자(墨子)이고, 다른 한 명은 장자(莊子)입니다. 이 두 사람은 공자를 욕하거나 조롱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둘은 항상 공자를 가지고 얘기했습니다.

 

만일 공자가 정말 소정묘를 죽였다면, 묵자와 장자가 그냥 가만히 있었을까요? 분명히 그것을 가지고 욕을 한바탕 했을 겁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사료, 문헌에서 그런 글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즉, 공자가 사망한 후 근 200년동안, 아무런 문헌에서도 소정묘를 죽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200년후, 이 일이 순자와 같이 공자의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이 도굴범처럼 파내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동시대의 문헌 중에는 오로지 <순자.유좌>에만 그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정말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타났고, 의문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래에서 우리가 하나하나 분석해보기로 합니다. 공자가 당시에 소정묘를 죽일 가능성이 있었을까요?

먼저, 공자는 소정묘를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틀렸다고 말합니다. 공자는 당시 노나라의 국상이기 때문에 권한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임시로 대리할 뿐입니다. 그의 진정한 직무는 대사구(大司寇)입니다. 이는 현재의 법무부장관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사법을 관장하니 사람을 죽이는게 바로 권한 아니냐고.

 

기실, 사구는 그저 민간을 관할하는 사법기관입니다. 소위 사구의 '구(寇)'는 강도, 도적입니다. 사구는 바로 민간의 도적, 범죄분자를 처리하는 것이고, 대부(大夫)는 그의 관할에 속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얘기한 것처럼 소정묘는 경대부입니다. 공자가 만일 소정묘를 죽였다면, 그것은 장관 한 명이 부임한지 7일만에 마음대로 핑계거리를 찾아서 다른 장관을 죽였다는 겁니다. 만일 그랬다면 다른 관리는 물론이고 군주까지도 겁먹었을 일입니다. 어느 군주가 이런 권한을 그에게 주겠습니까.

 

공자가 국상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소정묘를 죽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노나라에는 국군(國君)이 있을 뿐아니라,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삼환(三桓)이 있었습니다. 즉, 계평자(季平子), 맹의자(孟懿子),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그들입니다. 공자는 이들 세명의 실권자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마음대로 경대부를 죽여버릴 수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춘추시기에, "기범법(其犯法), 즉팔의경중(則八議輕重), 부재형서(不在刑書)" 즉, 대부가 법을 어기면, 일반적인 사법기관에서 형율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국군이 귀족을 소집하여 심리합니다. 어쨌든 대부라는 관직은 국군이 내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실 '형부상대부(刑不上大夫)", 형법의 적용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형부상대부"는 후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대부는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특권을 가졌으므로, 아무렇게나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그런게 가능하겠습니까. 단지 재판방식이 더욱 고급이라는 것입니다. 대법정에서 심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외에 형벌을 집행할 때도 대부는 체면을 살려줍니다. 보통범죄인처럼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소정묘를 죽였다는 말은 완전히 예제에 어긋납니다.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정묘는 아마도 경대부가 아닐 수 있지 않느냐고. 그는 관직을 성으로 썼을 뿐이고, 경대부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고.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춘추시기, 경대부가족은 일반적으로 세습귀족입니다. 그들은 현지에서 영향력이 아주 큰 대가족입니다. 공자가 만일 정말 마음대로 이런 대가족에 속하는 사람을 죽여버린다면, 그의 가족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를 그냥 놔두었을까요. 그리고 소정묘에게는 많은 학생이 있지 않습니까. 공자보다도 많았습니다. 이 수천수만의 학생이 설마 공자를 찾아가서 난리치지 않았을까요. 어찌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외에 소정묘가 그렇게 유명했다면, 학생도 공자보다 많았다면, 왜 그의 글은 한줄도 세상에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요. 그리고, 소정묘라는 사람은 그저 이 이야기에만 나옵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에 관한 약간의 정보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괴이합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충분한 증거로 말할 수 있습니다. 순자의 이 글은 철저하게 위조된 것입니다. 위조한 사람이 비록 정교하게 거짓말을 엮었지만, 아쉽게도 큰 헛점을 남겼습니다.

 

문제는 바로 공자가 말한 그 말에 있습니다. 즉 누군가 공자에게 왜 사람을 죽였느냐고 묻자, 공자는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역사상 정치가들도 모두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죠:

 

"탕주윤해(湯誅尹諧), 문왕주반지(文王誅潘止), 주공주관숙(周公誅管叔), 태공주화사(太公誅華仕), 관중주부리을(管仲誅付里乙), 자산주등석, 사부(子産誅鄧析, 史付), 차칠자자(此七子者), 개이세동심(皆異世同心), 불가불주야(不可不誅也)"

 

이 말의 한 마디는 아주 문제가 큽니다. 바로 "자산주등석"입니다. 저명한 학자인 포붕산(鮑鵬山) 선생은 선인들의 연구에 근거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첫째, 이 등석은 확실히 주살되었다. 그러나 자산이 주살한 것이 아니다. 정국(鄭國)의 집정 희사천(姬駟歂)이 죽인 것이다.

 

둘째, 등석이 사형당한 것은 정공구년(定公9年)으로 그때는 이미 자산이 죽은지 21년이 지났다. <좌전>등 문헌에도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미 죽은지 20여년이 된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설마 그가 묘에서 다시 벌떡 일어나 누군가를 죽였을까?

 

셋째, 더욱 관건은 공자와 자산은 망년지교이다. 자산은 "덕이 있는 자만이 관대하게 백성들을 복속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여, 공자의 정치사상과 비교적 가까운 인물이다. 공자는 자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산은 고지유애(古之遺愛)이다"라고 한 사람이다. 자산이 죽은 후 21년이 지난 때는 공자가 51세때이다. 그때 등석이 희사천에게 주살되었다. 이때, 공자가 어떻게 죽은지 20년이 지난 친구가 누굴가를 주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확실히, 공자가 말한 그 말은 누군가의 날조이다. 누군가 고의로 공자에게 먹칠을 한 것이다.

 

누구일까? 아마도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누구라니, 바로 그 사람 아니냐. <순자.유좌>는 순자가 쓴 것이지 않느냐고. 그러니 분명히 순자일 것이라고. 진상은 그렇지 않다. 여러 학자의 연구에 근거해서 보면, <순자>는 기실 순자가 쓰지 않았다. 그 안의 많은 글은 후세의 법가가 쓴 것이다. 거기에 나타난 것은 주로 법가의 사상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공자가 소정묘를 죽였다는 사건을 날조했을까? 나는 단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혐의가 가장 큰 인물은 바로 법가의 한비자(韓非子)라고. 왜 그런가?

 

먼저, 선진의 유도묵 삼가는 모두 살인정치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저 법가만이 공공연히 살인을 고취했다. 특히 한비자는 그렇다. 그의 글을 보면 도처에 살기가 등등하다. 음험하고 독랄하다. 걸핏하면 어떤 유형의 인물을 죽여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유생, 은사, 공상업자, 이들은 그의 눈에 국가의 해충이고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그외에 또 하나의 단서가 있다: 닐조된 공자의 말 속에 이런 말이 있다. "태공주화사" 이 사건은 당시에 다른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단지 한비자의 글에만 나올 뿐이다.

 

그래서, 이 말은 한비자가 날조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는 최대의 혐의자이다.

 

한비자라는 법가는 일을 할 때 무슨 도덕의 구애를 받지 않았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뭐든지 했다. 한비자의 이 수법은 너무나 악독하고 너무나 대단하다. 그는 자신이 날조한 공자가 소정묘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자신의 스승인 순자의 글 속에 넣어버린다. 이유반유(以儒反儒), 공자,순자를 빌어 그들 법가의 살인정치를 주장한 것이다.

 

그가 왜 유가의 이 두 어른을 빌렸을까? 아주 간단하다. 이 두 사람은 아주 유명하기 때문이다. 순자는 일찌기 세번이나 당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학원인 직하학궁(稷下學宮)의 제주(祭酒)를 지냈다. 지금으로 따지면 원장이다. 그는 학술계의 대단한 인물이다. 공자는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한비자의 시대에 그는 이미 사상문화계의 신적인 존재였다.

법가의 이 수법은 아주 대단한데, 그것은 공자를 가지고 유생들의 입을 막았다는 것이다. 너희는 인정을 주장하지 않느냐. 봐라. 너희의 조사인 공자도 사람을 죽였다.

 

이 날조사건이 중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너무나 크다. 황제가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근거가 되었을 뿐아니라, 후세의 일부 멍청한 유생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반드시 멍청해서 그런게 아니라, 일부 유생은 일단 체제에 들어가서 권력을 장악하고나면 조사의 인정이상은 아예 내팽개치고 현실정치의 필요에 따라 아주 기꺼이 공자가 소정묘를 죽였다고 믿고 따라했다.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사건이 중국인에게 미친 악랄한 영향중에 가장 나쁜 것은 바로 공자가 소정묘의 죄를 지적하면서 한 그 말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주심론(誅心論)이다. 죄행을 묻지 않고, 아무런 객관적 증거가 없이 한 사람의 내심을 단정하여 범죄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황제에게 무슨 이견을 내비치기만 하면 황제는 너를 조정을 비방했다고 죄를 물을 수 있다. 네가 관리에게 이견을 얘기하면 관리는 바로 국가를 모욕한 매국노라고 처벌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을 비판할 때, 상대방의 행위나 상대방의 말를 가지고 따지지 않고, 행위나 언어를 우회하여 상대방의 목적, 동기를 질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통문화를 토론할 때, 전통문화가 나쁘다는 말은 전혀 해서는 안된다. 말을 꺼내기만 하면 바로 누군가 너를 매국노라고 비난할 것이다. 심지어 네가 급여를 받는 간첩, 미제가 전통문화를 파견하기 위해 파견한 사람이라고 할ㄹ 수도 있다. 그리고 너를 고발할 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주심론이다. 어떠한 사실적 근거도 없다. 그저 각종 죄명을 덧붙이면 된다. 어떤 경우는 단지 다른 사람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직장에 찾아가서 난리를 치고, 그 사람의 집에 찾아가서 폭행을 한다. 상대방의 육체를 소멸시켜야 시원하겠다는 듯이. 이런 사상의 근원은 기실 모두 법가에서 나왔다.

 

우리가 진정한 조화사회를 건립하려면, 반드시 다원병존, 상호존중을 배워야 한다.

 

"나는 너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네가 말할 권리는 죽어도 보장해 주겠다."  이 말이 바로 현대문명사회의 컨센서스이자 마지노선이 되어야 한다. 이런 문명이념은 공자가 만일 살았더라면 그가 분명 인정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예 그 존재하지도 않는 소정묘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는 그런 주심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