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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공자)

공자의 주유열국(周遊列國)때 열국에서 받은 대우는 어떠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2. 22.

글: 문철(文哲)


공자는 55세때 제자들을 데리고 열국을 주유했고, 유가학설을 13년간이나 밖으로 다니면서 선전했으나 실패로 끝맺는다. 공자의 주유열국때 어느 나라들을 다녔으며 왜 중국봉건시대의 주류학문인 유학이 당시에는 열국의 통치자들로부터 중시되지 않았을까? 아래는 <사기.공자세가>를 기초로 다른 사료에서 보완하여, 공자가 각 나라들을 다니면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리고 왜 중용되지 못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위(衛)


공자가 노(魯)나라를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위나라였다. 위나라 국군(國君)은 공자를 잘 대접했고, 그 부인인 남자(南子)는 공자를 무척이나 앙모했고, 공자와 만나보기를 바랐다. 공자는 위국부인을 만나보겠다고 결정했으나, 학생들은 이견이 많았다. 남자는 호색하며 여인의 될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위나라에서 명성이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는 남자가 위나라의 실질적인 권력자라고 보고, 만일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남자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공자와 만났을 때, 공자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유혹하며, 공자가 위나라에 남아서 교육사업을 해주기 바랐다. 그렇게 해야 공자와 자주 만나는데 편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시종 불비불항(不卑不亢)하며 완곡하게 남자의 그와 잘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암시를 거절한다. 공자는 당시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위나라에서 적극적으로 만류했지만, 위나라를 떠나게 된다.


송(宋)


공자가 송나라에 도착한 후, 송나라 국군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송나라국군은 그가 정치를 잘 정리정돈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송나라의 사마(司馬) 환추(桓魋)의 질시를 산다. 하루는 공자가 집밖의 큰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환추가 병사를 몰고와서 공자를 암살하려 한다. 다행히 학생들이 보호해주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이런 위난을 겪자, 공자는 학생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송나라를 떠난다.


제(齊)


공자가 제나라에 도착했을 때 당시의 제나라군주인 제경공(齊景公)은 공자를 아주 중시한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큰 뜻을 펼치라고 할 때, 당시 제나라의 국상(國相)인 안자(晏子)의 저지를 받게 된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공자는 제나라에 도착한 후 제나라에서 명성이 높은 국상 안자를 찾아가보지 않았다. 공자와 안자간에 사이가 벌어진 원인에 대하여 <사기>에서는 안자가 공자의 학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예(禮)의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외에, <안자춘추>에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하루는 제경공이 공자를 만났을 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제나라에 온 후에 왜 나의 국상인 안자를 만나보지 않았는가?"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안자를 만나기 원치 않은 원인은 안자가 현재까지 이미 삼대의 국군을 모셨는데, 그는 모든 국군에게 아주 순종(順從)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 숨은 의미는 안자라는 사람은 원칙을 지킬 줄 모르고, 국군을 모시고 정치를 할 때 국군의 의사에 영합하는 자라는 것이다. 자신의 주관도 없고, 진리를 견지하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안자의 귀에 들어갔고, 안자는 이렇게 반박한다; "나는 대대로 제나라의 백성이다. 나는 스스로의 품행을 지키기 어렵고, 자신의 잘못을 알기 어렵고, 스스로 제나라에서 설 수가 없다. 나는 이렇게 들은 바 있다. 운이 좋으면 총애를 받고, 운이 나쁘면 미움을 받는다고. 비방을 듣거나 칭찬을 받는 것은 모두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것이고, 메아리가 말한 것에 상응하는 것과 같다. 행위를 명확히 보고난 연후에 질책을 하던지 칭찬을 하여야 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한 마음으로 세 군주를 섬기면 군주에 순종할 수 있고, 세 마음으로 한 군주를 섬기면 군주에 순종할 수 없다. 지금 나의 행위가 어떠한지도 보지 않고, 내가 군주를 순종했다고 질책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군자는 혼자서 서도, 그림자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고, 혼자서 잠을 자도 꿈에 만나는 사람에게 미안하지 않다. 공자는 큰 나무 아래에서 예를 가르치다가 나무가 뽑힌 후에 떠났으면서도 스스로 치욕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진나라, 초나라에서는 양식이 끊어져 곤경에 처해 있지만 자신이 곤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사람을 비난하면서 제대로 된 원인을 찾지 못하면 이것은 물가에 살면서 도끼가 쓸모없다고 질책하는 것이나, 산에 살면서 그물이 쓸모없다고 질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나, 그 자신은 이로 인하여 곤경에 빠진 것을 모른다. 당초에 나는 유학자를 좋게 보았으나 지금은 좀 의심스럽기 시작한다."


공자는 안자의 그 말을 들은 후 자신이 안자를 평가하는데 실언했음을 여기고 급히 안자의 말을 칭찬한다: "이런 말이 있다. 가까운 곳에서 한 말이 멀리 퍼져가도 막을 수가 없고, 자신이 한 행위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가릴 수가 없다. 내가 사사로이 안자를 비판한 것은 그의 잘못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고, 나의 잘못은 피할 수 없다. 내가 듣기로 군자는 남을 넘어서면 그를 친구로 삼고, 남에 미치지 못하면 그를 스승으로 삼는다고 했다. 지금 나는 노선생에게 잘못된 말을 했으니 노선생이 나를 비판한 것이다. 그는 나의 스승이다." 그리고 안자를 칭찬하는 말을 하다: "백성들을 구하고서도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고, 세 군주를 모시고서도 잘못이 없으니, 안자는 과연 군자이다." "너희는 알아야 한다. 안자는 한 마음으로 백명의 군주를 섬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이런 말들도 안자의 그에 대한 나쁜 인상을 바꿀 수가 없었다. 결국 공자는 제나라를 떠나게 된다.


진(陳)


공자가 진나라에 도착해서 진혜공(陳惠公)의 환영을 받느다. 진나라에서는 3년이나 머문다. 그러나 당시 진(晋)과 초(楚)가 서로 다투는 중이어서 그 화가 진(陳)에 미쳤다. 나중에 오(吳)나라도 진(陳)나라를 침범한다. 공자는 진나라와 같은 약소국에서는 크게 발전할 수 없겠다고 제자들을 데리고 초나라로 떠난다.


초(楚)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받은 예우는 다른 나라와 비슷했고, 초왕의 존중을 받는다. 초소왕(楚昭王)은 공자에게 봉지(封地)를 내릴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영윤(令允) 자서(子西)가 반대했다. 자서는 초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공자는 당금의 성인(聖人)입니다. 문하에는 인재가 많습니다. 봉지를 받은 후에는 초왕을 대신하여 군주가 되려 할 것입니다." 초왕은 그의 참언을 듣고 공자에 대한 견해를 바꾸게 된다. 더 이상 봉지에 관한 일은 꺼내지 않는다. 공자는 그런 모습을 보고는 초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공자는 처음 어느 나라에 갔을 때는 모두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권신(權臣)에게 배척을 당하거나, 전란을 맞거나 혹은 자신이 견지하는 도의와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결국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공자는 중용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사상이 당시의 시국과 맞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천지, 지리, 인화가 맞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