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장손황후(長孫皇后)의 현무문사변때의 공헌

중은우시 2018. 12. 7. 14:52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당나라때 당태종 이세민의 장손황후는 현량숙덕(賢良淑德)하며 남편을 도와 '정관지치'를 열게 한 것으로 후세에 칭송을 받는다. '삼대이래 황후중 현덕한 사람은 당나라 장손씨가 최고이다."라는 평을 얻었다. 장손황후는 당태종의 현내조일 뿐아니라, 경심동백의 현무문사변때도 결단을 내려 부군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다.


기실 현무문사변은 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의 죽음으로 바로 끝나지 않는다. 그 후에도 일파삼절(一派三折)이 위기가 있었다.


이건성과 이원길은 모두 황실구성원이고, 지위가 높았다. 매번 조회에 나갈 때면 각각 한 무리의 위사(衛士)들이 신변안전을 지켜주었다. 육월 사일 현무문사변이 일어난 날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데리고간 위사의 수량이 얼마인지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인원수가 아주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무문을 수비하는 운휘장군(雲麾將軍) 경군홍(敬君弘)과 중랑장(中郞將) 여세형(呂世衡)이 모두 태자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자는 현무문은 자신의 영향력아래에 있는 땅이고 안전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성이 몰랐던 것이 있다. 이 두 명의 군관은 기실 일찌감치 이세민에게 돌아서 있었다.


진왕이 복병이 공격해 들어갈 때, 이건성과 이원길의 위사가 목숨을 내걸고 저항했으나 여전히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해내지 못한다.


두 사람은 전후로 이세민과 위지공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이건성의 위사 중에 죽지 않은 자가 있어서 혼란을 틈타 동궁으로 도망가서 현무문에서 발생한 일을 익위거기장군(翊衛車騎將軍) 풍립(馮立), 부호군(副護軍) 설만철(薛萬徹)에게 보고한다.


풍립과 설만철은 즉시 동궁의 모든 위사를 불러모아서 말한다: "우리는 태자의 은혜를 여러 해동안 입었다. 어찌 태자가 죽은 후에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동궁의 모든 위사를 이끌고 현무문을 향헤 달려가 태자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 동시에 사람을 보내어 제왕부의 직부좌거기(直府左車騎將軍) 사숙방(謝淑方)에게 통보하여 함께 가자고 한다.


사숙방도 소식을 들은 후 제왕부의 모든 위사를 모아서 현무문으로 달려간다. 두 왕부의 위사는 길 위에서 만났고 모두 이천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현무문으로 돌진한다. 


이세민의 부하는 현무문의 핏자국을 닦으며 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고함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풍립과 사숙방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세민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급히 문을 걸어잠근다. 장공근(張公瑾)을 팔힘이 세서 신속히 성문을 걸어잡그고, 이들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풍립은 위사를 지휘하여 성문을 공격한다. 이세민의 부하는 개략 100여명이었다(일부 기록에는 80여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원군도 없어서 장기간 버틸 수가 없었다. 성문이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경군홍과 여세형은 진왕의 상황이 위급한 것을 보자, 현무문의 수비군을 이끌고 몰려나가 태자부의 위사들을 공격한다.


혼전 속에 경군홍은 풍립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여세형도 혼란한 와중에 역시 사망한다. 경군홍, 여세형 두 사람이 비록 국면을 완전히 뒤집지는 못했지만, 이세민에게 고귀한 시간을 벌어준다. 드디어 진왕부의 원군이 도착한다.


이세민과 부하는 모두 현무문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을 청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원군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원래 진왕비였던 장손씨는 그날 태자를 제거하는 행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알고, 부군이 출발하기 전에, 친히 수행장병들을 위문했다.


이세민이 출발한 후에는 장손씨가 마음 속으로 걱정이 되어 계속 사람을 현무문에 보내어 상황을 알아보았다.


태자부와 제왕부의 인마가 몰려와서 복수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장손씨는 즉시 외삼촌인 고사렴(高士廉)과 족장인 장손순덕(長孫順德)을 찾아가서 두 사람에게 진왕부의 위사를 이끌고 신속히 구원을 가도록 부탁한다. 동시에 고사렴에게는 장안성의 감옥을 열어 죄수들에게 무기를 나눠주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한다.


고사렴과 장손순덕은 이들 혼합군을 이끌고 현무문에 도착한다. 그러자 동궁과 제왕부의 사람들은 수적 우세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국면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동궁의 부호군 설만철은 진왕부의 위사들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이미 이세민을 제거하기는 불가능하겠다고 여긴다. 그러나 진왕부는 비어 있을 것이라고 역고 소리친다: "형제들이여. 나를 따라 진왕부를 피로 씻자. 태자를 위해 복수하자!"


동궁위사는 그 명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위기의 순간에 위지공은 성문위에서 태자와 제왕의 수급을 내건다. 동궁과 제왕부의 위사들은 이를 보고나서 사기가 꺽인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난다. 풍립, 설만철, 사숙방등도 겨우 장안성을 도망쳐 나간다. 정관연간에 세 사람은 차레로 투항하여, 조정의 관직을 맡는다.


현무문사변은 이렇게 하여 국면이 정리된다. 이세민은 즉시 위지공에게 명하여 입궁하여 당고조를 '보호'하도록 한다. 그 뒤에 발생한 일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연은 이세민을 태자로 앉히고, 그리고 두 달 후 황위를 이세민에게 넘겨준다.


장손씨는 위기이 순간에 결단을 내려, 신속히 진왕부의 원군을 파견함으로써 이세민의 목숨을 구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아마 다르게 쓰여졌을 것이다.


이세민은 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컸고, 그해 팔월 황제로 등극한 후, 13일만에 장손씨를 황후에 책봉한다.


정관10년(636), 장손황후가 병사하니, 향년 36세이다. 시호를 '문덕(文德)'이라 한다. 당태종이 죽은 후 부부는 합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