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황소)

황소는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중은우시 2018. 12. 29. 23:15

글: 정화청천(鼎湖聽泉)


역사학자들의 정의에 의하면 황소의 난은 당나라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농민반란이다. 또한 중국역사상 가장 중요한 농민반란중 하나이다. 당나라의 멸망을 가속화시켰고, 역사의 발전을 추진시켰다.


이 반란을 이끈 부유한 상인가정 출신의 황소는 과거에 낙방한 수재였다. 그의 저명한 싯구는 아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삽삽서풍만원재(颯颯西風滿院裁)

예한향랭접난래(蘂寒香冷蝶難來)

타년아약위청제(他年我若爲靑帝)

보여도화일처개(報與桃花一處開)


이것은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황소가 5살때 지은 싯구라고 한다. 과연 그는 지혜가 남다른 신동이었다.


특히 그의 다른 그 시는 청치적인 참어의 의미가 있는 싯구이다


충천향진만장안(沖天香陳滿長安)

만성진대항금갑(滿城盡帶黃金甲)


이는 자신의 혁명열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장이모우(張藝謀)의 영화에서 유사한 격정이 나타난다.


기실 당나라때 황소의 난 이전에 이미 농민반란이 일어났었다. 일찌가 859년 영국(안휘성 영국현)의 사람인 구보(裘甫)가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섬현(剡縣, 지금의 절강성 승현)을 공격하여 취하였으나, 당나라조정과 번진으로부터 이중착취를 당하고 있던 대당의 민중들은 일찌감치 반란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저 누군가 올라가서 소리치기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구보가 깃발을 들고 일어나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든다. 다음해에는 3만여명으로 늘어난다. 자신의 강산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자, 놀기를 아주 좋아하는 당의종(唐懿宗)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오락을 엄추고, 병력을 움직여 농민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한다. 왕식(王式)으로 하여금 관군을 이끌고 가서 토벌하게 한다. 장비와 인원수에서 우세를 점하지 못했던 절강동부의 구보가 이끄는 농민반란은 겨우 몇달간 버티다가 실패로 끝이 난다. 그러나 혁명의 불씨는 이때 이미 심어졌다. 위인의 말을 빌리자면 성성지화(星星之火) 가이요원(可以燎原)이다. 이후의 당나라에서는 농민반란이 계속 일어나고 커졌으므로, 이번 반란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대부터 당나라말기의 농민반란은 우후죽순처럼 일어난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정치, 경제와 군사에 큰 타격을 입힌다. 이미 썩은 당나라가 붕괴하는 과정을 가속화시킨다. 그래서 구보의 난은 비록 패배했지만 영광스러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미 봉건왕조의 말기이다. 그리고 이미 잔혹한 착취와 탄압으로 계급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도저히 조화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을 때이다. 당나라의 농민반란도 예외가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규칙대로 일어났고, 최종적으로 왕조를 교체하는 도구가 된다.


소위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다"는 말처럼 민중은 대규모의 반란이라는 형식으로 부패의 극에 달한 당나라통치자에 반항할 수밖에 없었다. 874년, 복주(산동성 우성현)와 왕선지(王仙芝)는 장원(하남성 장원현)에서 반란의 깃발을 든다. 호응하는 자들이 수천명에 이른다. 다음 해 왕선지의 반란군은 복주, 조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무리가 수만에 이른다. 바로 왕선지의 반란 1년전에, 관동지역은 큰 가뭄이 들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진다. 관청에서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납부하고 부역을 하도록 강요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려 할 수 없이 관청과 여러번 무장충돌을 벌이게 된다. 건부2년(875년), 왕선지, 상양(尙讓)이 반란을 일으킨 후, 황소도 원구현(산동성 하택의 서남)에서 수천명을 모아서 왕선지에 호응한다. 그리고 당주현을 공격한다. 수개월간 전전하면서 무리는 수만명으로 신속히 늘어났다.


돈있는 낙방수재인 황소는 당나라통치자가 민중의 사활을 돌보지 않고, 취생몽사하는 부패한 생활을 하고, 교만하고 횡행하는 번진은 그저 자신의 기반을 빼앗는데만 신경썼지 당나라조정의 사활은 신경쓰지 않고 있는 틈을 타서, 천시, 지리, 인화를 고려하여 무언가 하려고 할 때, 고대 중국농민의 투쟁지혜와 우수한 품성은 황소의 격발하에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근 십년에 걸친 무장반란을 통하여, 최추의 수천명은 수십만명으로 늘어난다. 용감하게 당나라통치의 중심인 장안을 점령했고, 신속히 당나라말기 농민반란의 주력군이 된다. 최종적으로 당나라를 멸망시키게 된다. 당나라는 농민반란으로 인하여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다.


반란초기, 황소의 반란군은 번진들이 할거하며 당나라의 영토를 거의 나눠가진 역사적 조건을 잘 이용했다. 동시에 번진과 당나라조정간의 권력다툼으로 인하여 권력의 진공상태가 발생하고, 용병의 맹점이 생긴 것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이것이 바로 저명한 역사학자 황인우(黃仁宇)가 <중국대혁사>에서 말한, "황소는 장강을 4번이나 도강하고, 황하를 2번이나 도강하였다. 이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례로 유구(流寇)가 당나라에 무수한 틈이 있어서 그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각지의 지방관은 그저 자신의 지역안전만 신경쓰고, 효과적인 전략으로 그들을 소탕하지못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생존지혜와 투쟁철학으로 반당의 주력군으로 등장하게 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황소반란군의 최초 용병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심지어 동으로 기주(沂州, 지금의 산동성 임기)를 공격할 때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창끝을 산동, 하남의 다른 곳으로 돌린다. 적의 역량이 비교적 박약한 양적(하남성 우현), 겹성(郏城)등 8개현을 차지하여 명성을 크게 떨친다. 나아가 여주(汝州)를 핍박한다. 건부3년(876년) 구월, 반란군은 마침내 전략적인 위치가 아주 중효한 여주를 차지한다. 수비장수 동한훈(董漢勛)은 살해된다. 자사 왕료(王鐐)는 포로로 잡힌다. 그 후에 승리를 틈타 동도 낙양(洛陽)을 공격하고, 장안을 핍박한다. 당나라통치자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의 공세가 파죽지세이자, 당나라 통치자는 할 수 없이 회유책을 쓴다. 반란군에 당근을 준다. 농민반란군의 최대약점은 쉽게 타협한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교재의 견해를 빌리자면, 농민반란군은 선진적인 과학적 이론의 지도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모두 봉건왕조의 왕조교체의 도구로 전락해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농민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의 요구사항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심지어 그저 토지만 조금 나눠주고 배불리 먹고 살 정도면 된다. 그래서 모두 용두사미가 된다. 더더구나 농민반란군중에 정치적 투기인물이 이를 자신의 몸값을 올리려는 카드로 쓰는 경우에는 그러하다. 농민반란군의 지도자인 왕선지는 바로 이런 '변절'하는 인물이었다.


자사 왕료는 재상 왕탁(王鐸)의 당제였는데, 왕료가 좋은 말로 구슬리자 왕선지는 넘어가 버린다. 그리하여 관직에 오르고 싶었던 왕선지는 왕료로 하여금 기주자사(蘄州刺史) 배악(裴渥)에게 서신을 보내 조정의 '초안(招安)'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고 표시한다. 이는 혁명을 배신하는 것이다. 이 해 말 배악은 과연 당나라조정과 조건을 협상하여, 왕선지를 좌신책군(左神策軍) 압아(押牙) 겸 감찰어사라는 관직을 주기로 하고, 전쟁을 끝낸다


황소는 왕선지가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자 대노한다. 이것은 이익을 보고 눈이 멀어 형제를 배신한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이전의 반란군 '대부'인 왕선지를 크게 욕한다: "처음에 같이 맹세를 해서 천하를 횡행했는데, 이제 혼자서 좌군의 관직을 얻다니, 그러면 오천여명의 무리들은 어디로 돌아가란 말인가?"


기실 황소가 분노한 원인은 다른데 있었다. <자치통감>의 말에 따르면, "황소는 관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분장불균(分贓不勻)이다. 이런 초안심리와 관직을 얻겠다는 생각은 결국 기세가 대단했던 반란군을 무너뜨린다. 농민반란이 타협성과 철저하지 못함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화풀이를 위하여, "왕선지를 때리고, 그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며, 그의 무리들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결국 이익때문에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게 된 것이다. 나중에 왕선지는 반란군의 참여자들이 분노하자, 내키지는 않았지만, 관청에 이 '뜨거운 감자'른 내놓겠다고 글을 올리고, 관청에서 임명한 것을 받지 않기로 한다. 이렇게 하여 사태는 진정되었다.


그후에 반란군은 기주에서 미친 듯이 살인방화약탈을 저지른다. "성안의 사람들은 반이 도망치고 반이 죽었다. 집은 불태워졌다. 배악은 악주로 도망치고, 칙사는 양주로 달려간다. 왕료는 적에게 붙잡히고, 적은 군을 나누어 삼천여명은 왕선지와 상양을 따르고, 이천여명은 황소를 따른다. 이렇게 서로 갈라졌다."


일찌기 역사연구자들은 황소의 난이 실패한 원인을 "전체 황소의 난은 기세가 아주 대단했지만, 실제로 그저 유동적인 농민반란이었다. 한번도 진정한 의미의 농민반란근거지를 가진 적이 없다. 설사 이미 당나라의 통치중심 장안에 들어섰고, 겉으로 보기에 체제가 완비된 농민반란정권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그저 텅비어 있었다. 경제, 문화교육은 신경써본 적이 없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핵심을 찌른 것이다. 중국역사의 여러 농민반란을 되돌아보면, 사실상그저 '관청이 백성을 반란으로 몰고가서" 부득이하에 일어난 것일 뿐이다. 완전한 혁명강령과 행동지침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문화수준도 높지 않아, 농민혁명은 그저 원시적인 기혈(嗜血)이 색채를 띌 뿐이다. 더더구나 조직도 없고, 원칙도 없는 생활자원약탈의 아주 형편없는 군사행동만 있고, 근본적으로 주도면밀하고 장기적인 군사계획이나 정치적 주장은 없었다. 결국 왕조교체의 도구로 전락할 운명인 것이다. 그들은 관념이 협소하고, 약간만 얻으면 만족하며, 특수한 상황하에서는 피를 보기 좋아하고, 함부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버린다. 예를 들어, 황소의 반란군은 광주에서 20여만의 아랍, 페르시아등 무슬림상인을 죽였다. 그 흉악함은 항우와 비견할 만하다. 더욱 심한 경우는 <구당서.황소전>에 따를 때, "적(황소반란군)은 진군을 삼일간 포위했다. 과동은 여전히 한해내내 농사를 짓지 못했다. 사람들은 굶어서 벽에 기대어 있고, 적은 포로로 잡은 사람을 먹었다. 매일 수천을 죽였다. 적은 맷돌이 있는데, 커서 수백을 갈 수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넣고 부수었는데, 뼈와 함께 먹었다. 그 해독이 아주 심했다." 반란군이 가는 곳에는 한바탕 살륙이 일어나고, 천리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된다. 결국은 가장 참혹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광경이 벌어진다. 


당연히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농민반란의 의미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농민반란은 봉건왕조의 낡은 통치에 큰 타격을 가하는 위대한 작용을 했다. 그리고 직접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렸으니 그 공로는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