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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왜 중국에는 진정한 신앙이 없을까?

by 중은우시 2018. 7. 4.

글: 진호무(陳浩武)


중국인의 종교의식은 발달하지 않았다. 이것은 세계가 인정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예를 들어 필자 본인같은 경우 누구고 나에게 하나님을 믿게 만들 수는 없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무신론자이다. 다만 나에게 기공대사(氣功大師)를 믿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중국인으로서 본인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당연히 다른 중국인들 중에 아마 어떤 사람은 믿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인의 신앙은 대부분은 물질의 것을 믿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병이 치료되면 나는 믿는다 확실히 영험하다고.  물질의 것을 신앙하는 것이 정신의 것을 신앙하는 것보다 강하다. 설사 정신의 것을 신앙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물질화된 정신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의 신앙이다. 예를 들어, 기공대사는 "기"를 얘기한다. "기"가 무엇인가? "기"는 바로 물질화된 정신이다. 그것은 마치 너에게 의념(意念), 의수(意守)를 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라. 너의 내심에 한 줄기의 기가 흐르고 있다. 정신은 물질화된 것이다. 물질로 보고 처리하는 것이다. 기도 좋고, 천도(天道)도 좋고, 천리(天理)도 좋다. 기실 모두 물질화된 정신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서방의 로고스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신앙이 없다고 슬퍼하지만, 기실 이것은 우리가 원래 신앙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이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진상을 발견했기 때문에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할 것은 우리의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하거나 그것을 지켜야 하고, 무슨 기치를 내걸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장청즈(張承志)처럼 붓을 깃발로 삼아서 호소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무슨 내걸 기치도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것은 우리가 수천년간 종교신앙이 없던 원인을 되돌아보고, 서방신앙의 바탕을 이해해야 한다. 맹목적으로 기독교 혹은 이슬람교를 중국으로 도입하려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천진한 일이다. 류샤오펑(劉小楓) 박사는 기독교를 중국에 도입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정한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겉모습이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진정으로 독립한 개인이 없다. 관건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왜 진정한 신앙이 없는가? 그것은 우리가 독립한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인은 독립하지 못했다. 독립한 인격이 없으므로, 내심으로 독립한 정신적 생활과 정신적 수요가 없다. 중국인은 물질의 수요는 있다. 그러나 정신의 수요는 결핍되어 있다. 당연히 지식인에 있어서, 일종의 정신상의 수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신상의 수요는 최종적으로 역시 물질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물질상의 만족이 아니라 대중의 물질상의 만족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수요 자체는 왕왕 물질상의 수요가 압도하고 덮어버린다. 심지어 배제되기도 한다. 물질상의 수요가 첫번째이다. 이를 보면 독립한 인격이 없는 것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집단 속에서 생홣해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아직 집단에서 분리되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 집단의식의 가운데 머문다. 이것이 중국특색이다. 중국인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려서부터 집단의식 속에 있다. 이것은 오늘날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그러했다. 인류사회의 초기에 특히 원시시대에 집단의식은 있었고, 개인의식은 없었다. 원시사회의 사람들은 개인의식이 결핍되어 있었다. 심지어 사람의 이름조차 없었다. 아무렇게나 불렀다. 고정된 이름은 없었다. 인류는 최초에 확실히 집단과 일치했다. 원시시대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다. 혹은 천인미분(天人未分)이다. 하늘과 사람이 분화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원시인의 정신은 모두 집단적이다.


유교는 인류문명사회를 원시사회와 구분하게 했다. 중국에서, 유교는 사회를 처음으로 원시상태에서 문명사회로 끌어올렸다. 이것은 유교의 큰 공로이다. 그것은 하늘과 사람을 구분하기 시작했고, 하늘과 사람이 나뉘었다. 유가는 비록 천인합일을 얘기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하늘과 사람을 서로 구분했다. 그래서 도가는 나중에 유가를 질책한다. 유가는 하늘과 사람을 서로 나누었고, 갈라놓았다고. 도가와 유가의 구분과 쟁론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도가는 천인합일을 더욱 강조하고, 유가는 더 이상 합일이 아니다. 다만 유가는 즉시 시정한다. 즉, 나는 비록 하늘과 사람을 서로 구분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천인합일을 위한 것이다. 도가는 말한다. 그것은 허위이다. 천인합일이면 원래부터 합일이다. 왜 그것을 나눠야 하는가. 너는 총명과 지혜로 그렇게 많은 정치체제를 만든다. 예라든지, 법이라든지 이들 규범 이들 등급은 도대체 뭐하려는 것인가. 자연계는 이러면 이런 것이다. 이것이 도가의 유가에 대한 비판이다. 다만 유가는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중국고대사회를 원시사회에서 분리시킨다. 그것이 그의 큰 공로이다. 왜 유가문화는 주변의 민족들 속에 그렇게 큰 영향력을 지녔을까? 주변민족은 당시에 분명히 중원민족보다 낙후되었다. 어느 곳이 낙후되었는가? 바로 이 점이다. 중원의 이들 국가체제, 문물제도는 주변민족들이 탄복하게 만든다. 중원에는 규장제도가 있고, 예의법도가 있고, 아주 효과적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속속 모방한 것이다. 조선, 일본을 포함해서 고대에 그들은 중국을 모방했다. 그래서 유고는 하늘과 사람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고, 미신을 타파했다. 다만 한 가지는 타파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심하게 보존한다. 그것은 바로 집단의식이다. 유가가 한 모든 것은 집단조직에 질서있는 계통을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다. 원시사회는 비록 집단이지만 구분이 없었다. ㅈ[도가 없었다. 그것은 그냥 혼동체이다. 그러나 유가는 그것을 구조화한다. 방대한 국가를 만들고, 문물제도, 문명은 바로 이렇게 생겨났다.


다만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유교의 제도하에서, 중국인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집단에 매몰시킨다. 제도가 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자발성이 있으므로 원시인과 다르다.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집단의 구성부분이 된다. 나는 바로 집단의 유기적인 일부분이 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산다. 그러나 유가는 너로 하여금 의식하게 만든다. 너는 그 안에서 너의 고정적인 역할이 있다. 집단은 이미 너의 자리를 잘 배치해 놓았다. 너의 예의, 명분, 이런 것들이 모두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 중국인은 집단에 매몰되어 있고, 유가의 통치하에서 자발적이 된다. 다만 여전히 개인의식은 없다. 유가의 천인상분은 개체와 자연을 구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채집단이 자연계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자연계의 소떼, 말떼는 바로 집단이다. 그러나 그들은 등급과 위계질서가 없다. 그러나 인류사회는 등급과 위계질서가 있다. 다만 여전히 개인은 없다. 개인은 억업된다. 이렇게 제도화된 집단은 개인에 대하여 더욱 업격하게 억압하고 속박한다. 원시인보다도 훨씬 심하고, 개성은 없다. 원시인은 어떤 때는 일종의 영웅기개를 보이곤 했다. 일종의 야만적인 독립성을 보였다. 원시인들 속에는 개인영웅이 있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우리도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다만 그것은 원시시대의 그런 영웅개념과 이미 많이 달라졌다. 그는 개인의 성격, 능력, 역량, 용감에 의존하지 않고, 일종의 제도화된 것 일종의 관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유가는 군사장수라 하더라도, 가장 유명한 사람들은 당연히 유장들인데, 모두 문화의 훈도를 받았다. 그리하여 중국인의 영웅이 된 것이다. 무슨 개성은 필요없다. 그것은 그저 '필부'의 것이다. 그저 '대의(大義)를 알면 되는 것이다. 중국인도 정신을 얘기한다. 다만 이런 정신은 집단의 정신이다. 우리는 그저 자신이 집단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어떤 정신성이 부여된다 .이런 집단의 정신성은 개체영혼의 정신성이 아니라, 천지지간에 꽉 차있는 "호연지기"이다. 일종의 대의이다.


그렇다면, 일종의 정신이 천지지간에 쌓여 있다. 전체 자연계를 포함하여 모두 이런 대의와 호연지기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그것은 물질세계와 엄격히 구분되지 않는다. 이런 기는 실제로 일종의 감정상의 것이다. 정만어산(情滿於山), 의일어해(意溢於海). 전체 대자연은 우리의 이런 기, 우리의 이런 정으로 가득하다. 자연계에 대하여 일종의 이정(移情)된 심미심리상태이다. 그래서 중국의 이들 사대부들은 모두 시인이다. 모두 시를 쓸 수 있다. 당나라때 시로 관리를 뽑았다. 시를 잘 지으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의 자연계에 대하여, 만물에 대하여 시의(詩意)의 안광(眼光)를 가지고 대하게 만든다.


시의의 안광은 당연히 감정의 안광이다. 이택후(李澤厚)는 그것을 '정감본체론(情感本體論)'이라고 불렀다. 중국인은 모든 것을 감정으로 형량한다. 이런 감정은 유가사대부에게서 가장 근본적인 일종의 혈연의 감정이다. 음양, 효제,천지, 남녀를 포함하여, 이것은 모두 자연생식방면의 혈연성의 감정이다. 그들은 자연계 만물의 일종의 혈연관계에 이르게 만든다. 소위 "민오동포(民吾同胞), 물오여야(物吾與也)" 이것은 장재(張載)의 말이다. 그것은 만물이 나의 동포이고, 모두 혈연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만물과 나는 일체이고, 모두 통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은 후, 자연계로 되돌아간다. 우리 사람은 다시 자연계에서 태어난다. 천인합일. 전체 자연계는 나와 일체이다. 그래서 이런 감정은 천리와 천도질서를 규정한다. 중국인은 감정을 중시한다. 다만 이런 감정은 규정되어 있다. 특히 유가에서 규정되었다. 중국인은 감정을 중시한다. 걸핏하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이치를 따지지 않는 일이다. 논리를 따지지 않고 그저 감정만 얘기한다. 다만 이런 감정은 규정되어 있다. 유가는 뭐라고 규정했는가. 명분에 따라서, 예의에 따라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천지군친사(天地君親師), 삼강오륜, 이들 기초 위에서 비로소 감정이 있다. 그래서 중국인의 감정은 아주 괴이하다. 중국인은 감정을 중시한다. 그러나 왕왕 자연정감에 위반되는 일을 한다. 그것은 바로 중국인의 감정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원래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 다만 중국인은 아주 총명하다. 처음부터 감정을 규정한다. 네가 그의 아들이면 반드시 효도를 다해야 한다. 부모에 대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없으면 너는 대역무도하다. 바로 '짐승'이다.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은 모두 자신의 부모를 사랑한다. 다만 사실상 모든 사람이 그러하지는 않다. 어떤 살마은 자신의 부모를 미워한다. 그의 구체적인 상황, 그가 왜 원한을 품는지, 이런 원한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유가는 이런 길을 막아버린다. 그는 너의 부모이다. 너는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 그가 너와 부친을 죽인 원수라면 너는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부친을 죽인 사람에게 거두어져서 길러지고, 스무살이 되어서 돌연 진상을 발견하면, 그의 양부는 바로 그의 원수이다. 이는 고전소설에서 자주 묘사되던 것이다. 기실 이것은 부자연스럽다. 너는 그가 너의 부친을 왜 죽였는지도 모른다. 너의 부친이 죽을만한지 아닌지도 모른다. 도덕감도 없고, 정의감도 없다. 완전히 일종의 혈연관계가 자신의 감정을 결정한다.


중국인이 강조하는 감정이 실제로는 일종의 명분의 감정이다. 진정한 자연의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중국인은 감정을 아주 중시하는 것같지만, 다만 왕왕 중국인들은 아예 감정을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진정한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저 도의적으로 감정을 당연히 해야할 일만 하는 범위내로 한정시켜 버린다. 혈연감정은 실제로 사람을 집단과 연결시키는 불가결한 접착제이다. 중국민족은 바로 이런 것에 의존하여 응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응집력'이다. 중국민족은 감정이 있고, 태어난 국가 혹은 고향에 일종의 그리움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하나로 접착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천인합일을 얘기할 때 왕왕 주의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실제로 '인인합일(人人合一)'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은 왜 항상 천인합일이라는 것을 좋아할까. 그것은 바로 중국인의 '인인합일' 즉 집단의식 때문이다. 개인은 분리되어 나오지 ㅇ낳는다. 다른 사람과 연결시켜서 하나의 총체가 되어 분리불가능해진다. 다른 사람이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다른 사람이다. 우주는 나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이 우주이다. 이렇게 하면, 반대로 내가 무엇을 신앙하든지간에 기실 모두 나 자신을 신앙하는 것이다. 내가 외재적인 것을 신앙하는데, 그 외재적인 것이 기실 바로 나의 마음이다. 그래서 내가 그를 신앙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신앙하는 것이다 .내가 단지 나 자신만을 신앙한다면, 결국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의 자아감각만을 믿는다. 나는 이 자아감정을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아주 믿ㅡ며, 무조건적으로 그것이 천리, 우주를 대표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앙의 문제에서, 중국인은 필요한 겸허가 결핍되어 있다. 즉, 일너 신앙이 천도에 대한 신앙인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필요한 회의를 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믿는다. 나는 나 자신의 마음만 열면, 사심과 잡념을 버리면, 스스로의 감각이 좋으면 나는 이미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렇면 내가 바로 천도를 장악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믿고 있다.


그래서 유가문화에서는 특별히 "성(誠)"을 강조한다. "성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이다.(誠者, 天之道也), 성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誠之者, 人之道也)" 사람이 살면서 '성'은 필요하다. 다만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바로 이 '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는 성실을 얘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성실을 얘기하지 않을 때, 모든 사람은 스스로가 성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자신이 성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성실하지 않다고 여길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주관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필요한 겸허가 결핍되어 있다. 일종의 참회정신이 결핍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단 어느날 우리가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당연히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말해야 하고, 다른 살마의 운명을 결정하고, 다른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스스로 성인이나 구세주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인이나 구세주가 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정신과 진정으로 통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성인이 되려고 하고, 구세주가 되려고 하면, 먼저 해야할 것이 바로 자신의 내심과 타인을 격리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내심의 것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면, 그들이 내가 그들을 구원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나는 일종의 '기심(機心)'을 유지해야 한다. 주동성을 유지하여야 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유지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도모하면 그만이다. 내가 마음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추궁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저 천도에 성실하면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성실해서는 안된다. 인심은 막측하다. 부인지인(婦人之仁)으로는 큰 일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성인은 실제로 자신은 일종의 독립된 정신도 없고, 진정으로 무슨 사상도 없다. 그는 그저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하는 사람이다.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다. 백성들의 이익에 공헌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인은 바로 이런 높이 있는 사람이다. 너는 그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다. 다만 너는 그로 인하여 이익을 얻는다. 그래서 네가 숭배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의 조신운동(造神運動)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왜 그렇게 쉽게 신을 만들 수 있는가? 그의 사상을 너는 모른다. 너는 그래서 아주 신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너는 그가 아주 높다고 여기는 것이다. 기실 그는 아마도 그다지 높지도 않을 것인데. 다만,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네가 그의 사상이 아주 높고, 네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라고 여기기 때문에 신격화되는 것이다. 신격화되면, 너는 반대할 수가 없다. 성인은 반대할 수 없다. 성인은 모두 옳고 하나도 틀린게 없다. 그래서 그는 반대할 수 없다. 협상할 수도 없다. 네가 그를 반대하면, 너는 그 개인을 반대하하는 것이 아니라 천도에 반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천도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기실 성인은 자신의 정신생활과 정신추구가 없다. 그저 내심의 천도체험에 물질상으로 기술상으로 고려했을 뿐이다. 당연히 그는 경지가 아주 높을 수 있다. 그는 그저 백성들이 잘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간단한 바램이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실제상 기술즉으로 고려해보면 그는 마지노선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고상하다고 표방한다. 그래서 성인은 자주 일종의 위선으로 나타난다. 비열한 수단으로 고상한 목적을 달성한다. 이것이 바로 위선이다. 위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열한 수단으로 고상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체면있는 수단으로 체면없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전자는 성인의 위선이고, 후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예의를 따지고, 명분을 따진다. 선물로 감정을 얻는다. 선물은 무엇을 하기 위함인가. 선물은 바로 체면이다. 체면은 바로 위선이다. 체면은 돈이 된다. 체면은 정신상의 것일 뿐만이 아니다. 당연히 사람이 단순히 체면만을 위하여 뭐든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일상생활중에서 서로간에 선물을 보내고 받는 것은 기실 구체적인 목적이 있다. 오늘 술 한병과 담배 한 갑은 처장 혹은 과장에게 보내면, 그는 절대로 네가 단순히 예의상 그렇게 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진정한 목적은 모두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안다. 그저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말을 꺼내면 변질된다. 이런 '예의왕래'는 일종의 집단정신의 표현이다. 즉 나 개인은 자신의 일반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주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자신의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선물을 보내야 한다. 이것이 집단의식이 아닌가? 한 사람이 재능은 있지만,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의 재능은 아예 발휘할 수가 없다. 자신의 재능만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집단정신의 개인의식에 대한 속박이다. 개체독립성에 대한 속박이다. 당연히 이는 일종의 정신이다. 기실 이는 일종의 거짓정신이다. 다만 이런 정신이 있으면, 개체는 편리하게 된다. 즉, 나는 피안의 것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 무슨 고통이 있어도 좋고, 무슨 불편한 점이 있어도 좋고, 살아갈 수 없어도 좋다. 나는 집단 속에서 안위를 얻을 수 있다. 집단에게는 당연히 좋은 점이 있다. 집단은 따스함을 주고,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약간의 애정을 나눠줄 수 있다.


그래서 집단의식에서 중국인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좋은 점을 많이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월할 필요가 없고, 피안으로 안위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집단내에서 해결하면 된다. 안위를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안위를 얻지 못하고, 평생 고독하게 살면서 남에게 당하며 결국 한을 품고 죽는다고 치면, 죽을 때 그는 일종의 안위를 얻을 수 있다; 후인이 반드시 나의 원한을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이다. 그가 희망을 품는 것은 바로 집단이다. 문천상(文天祥)은 이런 말을 했다: 인생자고수무사(人生自古誰無死), 유취단심조한청(留取丹心照汗靑). 조한청은 바로 역사를 비춘다는 것이다. 역사는 바로 집단이다. 다음 세대, 후세의 사람을 포함한다. 그는 여기에서 안위를 찾는다. 굴원도 그러했다. 굴원은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러나 그의 <이소(離騷)>도 좋고, <천문(天問)>도 좋고, 모든 시문에서까지도 하나의 주제가 일관된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를 변명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오점을 씻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게 아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같이 그렇지가 않다. 나의 마음은 이렇게 저렇게 순수하다. 나는 초왕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충성심이 강하다. 나의 기질은 이렇게 고아하다. 나의 취미는 이렇게 고상하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이렇게 고심막측하다. 얼마나 현묘하냐 등등. 모두 이런 것들이다. 즉 그의 이런 것이 남아서, 집단내에서 공명을 이루기 바란 것이다. 그는 초월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세속을 초뤌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집단 내에서 그는 정신상의 안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중에 대대로 굴원을 기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모범을 수립한 것이다. 무릇 뜻을 얻지 못하면 그는 생각한다. 내가 바로 굴원이다. 특히 지식인들은. 그는 이 점에 일종의 안위를 받았다. 굴원은 나중에 명예회복되었고, 대대의 사람들이 그를 기념한다.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저울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참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굴원이후 그와 같이 자살한 지식인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러나 살마들은 굴원에게서 모종의 계시를 얻는 것이다. 즉, 너의 마음을 남겨서 역사를 빛나게 할 수 있다. 비록 신선이 되지는 못하지만 성인이 될 수는 있고, 사람들이 너를 기념하게 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자기 개인의 독특한 정신에 다시 일종의 피안에서의 안위를 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일 네가 개인을 버리지 않으면, 너는 집단 속에서 안위를 얻을 수 없다. 그저 피안에서 안위를 얻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경우이다.


기독교의 개인, 기독교도는 고독하다. 그는 집단 내에서 안위를 얻을 수 없다. 가정내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국가내에서도 황제의 표창을 받는 것에서 얻을 수도 없다. 기독교도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안위를 얻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한다. 너의 영혼이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는 하나님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개인이 독립된 후, 그는 그저 자신의 정신의 안위를 피안의 하나님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중국인에게는 필요없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에게 왜 진정한 신앙이 없는지는 결국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단 속에서 정신상의 평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개인이 독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체의식은 아직 집단의식속에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집단이 전체적으로 망했다고 여길 때, 그 자신도 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이익을 챙겨갈 때, 너는 아무 것도 챙겨가지 못하면 평형에 도달할 수 없다. 챙겨야 비로소 평형을 이룬다. 그래서 부패도 일종의 '군중심리' 즉 집단의식이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얘기한 것의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 필자가 보기에, 중국인들이 어떤 신앙을 가지게 될 것인가이다. 중국인들은 개체가 독립되어 있지 않다. 설사 현재 일종의 독립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신앙은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노신(魯迅)의 경우, 노신의 개체는 독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일은 "먼저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세운 후에 일을 해야 한다." 반드시 개인을 독립시켜야 했다. 그래서 노신의 정신은 개인독립정신을 대표한다. 그러나, 노신 본인은 여하한 종교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의 중국인이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대다수도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의 종교를 믿을 시기를 지나버렸다. 인류의 유치시기에는 비교적 쉬웄다. 기독교가 특히 아프리카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의 인류가 아직 유치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쉽게 받아들였다. 아랍인이라면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미 자신의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스스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중국인은 더욱 불가능하다. 중국인은 노모심산으로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무슨 하나님같은 것은 없다. 모든 사람이 '유물주의자'이다. 오늘날까지, 진정 신앙하는 것은 바로 돈이다. 그저 돈이 가장 진실하다. 돈을 위하여 천리를 해치는 것마저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중국인이 오늘날에도 진정한 신앙을 가질 가능성은 없지만, 그외에 일종의 우리의 곁을 따르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신, 무술(巫術)그리고 자연종교이다. 필자가 금방 얘기한 바와 같이, 미신, 무술같은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라고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여러가지가 섞여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안에 일종의 종교색채와 종교의식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이들 적브한 것은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비록 '유물주의자'이지만, 우리는 자주 어떤 불가사의한 것을 믿는다. 조금만 방심하면 미신으로 들어간다. 무술로 들어간다. 이것은 모든 중국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기나긴 역정을 거쳐야만 이런 원시적인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이다. 실용주의의 거짓신앙도 시시때때로 우리를 괴롭힌다. 개인숭배, 세속의 누군가를 신으로 숭배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신으로 숭배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아주 쉽다. 당연히 모택동의 세대는 흘러갔다. 현재의 지도자들은 모두 평민화되었다. 그들을 신으로 생각하지 ㅇ낳는다. 그러나 어떤 돌발적인 경우가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다. 우리는 아마도 보통사람을 구세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신으로 숭배할 수 있다. 왜나하면 미신에 열광하는 요소가 중국민족의 안에, 사상의식의 심처에 지상의 신을 바라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신통광대한 한 사람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을까? 이는 무협소설속에서 아주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항상 무공이 고강한 사람 혹은 무슨 '진경'을 얻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서 겁부제빈(劫富濟貧)하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불공정한 일을 보면 소리치며 달려나가서 손을 써서 공평을 찾아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만일 정말 그런 사람이 나타나고, 시대의 풍운을 만나게 된다면, 아마도 다시 신격화운동이 벌어질지 모른다. 즉, 중국인은 민족성 안에 이런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일생을 어떤 아주 탄복할 만하고, 숭배할 만한 사람을 위하여 목숨바쳐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인격에 기생하여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의 신앙이다. 이런 실용주의의 거짓신앙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아직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을 노신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는 이것을 국민성의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이 단순히 국민성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본다. 아마도 인간에게 보편적인 문제일 것이다. 인간은 이런 단계를 거친다. 서방도 맟나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이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중국인은 단지 전체적으로 더욱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ㅇ르 뿐이다. 우리는 너무 자랑스러워할 것도 없다. 우리는 자신의 결점, 약점을 확실히 꽤뚫어 보아야 한다. 당연히 우리는 대단한 것들이 많다. 다만 뼛속의 몇 가지는 아주 원시적이다. 예를 들어, 의화단컴플렉스. 그것은 아주 원시적이다. 설사 대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정서는 아주 보편적이다. 소위 '분청(憤靑)"이라고 부르는 일군이다. 분청은 기실 의화단과 아주 비슷하다. 그것은 감정원칙이다. 이 감정은 진정한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교육으로 너의 머리 속에 심어진 감정이다. 소위 '애국주의'는 기실 본위주의(本位主義)이다. 어느 것을 좋아하고, 어느 것을 미워할지가 어려서부터 정해져 있다. 이것은 이미 세를 이루었고, 고칠 수가 없다.그는 이것이 개인의 견해라고 말하지만,기실 근본적으로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심어놓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를 믿을 수 있을까?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혹은 또 다른 정신종교는 간으할까?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기공을 믿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열광이고, 일종의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앙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하에서, 필자가 교파를 초월하여 구체적인 어느 종교 위에 일종의 신앙을 건립하자고 하면, 그것은 소위 정신상의 신앙이다. 필자는 이런 가능성을 제기한다. 바로 '진선미(眞善美)'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인 정신가치에 일종의 신앙을 품는 것이다. 이들 가치는 절대적이다. 진선미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바로 이렇게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추구해도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진,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미 이런 것들은 추구해도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신앙으로 삼을 수 있다. 세속생활에서의 어뜬 진 혹은 어떤 선, 어떤 미를 너의 신앙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무한히 접근하는 과정이다. 진선미를 인류정신의 통일체이고, 그것은 인류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다. 인류 자신의 사명은 바로 자신의 본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특히 정신상의 본성을 전면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가 말한 사람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사람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뜬 일을 할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상의 추구를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신앙을 제기하는 것은 현재에 있어서, 그저 지식인의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사람들이 매일 자신이 먹을 것을 버느라 바쁠 때, 무슨 진선미를 믿겠는가. 그것은 공리공담이다. 현재로서는 비현실적이다. 그저 지식인들에게서 공명을 얻어내면 된다. 다만 그것은 확실히 이런 면의 작용이 있다. 즉, 그것은 하나의 절대가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피안의 것이다.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바로 그것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샐활에서의 영원한 표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시대, 민족, 각양각색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수천년동안 계속 바뀌었다. 오늘은 이것을 믿고, 내일은 저것을 믿는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내 생각이 이 방면에서 이렇게 고려해볼 수 있을 것같다. 다만 하나의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신앙을 수립하려면 개인이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생활과 정신추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너 개인으 ㅣ것이다. 당연히 이 개인은 폐쇄된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상 모든 정신적인 부에서 자신의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 진선미를 추구하려면, 그것은 인류가 수천 수만년동안 추구한 정신의 부이므로 너도 추구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폐쇄적이지 않다. 다만 독립적이다. 주위살마의 간섭을 받지 않고, 혼자서 내심으로 추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신생활을 완성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것을 하려면, 반드시 자아의식이 각성되어야 한다. 당연히 사상자유를 보장하는 체제가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노력하는 것이고, 건립하고 완비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