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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명교(明敎): 진정한 명교는...?

by 중은우시 2018. 7. 28.

글: 모검걸(毛劍傑)


일찌기 13세기에 이미 거의 사라진 신비한 종교가 놀랍게도 중국 동남연해에 완강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다를 건너왔을까, 아니면 사막을 건너 왔을까? 역사의 먼지는 이미 모든 것을 덮어 버렸고, 겨우 몇 개남은 황사잔원(荒寺殘垣), 몇권의 낡아빠진 책자만 있을 뿐이다. 잔존하는 기이한 풍속이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고대 명교의 천년성쇠는 점점 빙산의 일각을 노출하고 있다.


창남(蒼南)의 기이한 풍속의 비밀


절강성 온주시 창남현의 연해 염정(炎亭), 괄산(括山) 일대에는 천여년이래로 기이한 풍속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온몸에 하얀 소복을 입고 죽은 자를 위하여 제사지내며, 일부 어민들은 매일 아침에 반드시 소식(素食)에 백반을 세 입먹고서 그 후에 요리를 먹는다. 그리고 일부 노인은 지금까지도 아침에는 태양에 절을 하고, 저녁에는 달에 절을 한다.


현지인의 조상내력을 따져보면, 거의 모두가 민남(북건남부) 혹은 민동(복건동부)이다. 보편적으로 마조(媽祖)를 신봉한다. 그러나, 마조신앙에는 이런 풍속이 없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다른 종교에도 이런 습속은 없다.


현지에 혹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이미 사라진 종교가 전해졌던 것은 아닐까?


1982년, 절강성에서 제1차문화재 일제조사를 할 때 ,사람들은 민국의 <평양현지(平陽縣誌)>에 읍인(邑人) 공극표(孔克表)의 <선진사기(選眞寺記)>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선진사, 소린국(蘇隣國)의 교인들을 위한 집이다." 장소는 "평양남곽(南郭)으로 백심리를 가면 붕산(鵬山)이라는 산이 있다."


소린국은 고대 페르시아를 가리킨다. 소린국의 국교는 마니교이다. 송나라이후 중국화된 마니교가 바로 '명교'이다. 평양남곽은  이미 창남에 편입되었고, 금향(金鄕), 염정, 괄산일대이다. 바로 내력불명의 기이한 풍속이 전해지는 곳이다.


백의를 입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명교 교도들이 백의백관(白衣白冠)하는 풍속에서 유래된 것이고, 소식으로 백반을 세입 먹는 것은 바로 명교의 "장재(長齎)"풍속의 변통이다. 어민들은 오랫동안 바다에서 파도와 바람과 싸운다. 소식만으로는 체질을 강하게 만들 수가 없다. 술과 고기를 먹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세입의 백반으로 소식을 대체한 것이다.


명교는 수백년간 사라졌었는데, 일찌기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먼지에 쌓인 잔권에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한다.


고사(古寺)의 수수께끼: 논 속에 고립된...


1988년 봄, 평양현지의 주편인 임순도(林順道)는 창남(蒼南) 백사(白沙)의 외삼촌 장정광(張正光)의 집에서 새해를 맞이한다. 이 일을 얘기하자, 장정광 노인은 스스로 나서서 선진사를 찾으러 간다.

괄산의 아래에 있는 탕촌(湯村)의 바깥에 모양이 큰 새를 닮은 작은 산이 부지불식간에 장정관의 시선에 들어온다. 현지인들은 장정광에게 이 산의 이름이 '붕산'이라고 말해준다.

이제 선진사에서 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붕산의 아래에 있는 여러 사묘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배제한 후에도 선진사는 여전히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선진사는 일찌감치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

이때, 논 속에 홀로 서 있는 황색 담벼락의 평방(平房)이 장정광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둑길을 따라 좁은 길로 가까이 다가가니, 방문에는 큰 글씨로 "선진선사(選眞禪寺)"라고 적혀 있었다. 절의 앞에있는 폐당기(廢堂基)와 밭이 만나는 곳에 1미터 높이에 위에는 이끼가 끼어있는 석비(石碑)가 서 있었다. 추가로 석비를 확인하니 비에는 바로 "선진사기(選眞寺記)"라고 적혀 있었다. 비문은 현지(縣誌)의 기록과 일치했다.

선진사는 중국의 사묘가 산에 의지하여 건립되는 특징과 배치되었다. 거기는 일찌감치 불사(佛寺)로 바뀌었고, 규모도 아주 적다. 겨우 3간의 평방이 있고, 승려가 1명 있다. 절안에 마니교 풍격의 건축과 옛물건은 이미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겨우 9개의 기둥이 옛물건일 뿐이다.

선진사는 누가 지었는가? 언제 지었는가? 이것은 어떤 창상을 겪었을까?

<선진사기>의 낙관시기는 원(元) 지정(至正)11년(1351년), 당시 현지 팽씨(彭氏)집안의 팽여산(彭如山)이 선진사를 확장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선진사기>에는 반복하여 팽여산이 선조의 유언을 실현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절은 나의 조상이 만든 것이다." "나는 다행히 선조의 유서(遺緖)을 보존할 수 있었다."

1997년 1월, 임순도는 선진사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팽가보촌(彭家堡村)에서 1919년에 중수한 <팽씨종보>를 발견한다. 이 족보에는 <선진사기>가 전문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팽여산의 가계내력도 적혀 있다.

팽씨의 선조인 팽신(彭信)이 후진(後晋) 천복(天福)5년(940년) 지금의 복건성 하포(霞浦)에서 창남 금향의 붕산으로 이사를 온다. 팽씨8대조 팽중강(彭仲剛)(1143-1194)은 건도(乾道)2년(1166년) 진사가 되고, 일찌기 국자금승(國子監丞)등의 직위를 맡는다. 팽씨가족은 이로 인하여 흥성하고, 그 후에 관직에 나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선진사를 처음 지었을 때는 "고제박루(故制朴陋)"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팽여산이 건물을 확장한 직접적인 원인이다. 선진사는 팽씨집안이 아직 흥성하기 전에 만든 것이고, 팽여산도 이 절이 어느 선조가 지은 것인지는 몰랐다. 이를 보면 선진사를 건조한 자는 그가 성명을 잘 아는 가까운 조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족이 흥성하기 전, 팽여산의 근조가 생활하던 연대보다 이전, 북송 선화때 명교를 금하기 전, 이 세가지 요건을 가지고 추단해보면, 선진사의 건조연대는 늦어도 북송 선화이전이다.


내력의 수수께끼: 온주 명교는 어디에서 왔는가?


한 지방에 대규모로 신흥종교가 돌연 유행하려면 두 가지 원인밖에 없다: 하나는 조직적으로 전도한 것이고, 둘은 이민이 들어온 것이다.

지방문헌과 관련사료는 모두 명교 선교사가 온주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이민이 온주 명교가 흥기한 유일한 원인일 것이다.

명교가 페르시아에서 불원만리 온주까지 온 것은 오직 두 가지 경로뿐이다. 하나는 비단길을 따라 서쪽에서 중원으로 오고, 다시 남쪽으로 전래되어 온주에 이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해의 해상비단길을 통해 천주(泉州)에 상륙하고 복건을 거쳐 온주로 북상한 것이다.

온주는 역사상 대규모의 이민이 3번에 걸쳐 있었다. 당말오대 민동이민붐, 남송건도2년(1166년) 온주홍수후 관청이 동원하여 대량의 복건인이 절강으로 들어온 것, 명말청초 민남의 이민이 절강으로 들어온 것이 그것이다.

팽씨선조는 당말오대의 민동이민이고, 그의 조상의 거주지는 복건성 하포 일대였다. 이곳은 당시에 마니교가 유행하던 곳이다. 팽씨와 동시대에 창남으로 이주해온 임(林), 온(溫), 채(蔡), 진(陳), 서(徐)씨일족은 족보에 모두 선조가 명교를 신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명나라대 하교원의 <민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무종의 "회창멸불"에서 연대하여 마니교도 금지된다. 한 명교 승려인 호록법사(呼祿法師)는 복건으로 피난와서 계속 선교한다.

당시 해상비단길이 이미 번성하여, 많은 페르시아인, 아랍인이 천주에 와 있었다. 민절(복건절강)일대의 명교는 계속 흥성했는데, 이런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진사의 소재지인 팽가산은 지금의 금향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 금향은 민절교통요지로 횡양고도상의 중진이다. 그리고 바다도 가까워서, 역대이래로 "양절인후(兩浙咽喉), 팔민순치(八閩脣齒)라는 말이 있다.그러므로, 명교가 해로로 왔건 육로로 왔건 모두 이 일대를 교두보로 삼아서 다시 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흥성의 수수께끼: 명교가족신앙 투시

팽씨같은 가족이 대대로 명교신앙을 가진 것은 바로 당시 온주 명교신앙이 흥성했던 것을 보펴주는 축소판이다. 신중국이 성립되기 전에, 평양, 창남등지에는 소수의 농민이 명교를 신앙하고 있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온주명교의 전성기는 개략 북송때이다. 계통적인 교리와 규범적인 숭배의식으로 당시 온주의 12만호중에서, 정규명교사원 이외의 "재당(齎堂)"만 40여곳에 달했다. 소위 "재당'은 주민집에 설치된 신도모임장소를 가리킨다.

이미 확인된 정규 명교사원은 선진사와 10리 떨어진 곳에 1곳이 있다. 지금은 사라져서 고증할 수 없는 곳은 더 많을 것이다.

원나라때 사람인 진고(陳高)가 지은 <죽서루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온주의 평야에는 염정이라는 곳이 있다...잠광원(潛光院)은 명교(明敎)의 부도(浮圖)가 있는 집이다." 그리고 잠광원은 민국초기 <평양현지>를 편찬할 때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염정진 홍가촌(洪家村)의 91살된 노인 홍문광(洪文廣)은 그도 그런 절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성에서와 현에서 모두 사람이 와서 찾았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미 일치하여 인정한다. 홍가촌 오저(岙底)자연촌 대강산록의 한 대나무숲이 울창한 곳이 바로 잠광원의 옜터라고 본다. 앞에는 민방(民房)이 있고, 뒤에는 청나라때의 고묘(古墓)가 있다.

<죽서루기>에는 상세히 당시 잠광원 주변의 명교전파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때, 원안에는 명교의 상층승려인 석심상인(石心上人)이 거주하고 있었고, 하루종일 현지 사대부들과 "눈을 들어 하늘의 광활함을 보고, 눈을 내려 골짜기의 유심함을 보았다." 아주 풍치있고 우아했었다. 현지 사대부들도 석심상인을 높이 평가했고, 명교신앙에 대하여 긍정하고 존중했다. 당시 명교는 "구민(瓯閩, 절강남부와 복건을 가리킴)의 사람들이 많이 신봉했다"고 한다. 그리고 명교는 계율이 아주 엄격하였다; 절대로 소식해야 하고, 매일 1끼를 먹고, 낮에는 태양에 절하고, 밤에는 달에 절한다. 매일밤에 정해진 시간에 마니광불(摩尼光佛)을 참배하여야 한다

선진사와 잠광원 유줙지가 확인되기 전에, 학계에서 확인된 마니교 사원유적지는 단지 복건 진강의 화표산초암(華表山草庵)뿐이었다.


해바라기의 수수께끼: 명교태양숭배의 토템


한 사원은 모습을 바꾸었고, 한 사원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명교사원의 건조양식은 시종 알 길이 없다.

이때, 제3의 유적지가 사람의 시선에 들어온다. 그것은 평양의 북쪽 서안(瑞安) 조가촌진(曹家村鎭) 허오촌(許岙村)에 위치하고 있고, 이름은 "명교사(明敎寺)"이다. 서안시로부터 2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비록 "명교사" 세 글자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명교사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부족하겠지만, 허오 명교사의 산문(山門)은 두공(斗拱)이 없는 서양식구조이다. 문대(門臺)에는 "명교사" 세글자의 위로 태양과 그 광선도안이 있다. 바로 명교가 광명을 숭상하는 것과 들어맞는다. 절강남부에 유일하게 남은 아직 명교특징을 지닌 종교건축물인 것이다.

현지의 기록에 따르면, 명교사는 904년에 창건되었고, 당나라말기 "조애(曹靄) 형제가 복건 장계에서 조촌으로 옮겨와 정착한다. 그리고 쌍룡계의 가에 명교사를 지어서 법을 전하고 종교를 선양했다." 

이 절도 여러번 훼손되고 여러번 재건되었다. 32년전에 현임주지인 지명여사태(持明女師太)가 절에 들어올 때는 단지 1개의 산문과 모옥 1간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모옥도 비바람에 무너졌다.

그리고 명교사원의 신분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실물은 없을까? 지명여사태는 파격적으로 기자들에게 그녀가 비장한 것을 보여주었다. 그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두 개의 해바라기 쇄편(碎片)이다. 모두 산문의 정상에서 떨어져 부서진 것이다.

해바라기는 명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까? 임순도는 말한다. 그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상리로 추측하면, 분명히 태양숭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만일 확인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절이 확실히 명교사원이라는 실물증거가 될 것이다.


쇠퇴의 수수께끼: 불화(佛化),도화(道化)는 양날의 검이다


선진사, 잠광원이건 명교사이건, 모두 일종의 사라진지 오래된 쇠퇴하고 황량한 분위기뿐이다. 명교는 온주에서 어떻게 번성하고 다시 쇠락했을까?

마니교는 원래 불교의 교의를 흡수하여 창립된 것이다. 전파과정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마니교 전도사와 경전 번역자는 다시 마니교교의와 의식을 불교화한다.

694년, 페르시아 승려인 불다탄(拂多誕)은 마니교 경전인 <이종경(二宗經)>을 가지고 중국으로 온다. 명교가 정식으로 관방에서 전래된 것이다.

마니교가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불교와 도교에 의탁하여 생존한다. 돈황문서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은 바로 노자가 서쪽으로 가서 페르시아에서 마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주장이 중국도교경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마니교는 적극적으로 도교에 의탁한다. 도교도 적극적으로 마니교가 도교의 한 갈래가 되려는 것을 받아들인다. 당시 조정은 명교경전을 <도장(道藏)>에 편입시켰다.

당나라때 <회창멸불>이후 마니교는 중국화된 명칭으로 나타난다: 명교. 명교는 바로 완전히 중국화된 민간마니교이다. 교의도 이종삼제이론(二宗三際理論)에서 '청정광명대력지혜(淸淨光名大力智慧)"의 8글자로 바뀐다.

불교와 도교에 대한 의탁 및 자신의 교의가 쉽고 간명하여 명교는 만긴에 널리 전파된다. 송나라때부터 원나라까지 관청은 혹은 금지하고 혹은 풀어주었다. 다만 명교는 시종 끊기지 않았다. 그저 복건, 절강일대의 연해에 국한되어 전파되었다.

원나라때이ㅡ 명교는 합법적으로 전도할 권리를 갖는다. 그리하여 ㄱ다른 민간종교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전통적인 비밀활동형식의 "결사"도 공개 내지 반공개로 전환한다.

원나라때의 명교교도의 또 다른 활동방식은 바로 여세무쟁(與世無爭)의 사원식 수행이었다.

<죽서루기>의 명교도는 내향, 경건, 엄격했다. 오랫동안 명교도의 행적은 궤이하고 비밀스러우며 쉽게 선동당해서 거사를 일으킨다는 공중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사원식 수행의 명교도이다. 

역대이래로 농민반란에 참가하고, 관청에 반항한 명교도는 주로 민간비밀결사의 신도들이었다. 이들 민간비밀결사진도는 왕왕 동시에 다른 종교신앙을 흡수한다. 역대 봉건왕조 통치자의 눈에, 비밀결사의 민간종교신도는 반란분자와 동등했다. 모조리 '흘채사마(吃菜事魔)"(채소를 먹고 악마를 섬긴다)는 모자를 씌운다.

근래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방랍(方臘)의거는 명교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바로 명교도는 백(白)을 숭상하는데, 방랍의거군은 홍건(紅巾)을 표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회과학원의 마서사(馬西沙), 한병방(韓秉方) 두 교수는 <중국민간종교사>에서 방랍군이 홍건을 두른 것은 바로 그중에 미륵교(彌勒敎)등 기타 민간종교와 융합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 후의 원말의 백련교(白蓮敎)의 난도 마찬가지이다.

명나라초기, 민절 두 곳은 이미 중국에서 겨우 남은 명교신앙지역이 된다. 이때의 온주명교는 여전히 활발했다. 그리하여 관청의 주목을 끈다. 절강안찰사검사 응정(熊鼎)은 명교가 국호를 범했다는 핑계를 대어 금지시킨다. 명나라황제는 조서를 내려, "명교, 백운종회(白雲宗會)등은 우두머리를 교형(絞刑)에 처한다." 명나라는 명교활동을 명시적으로 금지했다.

공개활동권리를 잃은 명교는 마침내 명나라중엽이후 점차 불교 및 기타 종교와혼동하고, 더 이상 외관으로 식별할 수 없게 된다.

명교는 불교,도됴에 의탁하면서 완강한 생명력을 지녔으나, 결국은 불교,도교에 의존하여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이 불가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