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계합(張繼合)
청나라의 명신 증국번(曾國藩)은 일찌기 정국을 장악한 바 있고, 제자를 무수히 거느렸다. 아쉽게도 그의 생명은 그다지 긴 편이 아니었다. 확실히 이 호남인은 일찌감치 골치아픈 질병을 앓고 있었다. 최소한 그는 일찌기 평생을 괴롭힌 피부병을 앓았다. 말년에 그는 다시 실명증상을 겪는다. 이 두 가지 병은 그의 건강에 가장 엄중한 타격을 가한 것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그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더욱 괴이한 '괴질'이다. 그것은 아주 신비한 '고도우울증'이다.
<청사고>를 다 읽어볼 필요도 없이, <증국번일기>만 보더라도, 그를 괴롭힌 골치아픈 일들을 알아낼 수 있다. 기실, 증국번은 강대한 의지력으로 관리로서의 직무를 수행해왔는데, '천진교안(天津敎案)'을 겪으면서 그는 거대한 압력을 받고, 또한 억울함을 당했다. 그리하여 '매국노'라고 욕을 먹게 된다. 그외에 북경 호광회관에 걸려 있던 "도광무술과회시중시제삼십팔명진사, 전시삼갑제사십이명,사동진사출신"의 편액이 누군가에 의해 깨져버린다. 증국번 본인도 여러번 말한 적이 있다. 이 사건은 대외적으로 "지나치게 유화적이었고(過柔)", "마음 속으로 미안함이 있었고(寸心抱疚)", "외참청의(外懺淸議), 내구신명(內疚神明)"이라고. 이 강력한 타격을 받고나서, 조정은 그로 하여금 '양강총독'으로 다시 돌아가게 했는데, 놀라운 일은 1년반 후에 그가 남경에서 병사하고 만 것이다. 확실히 세상사람들은 그의 사망의 진상에 관심이 컸다.
증국번은 1872년 음력 이월 초나흘에 사망한다. 그의 일기를 뒤져보면, 이 정치가의 사망상황을 알아낼 수 있다.
정월이십일일: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졌고,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 저녁에 오랫동안 잠을 잤다."
정월이십육일: "오는 도중에 정신이 맑지 못해서, 혼수상태인 것같았다. 가마 옆의 과십합(戈什合, 호위무사)에게 말을 하려고 했으나 오랫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서문 관청에 도착하여 매소암 방백과 얘기하려 했으나 다시 오랫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중풍에 걸린 것같았다."
정월이십구일: "최근 들어 글을 쓰고 싶어도, 마음이 흐리멍텅하여, 쓸 수가 없다."
이월 초이틀: "손으로 붓을 들었는데 떨리고, 말을 하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의 일기는 1858년 육월부터 시작하여, 1872년 이월 초사흘까지 썼다. 증국번의 만년은 마치 늙은 나무 한 그루와 같아 연민의 정을 느끼게 만든다.
기실, 동치4년 구월, 증국번은 계속하여 불면증에 시달려, 심신이 피로했다. 심각한 수면부족으로 그의 정신은 많이 망가졌다. 이와 동시에 일종의 정신적 우울증이 그를 괴롭힌다. 불면은 직접적으로 신경피로, 신체피로, 대사율저하를 가져왔고, 나이가 점점 더 들어가면서, 엄청난 고독과 의기소침으로 이 만청의 중신은 더욱 무기력해진다.
증국번의 고뇌가 병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절대로 정무가 번잡해서가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말년의 창상이다. 그는 일찌감치 발견했다. 가신이 분투한 것이 결국 역사의 조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정말 중요한 것은 피부병이나 불면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심에서 온 것이었다. 아주 강력한 우울증이다. 그의 일기만 보더라도 이는 확실히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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