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회독서주보
청나라때 정국번은 관료로서의 처신에 정통했을 뿐아니라, 청나라의 군사가, 이학가, 정치가, 서예가, 문학가이다. 나라를 다스리고, 군을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고, 교육하는 방면에서 모두 큰 업적을 남긴다. 그의 사상과 모략은 사람으로서의 처세의 도리로 후세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도성 천경이 함락된다. 태평천국 농민의 난이 실패로 끝난 것이다. 동시에 증국번이 이끄는 상군이 태평군과의 십여년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실 증국번의 동생 증국전이 상군을 이끌고 천경을 함락시킬 때, 많은 사람들은 이미 최종결과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식견있는 인사들은 이런 결과를 알아볼 수 있었으므로, 이처럼 암중으로 움직이는 흐름이 있게 된 것이다.
일찌기 2년전에 상군이 안경(安慶)을 함락시킬 때, 증국번은 양강총독부를 안경에 설치한 후, 당시 강절순무였던 좌종당은 사람을 보내 비밀서신을 증국번에게 건넨다. 비밀서신에서 좌종당은 무엇을 얘기했을까?
우리는 좌종당은 증국번과 평생 아웅다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좌종당은 스스로 누구보다 총명하다고 여겼고, 세상사람들은 그를 기사(奇士)로 보았다. 임칙서(林則徐), 도주(陶澍)같은 명신들도 그를 "국사(國士)"로 대했다. 청나라말기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천하는 하루도 호남이 없으면 안되고, 호남은 하루도 좌종당이 없으면 안된다." 그러나 좌종당은 과거운이 좋지 않았다. 그는 증국번이 자신보다 많이 멍청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증국번은 과거에 쉽게 합격하고, 자신은 거인(擧人)조차도 겨우 된다. 그러다보니 운명이 불공평하다고 탄식했고, 어느 정도, "기생유(旣生瑜), 하생량(何生亮)"의 느낌이 있었다. 죄종당은 이런 심리를 지녔기 때문에 항상 증국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증국번은 말솜씨가 좌종당만 못해서, 말로 싸우면 항상 좌종당에게 밀렸다. 그래서 증국번도 좌종당은 극성(克星)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극성이 사람을 시켜 비밀서신을 자신에게 보낸 것이다. 좌종당이 호림익(胡林翼)을 통하여 증국번에게 전하게 한 서신의 내용은 학정격제신정산련(鶴頂格題神鼎山聯)이었다: "신소빙의(神所憑依), 장재덕의(將在德矣). 정지경중(鼎之輕重), 사가문언(似可問焉)"
특히 하련의 "정지경중, 사가문언"(정의 경중을 물어볼 수도 있을 것같지 않은가)라는 문구를 증국번이 보고는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문정(問鼎)이라는 것은 문정중원, 문정천하의 뜻 즉,천하를 노린다는 뜻이다. 좌종당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어떻습니다. 형님. 천하대세가 이미 분명해 졌습니다. 태평군도 얼마 못버틸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장기적인 목표를 가져야하지 않겠습니까. 그 목표는 바로 태평군을 무너뜨린 기세를 이어 바로 만청에 반란을 일으켜 천하를 빼앗는 것입니다. 평소에 나 좌종당이 그대와 아웅다웅했지만, 만일 그대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나는 당신이 편이 될 것이고, 당신을 큰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증국번은 이 비밀서신을 본 후에 얼굴색이 침중해졌고,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한참이 지나서야 붓을 들어 이 여덟 글자중 한 글자를 고쳤다고 한다. 그리고는 호림익에게 건내주었다. 호림익은 다시 좌종당에게 건네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좌종당은 증국번의 회답을 읽어보는 냉소를 날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한 글자를 고친 비밀서신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증국번은 도대체 어느 글자를 고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似)"자를 "미(未)"자로 고친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정지경중(鼎之輕重), 미가원의(未可問矣)"가 되었다. 그 뜻은 아주 명확하다: "동생, 나는 이미 큰형을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더 이상 나에게 미련을 갖지 말라. 나는 그저 전설이다. 이런 반란같은 일은 내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호림익은 이 서신을 전달할 때 그 자신의 말도 한 마디 붙였다고 한다: "일사일미(一似一未), 아하사비(我何詞費)". 이는 그도 좌종당과 마찬가지로 증국번에게 반란을 권했지만, 증국번이 글자를 고치면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마음을 표시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할 말이야 없지만 호림익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따로 비밀서신을 써서 증국번에게 보낸다. 서신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동남반벽무주(東南半壁無主), 아공기유의호(我公豈有意乎)"
그 뜻은, 천하를 취하지 않겠다면, 최소한 우리 상군은 동남을 점령할 수 있으니, 장강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 가질 수는 있을 것인데, 그대가 뜻이 있다면 우리 상군의 아래 위는 모두 그대의 뜻을 따르겠다. 그러나, 증국번은 그 말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증국번의 수하의 수군총사령관이면서 청나라말기 정계에서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청렴한 기남자인 사나이 팽옥린도 사람을 시켜 증국번에게 서신을 보낸다. "동남반벽무주(東南半壁無主), 노사기유의호(老師豈有意乎)". 단지 호림익의 말을 두 글자만 바꿨을 뿐이다. 이를 보면 좌종당, 호림익, 팽옥린간에는 모두 묵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증국번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세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이다. 호림익, 팽옥린의 뜻은 천경을 함락시킨 후, 대군을 이끌고 장강을 넘어 북경으로 쳐들어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실력이면 동남반벽강산은 장악할 수 있고, 청나라조정도 우리를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증국번은 팽옥린의 반란을 권하는 서신을 읽은 것은 자신의 장수선에 타고 있을 때였다. 당시 곁에 있던 심복부하인 내순무관(內巡撫官) 예인개(倪人塏)의 회고에 따르면, 증국번은 서신을 읽은 후, 연이어 말했다: "말도 되지 않는다. 말도 되지 않는다. 설금도 이렇게 나를 시험하는가? 역겹다. 역겹다." 말을 마치고는 서신을 구겨서 입에 집어넣고 씹어 삼겼다고 한다. 얼마후 또 한명의 천하에 유명한 대명사가 상군대군영으로 가서 증국번을 만난다. 그는 바로 나중에 <상군지>를 쓴 왕개운(王闓運)이다. 왕개운의 학문은 아주 컸고, 신해혁명후 일찌기 청사관의 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신의 가장 뛰어난 학문이 제왕지학이라고 여겼다. 즉,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왕이 되고 패자가 되어 천하를 쟁패하는지 가르키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가 증국번에게 달려가서, 두 사람은 문을 걸어닫고 패왕지도를 논한다. 증국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왕개운은 줄줄이 말을 한다. 왕개운에게는 종횡가의 풍모가 있었다. 그는 설득력있게 증국번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에 오르는 길이 바른 길이라고 말한다. 왕개운은 말을 하면서 증국번이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눈썹을 찡그린채 손가락에 찻물을 묻혀 차탁에 계속 뭔가를 쓰고 그렸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인이 들어와 손님이 내방왔다고 보고한다. 증국번은 그 말을 듣자 왕개운에게 공수(拱手)를 하고는 말한다; "선생은 잠시 앉아계십시오. 내가 나갔다 바로 오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혼자서 나갔다.
왕개운은 그제서야 증국번이 차탁에 찻물을 묻혀서 쓴 글자가 모조리 "망(妄)"자라는 것을 발견한다.
왕개운은 더 이상 말해보아야 소용이 없다고 여기고, 그 자리를 표연히 떠난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상군지>를 쓸 때, 정서적으로 증국번에 대하여는 반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반란권유는 개별행동이 아니라 집단행동이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상군이 천경을 함락시킨 후, 청정부는 상군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강북 각지의 녹영과 팔기는 모두 긴장하여 방어배치를 하고 있었다. 청정부는 바로 흠차대신을 남경으로 보내어 명목상으로는 포상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암중으로 조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천경을 함라기킨 상군장수 증국전은 비록 증국번의 친동생이지만, 병사들이 약탈하도록 놔두고 홍수전의 아들 홍천귀복이 도망치도록 하여 조정의 비판을 받는다. 그외에 호부에서는 상군의 장부를 감사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상군의 내부는 인심이 흉흉해진다. 특히 증국전의 부대는 증국번을 옹립하여 예전의 송태조의 '진교병변, 황포가신'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증국전(曾國荃), 좌종당(左宗棠), 팽옥린(彭玉麟), 포초(鮑超) 이 네명의 고위층인물은 남경의 현무호에서 일찌기 밀모를 한 바 있다고 한다. 현무호회의로 불리는 모임이다. 그후 증국전은 30여명의 상군(湘軍) 고급장령을 이끌고 증국번을 만난다. 증국번은 동생과 부하들의 의도를 잘 알았다. 그래서 핑계를 대고 만나주지를 않았다. 이들은 증국번이 만나주지 않자, 흥분하여 계속 사람을 집안으로 들여보내 만나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증국번은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반나절을 대치한 후, 증국번은 대련을 하나 보낸다. 모든 사람들은 이 대련을 본 후에 어떤 사람은 탄식하고, 어떤 사람은 고개를 흔들고, 어떤 사람은 감탄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증국전이 한 마디를 한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오늘의 일은 이후 절대로 꺼내서는 안된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 증노구가 혼자서 담당하겠다." 이렇게 하여 모두 흩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증국번은 도대체 무슨 대련을 보냈던 것일까? 무슨 대련이길래 그를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던 장수들이 기꺼이 흩어진 것일까?
그 대련은 아주 유명하다: 상련은 "의천조해화무수(倚天照海花無數)", 하련은 "유수고산심자지(流水高山心自知)".
일반인들은 이 유명한 대련이 증국번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 이 대련은 집련(集聯)이다. 상련은 소동파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고, 하련은 왕안석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증국번은 그중의 한 구절씩을 취해서 함께 놓았고, 묘대천성(妙對天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련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떻기에 그렇게 흥분했던 모반을 주장하던 자들이 포기를 하게 되었을까?
하련의 "유수고산심자지"는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다. 관건은 상련의 "의천조해화무수"이다. "의천"은 아주 높은 곳에 선다는 뜻이다. 하늘을 등에 지고 있다는 것이니 얼마나 높은 곳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라보는 것은 백천해납의 바다이다. 이 모습은 어떤 모습일가? 태양이 바다 위에 비치고, 기상만천(氣象萬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기산만천이지만,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은 하늘을 등지고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더 기궤하고 더 놀랍고, 더 유혹스러운 장면도 그의 뜻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련에서 '심자지'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아는 것은 바로 '고산유수'의 경지이다. 일반인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증국번의 이 대련에서 얘기하는 것은 자신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킬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도 명확히 설명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마음 속에 견지하는 것이 있고, 스스로의 인생의 경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 '화무수'같은 일반적이 아름다운 광경은 나에게 아무런 유혹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증국번이 마음 속으로 견지한 경지는 도대체 무엇일가?
내가 이해한 답안은 간단한 두 글자이다: 신앙.
증국번은 당시 일개 서생으로 군을 이끌었다. 거병때 출정격문에서 말한 바 있다. 그는 "공자, 맹자가 구원에서 통곡할 것이다. 무릇 글을 읽고, 글자를 아는 자라면 어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며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전통유가문화를 구하기 위하여 일어섰지, 낡아빠진 청왕조를 위하여 거병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증국번은 확실히 고대유생의 우충(愚忠), 우효(愚孝)의 윤리사상이 충만하다. 그가 청나라조정을 반대하지 않은 것은 우충, 우효사상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역사적배경을 놓고 보면, 그의 이런 우충이 최종적으로 지향한 것은 봉건군왕이 아니다.오히려 유가문화에 대한 충성이다. 유가에서 제창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인생이상과 신앙에 대한 충성이다.
그래서 그는 극기수신하고 일생을 계속하여 자성하고 학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생활습관으로 삼는다. 그가 관료로 정치에 참여하고,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동시에 무수한 가서를 쓰고, 무수한 가훈을 남긴 것은 바로 유가문화의 '제가'는 '수신'에서 '치국평천하'로 가는 가장 중요한 교량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이런 표준적인 유생이 볼 때, 정천입지의 '사대부'가 되려면 민족문화의 허리가 되려면, 자신이 잘해야할 뿐아니라, 전체 가족을 잘 이끌어야 한다. 소위 '국가'는 중국인이 보기에 집안이 있어야 비로소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비로소 집안이 있기 때문이다. 집안과 나라는 같은 구조이다. 그래서 '제가'를 하여야 '치국'을 할 수 있다. 집안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나라를 어찌 다스리겠는가? 그래서 증국번은 전쟁터에 나가서 바쁜 와중에도 대량의 심혈을 기울여 가정교육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교육의 지혜를 사회교육의 층면으로 발전시킨다.그는 이런 지혜를 이용하여 제가를 하였을 뿐아니라, 구국을 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생전에 그의 <증국번가서>를 출간한다. 그래서 그의 가훈은 가족을 교육시키는 것뿐아니라, 일대의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학대가 전목 선생이 '교육가'라고 말한 이유이다. 이는 바로 그의 가훈이 '천고제일가훈'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이다.
이렇게 강렬한 유가색채를 지닌 정신적인 추구와 신앙의 견지는 증국번에게서 최종적으로 하나의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즉 반란을 일으키느냐 마느냐의 선택이다. 영웅이 되느냐, 성현이 되느냐?
증국번의 답은 명확했다. 의천조해화무수, 패업웅도는 추구하지 않는다. 유수고산심자지. 성현사업은 불후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웅이 되기를 아예 선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내심에는 일찌감치 성현이 되는 것을 선택하였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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