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풍(惠風)
중국민혁(民革)의 창시자이자, 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전 중국전인대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이제심(李濟深)의 아들 이패요(李沛瑤)가 1996년 봄에 호위무경에 의해 칼로 난자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패오의 관직은 민혁중앙주석을 거쳐 제8기 전인대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이패요의 피살은 중남해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일시에 여론이 비등했다. 이는 1949년 신중국건립후 최초로 국가지도자가 피살된 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북경의 치안과 국가지도자들의 호위에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중국의 당매체인 인민망은 2003년 8월 1일 이패요 피살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1996년 2월 2일 새벽 4시경, 이패요의 집주변을 지키는 무장경찰 전사 장금룡(張金龍)은 당직인 기회를 이용하여, 몰래 이패요의 집으로 들어가 도둑질을 하다가 이패요에게 발각된다. 장금룡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겁이나서 죽여서 입을 막기로 하고, 과도로 이패요의 머리등을 힘껏 베었다. 이패요는 맞서 싸우다가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고, 급성대출혈로 사망한다.
이패요의 동생 이소동(李篠桐)은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무경호위의 이름은 장금룡이다. 그는 물건을 훔치다가 형에게 발각되었다. 그 아이는 겨우 16,7세였고, 아주 잘 생겼다. 속눈썹이 특히 길었다. 부모는 이혼했고, 교육을 잘 받지 못했다. 그는 상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격투술에 뛰어난 것으로 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형에게 써먹었다. 나의 형은 63세였고, 그를 막으려 했지만, 그는 일의고행(一意孤行)하여 형을 살해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알려진 바로는 이패요의 시신의 겉에는 상처가 많았고, 혈육이 모호했다. 얼굴에는 모두 6군데의 칼에 맞은 상처가 있었는데, 얕은 것은 피부만 그었지만, 깊은 것은 뼈까지 닿았다. 얼굴에는 15개의 그은 상처가 있었고, 뒷머리에는 2줄의 벤 상처가 있었다. 깊이는 모두 두개골에 닿을 정도였다. 목부위의 손상이 가장 심했는데, 모두 25개의 칼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 좌측 설골대각(舌骨大角)은 베어서 끊어졌고, 좌측 경정맥도 잘려서 세조각이 되었으며, 기관지, 식도, 갑상선등의 장기도 여러 곳이 잘렸다. 흉부, 복부와 등에도 피부찰과상이 있었다. 그외에 두 어깨와 두 팔, 두 손에도 모두 2개의 상처가 있었다. "깊이는 피부근육까지 이르렀는데, 가장 심한 것은 왼손 중지를 완전히 잘라버렸다."
찰과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조성한 손상"이다. 분명히 과도같은 류의 흉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장에서 발견된 과도는 이런 상처를 내기에 충분했다. 검시의 초보적인 결론은 "이패요가 다른 사람이 휘두른 과도에 상처를 입었고, 급성실혈성 쇼크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살인범 장금룡은 사건후 절취한 700여위안의 인민폐 그리고 가치 2.6만위안의 카메라, 가죽옷, 손목시계, 악세사리등 물품을 가지고 도망칠 때, 다른 두 명이 무경당직인원이 이상하다고 여기고 그 자리에서 그를 붙잡아 공안에 넘겼다.
1996년 5월 2일, 이패요를 살해한 흉범 장금룡은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집행했다.
장금룡사건이 발생한 후 중국정부는 관련책임인사들에게 문책결정을 내린다: 무경부대 사령원, 중장 파충담(巴忠倓)은 면직되어 퇴역한다.
무경부대 정치위원 장수전(張樹田)은 난주군구 부정치위원으로 좌천되고, 부사령원 왕문리(王文理) 소장, 안교구(安鮫駒) 소장, 부정치위원 서계보(徐桂寶) 소장, 장금장(蔣金鏘) 소장은 전부 퇴역한다. 무경부대 부참모장 겸 무경북경시1총대 총대장 맹진덕(孟振德) 소장, 정치위원 장세원(張世瑗) 대교(大校, 대령)등은 면직, 퇴역된다.
범인 장금룡은 고향에서 무경에 들어오기 전에 절도사건이 있었다. 입대때 정치심사가 엄격하지 못하여, 범죄행위를 저지른 전과범의 입대를 비준했던 것이다. 산서성군구와 노성현(潞城縣)은 각각 정치심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장금룡이 입대할 때 정치심사를 담당했던 산서성 노성현의 인민무력부장, 당시 정치심사를 책임졌던 현지 파출소장은 각각 당기정기처분을 받고, 군사검찰기관과 지방검찰기관에서 각각 체포하여 군사법원과 지방법원에 기소하여 형사책임을 물었다.
이패요가 장금룡에게 피살된 사건이 벌어진 후, 중국정부는 무경부대의 지휘관을 철저히 교체한다. 국방대학 부교장 양국병(楊國屛) 중장(1998년 처음으로 무경 상장을 수여받음)이 사령원을 맡고, 난주군구 부정치위원 서영청(徐永淸) 중장이 무경부대 정치위원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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