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창평군(昌平君): 진나라의 상국이며,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그는 누구인가? (2)

중은우시 2018. 8. 3. 17:37

앞에서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기본적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창평군의 신세내력 및 그가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개략의 상황, 그리고 이신이 초를 토벌한 사기기록의 문제점까지.


이어서 우리는 진나라의 제2차 멸초전투의 과정을 보도록 하자. 그리고 창평군의 최후는 도대체 어떠했는지를 보도록 하자.


영정은 이신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먼저 진노한다. 그 후에는 왕전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나중의 강퍅자용하는 진시황의 모습과는 달리 젊었을 때의 영정은 아량과 흉금이 있는 군주였다. 자신의 잘못을 발견한 후, 진왕은 사자를 보낸 것도 아니고, 직접 자기가 수레를 타고 왕전의 고향인 빈양으로 간다. 그리고 은퇴하여 집에 머무는 왕전에게 사과한다.


이하는 <백기왕전열전>에 기록된 두 사람의 대화이다. 대체로 이러하다:


영정: 과인이 당초에 노장군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이신이 과연 패전하여 나라를 욕되게 했습니다. 현재 초나라의 군대는 매일 서쪽으로 공격해오고 있는데, 장군께서 비록 병이 들었지만 어찌 나를 내버려두고 모른체 하실 수 있겠습니까?


왕전: 노신은 병이 들었고 게다가 나이도 많아서 흐리멍텅합니다. 대왕께서는 다른 뛰어난 장수를 구하시지요.


영정: 과거의 일은 꺼내지 맙시다. 노장군은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십시오.


왕전: 대왕께서 반드시 노신을 기용하셔야 겠다면, 60만대군이 아니면 절대로 안됩니다.


영정: 과인은 모두 노장군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래서, 왕전은 다시 진나라 군정무대의 중앙으로 나선다. 명을 받아 60만대군을 이끌고 나간다. 이것은 진나라의 모든 것이다. 전민개병이므로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포함되었다. 영정의 마음 속에 걱정이 없다면 그것은 말이 안될 것이다. 어쨌든 천하를 아직 얻지 못했고, 나라의 모든 병력을 한 사람의 손에 넘기는 것이니까. 누가 그 입장이어도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왕전은 자연히 영정의 우려를 잘 알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공개적으로 터트려서는 안된다. 그래서 왕전은 한가지 방법을 생각한다. 출발전에 매일 영정에게 봉상을 요구한다. 그 자신은 늙어서 더 이상 많이 누릴 수 없으나, 그의 왕씨집안은 자손이 많다는 것이다. 진나라 법제에 따라, 비록 공신의 자손이더라도 자신에게 군공이 없으면 부귀할 수 없다. 그래서 왕전은 이 기회를 빌어 영정에게 자신의 자손들에게 전답을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 출병하기 전에도 요구하고, 군대가 이미 출발한 후에도 계속하여 사자를 보내어 영정에게 요구했다. 군사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진왕에게 이렇게 알리기 위함인 듯했다: 보스, 당신이 우리 왕씨집안에 주기로 한 전답은 반드시 주어야 합니다. 공수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결과 영정이 헛웃음을 지었을 뿐아니라, 부하들마저도 눈꼴시려했다. 누군가 그에게 미렇게 말한다: "장군께서 여러번 대왕에게 돈을 달라 땅을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왕전이라는 늙고 교활한 장군은 이 어린 친구를 보고 한 마디 한다: "넌 모른다. 우리 대왕은 의심이 많다. 지금 전국의 군대를 모두 나에게 내주었는데, 내가 계속 그에게 자손들을 위해서 돈이고 땅이고 달라고 하지 않으면, 그는 내가 딴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할 것이다."


왕전은 역시 늙은 미꾸라지이다. 너 영정은 내가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하고 있지 않느냐. 그럼 나는 그저 내가 재물을 탐하는 것처럼 보이겠다. 내 스스로 재물을 탐할 뿐아니라, 자손후대를 위해서도 요구하겠다. 이렇게 하면 나 왕전은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스르로 왕이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ㄴ 것이다. 동시에 나의 자손후대도 진나라에서 보스의 아래에서 생활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전의 이 방법은 고금이래로 많은 대신들이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하여 관용적으로 쓰는 방식이 된다. 자오(自汚). 나중에 한나라의 소하도 그의 보스인 유방에게 유사한 방법을 썼다.


그래서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이 일을 가지고 진왕정을 비판한다. 그가 너무 각박하다는 것이다. 왕전과 같은 좋은 사람을 믿지 않다니,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실 왕권시대에 어떤 국왕이라도 병력을 쥐고 있는 대신, 권신을 의심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물며 왕전은 진나라의 모든 병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일은 권력이 결정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군주라면 의심해야 한다. 영정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정과 왕전의 행동을 보면


첫째, 진나라는 정식으로 제2차 멸초지전을 일으키기 전에 확실히 한동안의 정책조정과 징병, 징량, 훈련등을 거쳤다. 이것은 또한 초나라에게 숨쉴 여유를 주었다.


둘째, 초나라는 이때 확실히 이미 병력을 일으켜 진나라가 지배하고 있는 원래의 초나라 옛땅을 공격했다. 분명히 영정이 이후에 말한 "나의 남부를 쳤다"는 것이 이것일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바 있지만, 병력을 일으켜 남부를 친 것은 자립위왕한 창평군이다. 항연이 이끄는 초군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그들은 남부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먼저 초왕 부추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나중에 항연이 기현에서 피살된 상황을 보더라도, 항연이 이끄는 부대는 방어하는 징ㅕㄱ이 주로 수수(睢水)유역, 영수(潁水)북안 일대이다. 왜냐하면 이곳에 군사를 배치하는 것이 수춘을 방어하는데 더욱 유리하기 때문이다. 당시 영진의 귀속은 실재로 확인하기 어렵다. 왕전이 초나라를 공격하는 것도 영천군에 군대를 집결시켜 출발했으므로, 영진의 당시에 진나라가 장악한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항연이 통제했는지, 창평군의 손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당시의 남군, 남양군 및 영진을 핵심으로 하는 수수, 영수, 여수유역의 광대한 지역은 모두 일종의 톱니처럼 교차하는 태세였을 것이다. 진군, 창평군부대, 항연부대가 모두 분포되어 있고, 각자 일부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 진군과 초군의 사서에는 각자의 원인으로 이 특수한 역사시기에 대하여 자세히 적고 있지 않아서, 후인들이 이 점을 충분히 알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당연히, 사서에 기록한 것이 모호하여, 우리는 이미 창평군의 부대가 어느 정도로 초국의 옛땅을 회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중에 왕전의 부대가 여전히 이신이 옛날에 진군했던 노선을 따라간 것을 보면, 최소한 초국은 이신이 진격할 때 잃었던 진영일대의 땅은 수복했을 것이다. 이뿐아니라, 창평군은 진국이 배치조정하는 시기에 적극적으로 남군으로 진격하였고, 심지어 남군과 여수사이의 남양군까지 포함했을 것이다. 왕전이 병사를 모집하느라 바쁜 1년동안, 창평군은 확실히 크게 움직였다. 그는 나이가 젊었을 때도 장양왕에게 중임을 위임받았었고, 노애를 평정하는 총사령관이었다. 이를 보면 군정의 재능이 보통이 아니었다. 초나라 구귀족의 지지를 받은 후에는 진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다.


창평군이 이렇게 한 것은 진나라 특히 진왕영정에게는 치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영정은 영정이다. 천고일제는 그냥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전국군대를 모두 왕전에게 줄 뿐아니라, 왕전의 행동을 지나치게 간섭하지도 않았다.  


이는 진나라가 의법치국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영정의 통치술이 신힌지학(申韓之學, 신불해 한비자의 학설)을 실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하에 대하여 다루는 것은 '순명책실(循名責實)'이다. 너 왕전이 60만이면 초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했고, 나 영정이 너 왕전을 믿기로 선택했으니, 국왕으로서 어에게 줄 지원은 다 해주겠다. 남은 것은 네가 가서 해내는 것이다. 잘 해내는 것이다. 자연히 공로는 개세적이고, 잘못하거나 제대로 못하면 자연히 국법으로 다스린다. 군주로서, 영정은 단지 법률에 따라 장상과 징벌을 내리면 되는 것이다. 다른 일은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


다만, 또 다른 방면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어쟀든 진나라는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이번 전투의 성패는 진나라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승리하면, 천하를 얻는 것이고, 실패하면, 진나라는 다시 합종에 의하여 격패될 것이다. 심지어 본토조차도 지켜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영정처럼 강인한 주가 아니라면 이런 담량과 정력을 가지기 힘들 것이다.


바로 군신간의 합작이 가능했기 때문에 진나라는 최종적으로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국군이라면, 아마도 적의 반간계같은 류에 무너졌을 것이다. (장평지전에서 조효성왕이 염파를 조괄로 바꾼 것이나, 나중에 조왕이 이목을 죽여버린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창평군의 각도에서 보자면 이것은 아주 나쁜 소식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창평군의 능력은 허풍이 아니다. 다만 그는 시운을 잘못 만났다. 영정+왕전이라는 강력한 조합을 만난 것이다. 게다가 진나라의 웅후한 실력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래서 전투를 개시하기도 전에, 창평군은 기실 이미 승산을 잃은 것이나 같다.


그러나, 이찌되었건간에, 약한 일방이지만, 창평군은 최대의 노력을 다해야 했다.


사적의 자료가 아주 적지만, 우리는 현존하는 문헌에서 최소한 이런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왕전대군이 초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진나라는 계속하여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후의 상황으로 보면 창평군이 이끄는 부대는 항연이 이끄는 부대 및 멀리 수춘에 있는 초왕 부추와 무슨 마찰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창평군과 항연은 나란히 진나라에 저항하는 작전을 수행한 전우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 1년의 기간동안, 초국과 진국은 역사문헌에 모두 진초전쟁에 관한 아무런 중대한 소식도 실려있지 않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이것은 바로 창평군이 이 1년동안 일을 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그는 수춘과의 관계를 잘 유지했고, 최소한 공개적으로 다투지는 않았다. 그리고 항연이 지지도 얻어낸다. 항연은 초나라 최후 몇년동안 수춘방면의 유일한 기둥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실지수복방면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진군이 반격하기 전에는 주도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당연히, 창평군은 알고 있었다. 진나라가 이대로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가 적극적으로 영토를 수복한 것은 역시 최대한 더욱 넓은 전략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진군과 싸울 밑천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진군과 초군이라는 전국대대에 가장 강한 실력을 가진 국가는 마침내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게 된다.


기원전224년(진왕정23년, 초왕부추4년), 왕전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60만대군이 멸초전쟁을 시작한다.일시에 전투의 검은 구름이 밀려오고, 일촉즉발이 된다. 전체 전국세계의 눈은 이 결전으로 향했다. 교전하는 진, 초 양국은 말할 것이 없고, 아직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던 대왕 조가와 연왕 희, 그리고 아직 전쟁의 포화가 마치지 않은 제나라 심지어 이미 멸망한 한나라사람들과 위나라사람들까지. 그들은 모두 이 전쟁의 향방과 최종결과를 주목하고 있었다.


만일 초나라가 승리하여 진나라의 진공을 막아낸다면, 진나라의 통일의 발걸음은 많이 느려지게 될 것이다. 심지어 이로 인하여 한나라와 위나라의 유민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진나라가 승리하여 일거에 초나라를 병합해 버리면, 수백년동안 지속된 혼전국면이 끝나게 될 것이고. 통일의 새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방향은 바로 이 관건적인 전쟁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으면서, 왕전은 진나라의 호랑지사를 이끌고 다시 영천군의 기지를 출발한다. 그들은 1년여전에 이신이 갔던 그 길을 따라 복수의 길을 떠난다.


창평군과 항연도 생사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번 이신의 공격을 막아낸 경험이 있고, 게다가 미리 첩보를 통해서 왕전군대의 진격노선이 여전히 이신의 진격노선과 같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상채(하남성 상채 서남) -- 평여(하남성 평여현 이북) 의 노선이다. 그래서 초군도 온 역량을 끌어모아 대비했다. 다시 한번 나라를 지켜내려는 결심으로.


진군의 발굽이 초국의 대지를 뒤흔든다. 초군은 긴장, 불안, 흥분 속에서 기다린다. 그 후에...


그런데 그 후가 없다.


확실히 그 후가 없다. 왜냐하면 진군은 예정한 진지로 진입한 후, 총사령관 왕전의 명령하에, 돌연 멈추고 더 이상 진군하지 않는다.


초군은 멍해진다: 너희는 우리를 멸망시키러 온 것 아니었어? 이건....이건 뭐하자는 거야?


진군은 그저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벌인다. 왕전의 명령하에, 진군은 자신의 진지를 고약금탕(固若金湯)으로 튼튼히 짓는다. 새들 조차 날아들어올 수 없도록. 그리고 더욱  괴인한 것은 진군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진초 쌍방은 마치 각자 극본을 잘못들어서 상대방 것을 든 것처럼 보였다. 진군은 급한 마음이 없이 방어만 한다. 초군은 부득이 기회를 밪아서 공격을 감행한다.


기실, 창평군이건 항연이건 그들중 한 명은 문무를 겸비했고, 한 명은 백전노장이다. 왕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들 둘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방어반격'의 전략이다. 먼저 우리의 힘을 소모시킨 다음에, 우리가 더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약점을 노출시키면 우리를 격패시키겠다는 것이다. 예전에 백기가 조나라를 칠 때 이 전략을 썼다. 진나라의 명장들은 모두 이런 취미가 있나보다.


이 전술에 대응하기는 기실 아주 쉽다. 너희가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도 가만히 있는 것이다. 어쨌던 너희 진군은 온 나라의 인원을 끌고 온 것이고, 남의 땅에서 싸우는 것이므로 보급이 쉽지 않을 것이다. 누가 먼저 지치는지 보면 된다.


비록 창평군과 항연 둘은 잘 알고 있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바로 수춘에 머물고 있는 초왕 부추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당시 초나라의 파벌은 아주 복잡했다. 수춘방면, 초왕부추는 계속 창평군이 못마땅했다. 다만 대군이 항연이 손에 있고, 항연은 창평군을 칠 생각이 없어서, 부추도 방법이 없었다. 다만 부추가 창평군을 칠 수 없다고 하여, 항연을 괴롭히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항연은 부추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그 결과 부추는 발견한다. 진군이 전선에서 건설사업을 벌이는데, 항연이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종일 창평군과 놀고 있다. 설마 반란을 꾀하는 것인가?


그래서 자신이 더욱 위험하다고 느낀 부추는 항연에게 명령을 내린다. 반드시 적극적으로 진군의 군영을 공격하라고, 창평군은 내가 모르겠지만, 너 항연의 부대는 나의 것이니 나의 지휘를 받으라고.


그리하여 항연은 부득이 공격을 감행한다. "장수가 바깥에 있으면, 군명도 받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그냥 말일 뿐이다. 몇 명이나 감히 그렇게 하겠는가? 신릉군이 당년에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여러 해동안 귀국을 하지 못했다. 위왕이 먼저 나서서 좋은 말로 돌아가라고 해도 그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항연은 신릉군 위무기처럼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부추가 정말 그렇게 하면 그는 감히 명을 어길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방면으로, 우리는 다시 진왕정의 비범한 점을 볼 수 있다. 왕전이 육십만 대군을 이끌고 초국에 가서, 왕전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설마 영정이 마음 속으로 전혀 걱정하는 바가 없었겠는가? 필자 생각에 그렇진 않은 것같다. 어떤 정상적인 두뇌를 지닌 사람이라면 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영정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영정은 영정이다. 그는 자신의 의심을 억제한다. 사람을 쓰고나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를 말라. 이미 그렇게 했으면 노장군을 믿자. 한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자.


그래서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영정과 부추의 고하는 이렇게 가려지는 것이다.


항연군대가 진군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자 부추는 마음을 놓는다. 문제없다. 항연은 역시 나에게 충성한다 반란을 당할 위험은 없겠다.


부추는 오히려 편안하게 잠든다. 그러나 공격하는 초군은 우울했다.


초군으니 우울한 것은 진군에 대패해서가 아니라, 진군이 아예 그들과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기.백기왕전열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초병이 여러번 도전했으나, 끝까지 출병하지 않았다."


나는 나가서 싸우지 않겠다. 너를 화나서 죽게 만들겠다!


진군은 출전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좋은 복지대우를 받고 있었다. 매일 잘먹고 잘마셨다. 각종 오락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었다. 왕전 대장군도 사병들과 함께 오락을 즐겼다. 오락이 끝난 후에는 사우나도 즐겼다. 이런 생활이 무슨 전쟁하러 나온 것같은가. 그저 휴가나온 것같았다.


사서 기록이 부족하여, 우리는 이 기간동안 창평군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없다. 당시 창평군이 이끄는 군대가 진나라군영에 대한 공격에 참가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누가 공격했든 간에, 왕전은 전혀 상대해주지 않았다. 다만 진군의 방어는 아주 엄밀했다. 그래서 초군은 비록 여러번 맹공을 퍼부었지만 아무런 성과업싱 돌아온다.


쌍방이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초군이 먼저 견디지 못한다.


초군이 참지 못한 것은 내부에 파벌이 많아서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초국은 당시에 부추가 통치하는 동부지구와 창평군이 통치하는 서부지구의 둘로 나뉘어 있었다. '동초'와 '서초'의 내부도 기실 하나로 뭉쳐 있지 않았다. 굴씨, 소씨, 경씨 ,항씨등 각 대종족이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다. 초왕의 권력이 강대할 때도 국광은 완전히 이들 귀족을 장악하지 못했다. 이것은 초나라가 변법 개혁에서 계속 실패한 근본원인이다. 구귀족의 실력이 너무 강했고 왕권은 반드시 귀족의 협력과 지지에 의존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통치할 수가 없었다. 현재 초국은 분열상태이다. 왕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창평군이건 부추이건 그들은 원래 황위를 계승할 정통성이나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귀족을 대하는 문제에서 반드시 이전이 초왕들보다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군사에서도 반영된다. 명령이 잘 먹히지 않았다. 각 귀족이 이끄는 부대는 모두 비교적 큰 독립성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 진군이 기세등등하게 밀려올 때는 초국의 상하가 모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진군의 거대한 압력하에 부추이건 창평군이건, 항연이건 아니면 대귀족이건 모두 단결했다. 그리고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섰다. 다만 왕전이 수비만 하고 공격을 하지 않는 전술을 쓰자, 당초 초나라사람들이 느꼈던 거대한 압력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초나라사람은 왕전의 생각을 읽지도 못하고, 왕전이 다른 뜻을 품은 게 아니냐고까지 생각한다.


당국자미(當局者迷). 그렇다 왕전의 생각을 읽어내지를 못했다. 만일 왕전장군이 정말 멸초의 기회를 빌어 육십만대군을 이끌고 독립하여 왕이 될 생각이었을까?


진군의 태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보니, 초군의 내부는 반드시 분열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각자 서로 다른 생각을 품는다.


유감스러운 점은 사료의 부족으로, 우리는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현존하는 약간의 자료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추정해볼 수밖에 없다.


<사기.백기왕전열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형수도전이진불출(荊數挑戰而秦不出), 내인이동(乃引而東)" 왕전이 굳게 지키기만 하자 초군은 진군의 정면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어, 군대를 동쪽으로 이동시킨다.


왜 동쪽으로 이동했을까?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일종은 유인전술이고, 일종은 수춘으로 돌아가 방어하는 것이고, 일종은 초나라내부에 어떤 변고가 발생하여 대군이 부득이 후퇴해야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이상의  3가지 가능성은 모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하나 분석해보기로 하자:


먼저, 첫번재 가능성을 보자.


이전에 항연이 이신이 지휘한 진군을 상대한 작전배치로 보면, 만일 단순히 항연의 각도에서 적군을 유인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1년여전에 이신이 병력을 이끌고 초를 토벌하러 왔을 때, 항연은 창평군이 그때 반란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의 전술은 회하이북의 넓은 땅을 진나라군에게 내부면서, 진군을 계속하여 초나라의 깊숙한 곳까지 유인하는 것이었다. 진군이 계속하여 병력을 나누어 새로 점령한 지역을 통제하므로 초국의 수도인 수춘을 향하여 진군하는데 이신이 움직일 수 있는 기동부대는 갈수록 적어졌다. 항연은 초군의 주력을 수춘 주변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일거에 섬멸할 준비를 했다. 이일대로(以逸待勞)로 이신군을 일거에 격패시키고자 했다.


다만 당시 한편으로 이신은 남쪽으로 우회하여 수춘의 배후를 치려는 전술을 취했고, 다른 한편으로 창평군의 반란이 일어나서 사실상 항연의 이 전술은 실시해보지 못했다.


현재 직면한 것은 수비만 하고 나와서 싸우지 않는 왕전군이다. 항연은 아마도 다시 이 전술로 진군을 유인하려 했을 수 있다. 기회를 잡아서 적을 제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연측만 고려하면 유인전술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창평군의 각도에서 보자면, 동쪽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창평군의 기반은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동쪽으로 진격하면 그에게 뿌리가 없는 지역이 된다. 아마 진군을 격패시킨다고 하더라도, 다시 부추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만일 동쪽으로 진격하면 서부의 땅을 모조리 진군에 내주는 격이 된다. 그래서 창평군은 동쪽으로 철수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당시 초군이 동으로 철수했다는 것이 적을 유인하는 전술이라면, 그것은 주로 항연의 부대일 것이다. 창평군 및 다른 일부 초국귀족의 부대는 반드시 항연과 일치하여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각자 속셈이 달랐다.


이렇게 보면, 초군의 원래 역량은 크게 분산된다. 처음에 단결하여 진군에 대항했는데, 더 이상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진군에게 각개격파의 기회를 주게 된다.


다시 두번째 가능성을 보자. 


진초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떄, 초왕 부추는 수춘에 숨어 있는 것이 비교적 안전하다(앞에 설명한 바와 같이 <진시황본기>에 기록된 초왕 부추가 평여 전선에 있었다는 내용은 <세갸>와 <열전>, <연표>와 부합하지 않느다. 그래서 이 견해를 채택하지 않는다. 저명한 전국사학자인 양관 선생도 마찬가지로 부추는 항연의 사후 수춘에서 포로로 잡혔다고 보고 있고, 또 다른 타이완 삼군대학이 출판한 <중국역대전쟁사>에 기술된 진초전쟁과정도 마찬가지로 부추는 수춘에서 포로로 잡혔다고 보았다. 이를 보면 양안의 사학계는 이 점에서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부추에 있어서 그에게 위험이 되는 것은 진군만이 아니라 창평군도 있다. 중국역사의 위대한 전통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통치자는 내부인에 대한 두려움이 외적에 대한 두려움보다 컸다. 그러므로, 처음에 진군에 의하여 닥친 위험이 잠시 소실되자 초왕 부추는 주의력을 평창군에게 돌린다. 어쨌든 평창군의 존재는 그에게 거대한 위협이 된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자신이 의존하는 항연 장군이 창평군과 결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군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부추 자신은 끝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군이 굳게 지키고 출전하지 않는 상황하에서, 부추는 아마도 자신의 유일한 주력부대인 항연부대로 하여금 자신의 곁으로 오도록 조치했을 수 있다.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항연이 창평군의 곁에서 함께 어울리는 것을 두고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진군에게 기회를 주게 되지 않느냐. 초왕 부추는 그걸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하하 놀라지 말라. 역대사료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한 혼군이 비일비재하다. 부추는 첫번째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다. 결국 이것은 권력의 사유성이 결정하는 것이다. 권력자에 있어서, 내부인에 대한 의심이 적국에 대한 거리낌보다 훨씬 큰 경우가 많다.


항연은 정직한 사람이다. 그는 충신이다. 그 본인이 당시에 동쪽으로 철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 아닌지에 불구하고(위에서 말한 것처럼 항연 본인이 아마도 동쪽으로 철수하는 것이 적을 유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는 부추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그래서 두번째 가능성하에서 부추의 의심으로 초군은 분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가능성을 보자.


초국이 가진 특유한 성질이 있다. 초나라는 실제로 연합왕국이다. 국왕의 아래에 각 대귀족이 본종족내에서 큰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국왕은 이들 대귀족의 지지에 의존하여 통치한다. 이런 상황은 기실 이점도 있고 폐해도 있다. 폐단은 자연히 군권이 제한을 받아, 국가에서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초나라가 비록 영토는 광대해도 전국시대에 그다지 큰 일을 해내지 못한 원인이 될 것이다. 이점은 바로 역량이 분산되어 적에게 일거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대량의 귀족세력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초국이 비록 멸망했지만, 여전히 "초수삼호(楚雖三戶), 망진필초(亡秦必楚)"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진군의 대병력이 국경을 압박하는데, 이런 망국의 위기에 직면해서 귀족들은 잠시 연합했다. 다만 이런 연합은 시급한 위험으로 인해서 그들이 각자의 이익을 놓고 다투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이런 위험이 그다지 긴급하다고 여겨지지 않으면, 권리를 다투는 이기적인 특성은 다시 한번 이들 귀족들 사이에 상연될 것이다. 심지어 전혀 장기적인 고려는 없이 서로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초국은 두 왕이 병립하고 있고, 두 왕은 모두 합법적인 승계인의 자격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대귀족들이 더욱 큰 야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우리는 당시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초국의 이런 특징으로, 왕전이 특히 수성의 태도를 취하자, 그들이 내부적으로 분열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분열이 어떤 형식이었든지간에, 모두 첫째나 둘째의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초나라의 항거능력을 약화시키고, 진군에 각개격파할 기회를 주게 되었다.


하물며, 이때 초국이 직면한 것은 진나라의 전신 백기 이후 가장 능력있는 왕전 장군이다. 바로 이 왕전 장군이 대군을 데리고 진왕정의 신임하에 자신의 뜻대로 지휘하고 있었다.


양국의 교전에서 일국은 내부모순이 겹겹이 쌓여 있고, 일국은 상하가 일심이다. 하물며 상하일심인 곳이 원래 강국이다. 모순이 겹겹인 곳이 원래 약국이다. 그러므로, 초국의 실패는 기실 많은 정도에서 필연적이다. 이런 필연성은 또한 창평군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상리로 분석하면,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초군 항연부대가 동쪽으로 철수한 것은 창평군으로서는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의 근거지는 바로 이곳이고, 바로 이들 진군의 위협에 놓여 있는 영토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군이 철수해버리면 그로서는 혼자서 왕전의 대군을 상대해야 한다.


그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사서에 기록은 없다. 다만 나중의 상황을 분석해보면, 창평군은 당시에 마찬가지로 도망쳤다. 더 이상 정면으로 진군의 주력에 대항하지 않았다(물론 그는 그럴 실력이 안되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디로 철수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당시 거병했던 언영지구일 것이다. 그는 1년후, 바로 거기에서 최종적으로 진군에 격패당한다.


노련하고 무게있는 왕전은 계속하여 초군의 동정과 아군의 사기를 주시한다. 휴식을 취한 진군의 사기는 올라갔다. 왕전은 사람을 보내어 사병들이 뭘하고 있는지 봤다. 그 결과 사병들의 정력이 왕성하여 힘을 쓸 데가 없다보니 모두 큰 돌덩이를 들어 던지면서 힘을 빼고 있다고 말한다. 왕전은 보기에 사기가 충분하다고 여긴다. 바로 이때 초군이 동쪽으로 철수한다. 왕전은 알았다. 기회가 마침내 왔다.


그리하여, 힘을 충분히 비축해 두었던 진나라병사들은 추격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왕전이 항연부대가 이전할 때 지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틈을 타서 공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출동한 것은 모두 정예부대이다. 초군은 부대가 철수하는 과정이었고, 대오가 제대로 진형을 갖추기 어려웠다. 게다가 진군은 오랫동안 힘을 비축해 왔다. 그러나 초군은 비교적 피곤했다. 그래서 양측이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초군은 밀리기 시작한다.


전투에서 패배한 초군은 항연의 지휘하에 계속 동쪽으로 철군한다. 진군은 계속하여 추격한다. 창평군의 부대 및 기타 귀족의 부대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진다. 모두 진군에게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다.


이렇게 하여 초군은 계속 도망치고, 진군은 계속 추격한다. 그렇게 기현(지금의 안휘성 숙현 동남쪽)일대에 이른다. 진군은 마침내 초군을 따라잡았다. 쌍방은 다시 악전고투를 벌이고, 결과적으로 진군이 승리를 거둔다. 항연은 패배하여 피살되고, 초군의 잔여부대는 흩어져 버린다.


이 전쟁의 구체적인 과정은 <사기>에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저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기남에 이르러, 그 장군 항연을 죽이고, 초병은 패배하여 도주했다."


다만 기타 사료를 분석해보면, 이번 전투에서 진군은 비교적 힘들게 싸워 이겼다. <편년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이십삼년(廿三年), 흥(興), 공형(攻荊), 00수양0사(00守陽0死)"


이 짧은 문구의 기재레서 알 수 있는 것은 초나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어느 지방의 군수인 진나라 고위관료가 전사했다는 것이다.


진나라의 군제에 따르면, 전투에 나가서 적의 목을 베는 것은 일반사병이다. "둔장(屯長, 오십인장)"과 "백장(百將, 백부장)"같은 하급장교는 지휘직책을 내버려두고 친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지휘하는 부대의 전체 참수 수량으로 공을 따졌다. 전체 부대의 참수가 30급이상이면, "둔장"과 "백장"은 공을 세운 것이 된다.


이렇게 규정한 것은 자연히 군관이 공을 세우기 위하여 일반병사들과 같이 수급을 자르려고 지휘직책을 포기하고 다투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하급군관도 이러했다면, 중이천석의 고급관리인 군수라면 더더구나 전선에서 싸울 일은 없다. 그러나 이번 초군과의 전투에서 진군은 군수직급의 고위관료도 전사한다. 이를 보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을지 알 수 있다.


이 점을 제외하고, <편년기>에는 앞의 문구를 인용한 후 이어서 문구를 하나 적었다: "사월(四月), 창문군사(昌文君死)"


아마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당초 진나라에 노애의 난이 발생했을 때 상국인 창평군은 창문군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평정했었다. 그리고 <편년기>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원래 창평군의 이전 전우이자 동료가 진왕정23년에 사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창문군이 왕전군내에서 고위장군으로 참여하고 지휘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그가 전투중에 죽었는지 여부도 알 수가 없다.


진나라가 이번에 온나라의 병력을 다 끌고 나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창문군이 군대를 따라 출정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만일 창문군이 예전에 창평군과 함께 반란을 평정한 주장이라면, 직급이 상국보다 그다지 낮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창문군도 상국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번에 창무군이 만일 부대를 끌고 출전했다면, 자연히 상당한 고위직의 장수였을 것이다. 만일 창문군도 전사했다면,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을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상은 그저 추측이다. 근거는 없다. 다만 기나긴 역사동안 주장이 전장에서 죽은 경우는 아주 적다. 당시 각국에서 통용된 법률에 따르면 만일 주장이 전투에서 죽으면, 그 위병부대는 모조리 처벌받는다. 그래서 장군의 위병은 죽기살기로 장군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했다. 그런데, 이번에 초국의 총사령관 항연도 죽고, 진나라측에도 손실이 적지 않다. 이를 보면 초국은 확실히 실력이 있었다. 단지 구귀족세력이 너무 커서 변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여 결국 나라가 멸망한 것이다.


항연이 전사한 후, 초왕 부추는 더 이상 군대가 없었다. 진군이 수춘으로 밀려왔고, 1년여의 전투를 거쳐서 수춘이 결국 함락된다. 그리고 부추는 포로로 잡힌다.


창평군은 항연의 지지를 잃고 혼자서 분전해야하는 지경에 이른다. <백기.왕전열전>의 기록으로 보면, 항연은 진왕정23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창평군은 진왕정24년에 사망한다. 이는 항연이 이끄는 초군주력이 전멸한 후, 창평군은 여전히 일부지구에서 진군에 계속 저항하고 있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필자는 창평군이 진군에 저항한 장소는 여전히 그가 처음 거병한 언영지구일 것으로 본다. 항연과 갈라진 후, 창평군은 아마도 앞날을 낙관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이미 사태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해도 소용이 없다. 사실상, <진시황본기>의 기재를 보면, 아마도 이번에 진군은 초나라를 공격하면서 2단계로 나누어 진행했다. 제1단계는 완전히 왕전을 주장으로 하였고, 시간은 진왕정23년이다; 그러나 진왕정24년, 진나라는 다시 몽무를 파견하여 왕전을 돕도록 한다. 그리고 창령군을 격패시킨 것은 왕전과 몽무 두 사람의 공로이다. 왕전 1명이 아니다.("24년, 왕전,몽무가 초를 공격하고, 초군을 격파한다. 창평군이 죽었다.") 이렇게 보면, 항연을 죽인 후, 진군은 아마도 즉시 창평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어쨌든 진나라에 있어서 부추를 잡는 것이 아마도 더욱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초나라는 영토가 광활하여, 그 시간동안 진군은 계속하여 병력을 나누어 각 군현을 평정했다. 이것은 다시 진군의 병력을 분산시킨다. 그러므로 한동안 창평군은 진군의 압력을 견뎌낼 수 있었다.


다만 올 것은 어차피 온다. 결국, 진군은 창평군에 대한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그리고 창평군도 결국 최후를 맞이한다.


창평군이 전사하였는지 자살하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경우이든, 이 반진왕초(反秦王楚)의 마지막 초왕은 마지막 책임을 다한다. 많지 않은 부대를 거느리고 강력한 진군과 싸운다. 당시 항연은 이미 죽었고, 그는 이미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2년전 합작하여 진나라를 막아냈던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창평군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 봤을 것이다. 상국에 봉해지고, 진나라의 반란을 평정하고, 시기를 당하고, 유배를 당하고, 초왕을 칭하고, 이신과 싸우고, 왕전과 싸우고, 겨우겨우 버티면서 지금까지 왔다. 다만 운명은 끝내 그를 돌보지 않는다.


창평군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일대영걸이라 할 수 있다. 그저 시운이 따르지 않았다. 역사의 대세는 이미 막을 수가 없다. 누구도 되돌릴 수가 없다. 창평군 개인에게 있어서 최소한 그는 휘황했었고, 분투했었고, 견지했었고, 몸부림쳤었다. 이 점으로 보자면, 그는 이미 그 시대이 영웅으로 부끄럽지 않다. 단지 여러가지 원인으로 그의 사적은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었다. 그의 광채는 관심을 갖는 사람이 드물다. 다만 어쨌든 역사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몸에서, 초나라 마지막 세월의 또다른 일면을 본다. 완전히 다른 전국의 세월을 본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는 창평군에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역사를 더욱 멋지게 만들었고,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고금다소사(古今多少事) 도부소담중(都付笑談中).


고인의 금과철마와 애한정구는 그저 한 주전자의 탁주를 마실 때의 얘깃거리일 뿐이다. 천년이후 오늘날 생활하는 우리에게도 그저 심심할 때의 얘깃거리일 뿐이지 않겠는가. 역사는 바로 그런 것이다.


[필자는 어떤 학자가 창평군이 진나라에서 상국으로 있을 때 일부 청동기의 제조를 주관한 적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창평군의 이름을 웅계(熊啓)라고 추측했다. 이것은 모두 학자가 출토된 문물을 가지고 추단한 것이다. 본인은 믿을만한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본문에는 적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저 참고로 보충하여 설명을 남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