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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음식

중국 "젓가락"의 역사

by 중은우시 2018. 11. 26.

글: 간역사(看歷史)


얼마 전에 돌체 앤 가바나의 창업자가 중국에 대하여 모욕적인 언사를 한 것이 드러나 중국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외에 이 브랜드는 젓가락으로 피자를 먹는 광고를 찍었는데, 광고내용중에 여자모델이 피자를 먹으면서 중국식 발음과 오만한 어투와 각종 기괴한 자세를 취했다. 그들이 중국의 젓가락문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아예 알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지로 인한 편견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젓가락은 중국의 독특한 식사도구이다. 중국인들이 젓가락을 사용한 역사는 최소 3천년에 이른다.

선진시대, 젓가락은 "협(梜)"이라고 불렸다. 한나라때 이미 "저(箸)"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명나라때부터는 "괘(筷)"라고 불리게 된다.

젓가락에 관하여, 비교적 유명한 것은 상왕 주(紂)가 상아젓가락을 사용한 이야기이다.


<한비자.유로(喩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옛날에 주왕이 상아젓가락을 썼는데, 기자가 그것을 보고 두려워했다."

즉 상왕 주가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어 쓰자, 대신인 기자는 이를 겁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나라 주왕때, 이미 젓가락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의 고고학적 발견도 이를 뒷받침한다. 1934년에서 1935년 하남의 안영 은허에서는 상나라 후기(기원전14-11세기)의 청동젓가락 6개가 발굴된다. 1994년 호북 장영현 향로석 유적지에서는 상나라 중기(기원전15-14세기)의 뼈젓가락이 발굴되었는데 길이가 16센티미터에 이른다.


용규장(龍虬莊)에서 출토된 뼈젓가락(신석기시대)은 1990년대 강소성 고우의 용규장에서 발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6600-5500년전의 일이다. 전형적인 신석기시대이다. 뼈젓가락의 모양은 일반적으로 한쪽 끝은 편평하거나 거칠게 편평하고, 다른 한 쪽은 뾰족하고 둥글다. 길이는 9.2-18.5센티미터이다. 


비록 젓가락의 기원은 역사가 유구하지만, 이 때의 젓가락은 식사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탕국의 야채를 건지는 용이었다. <예기.곡례상>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식사할 때 혹은 탕을 먹을 때의 도구는 주로 찬시(餐匙)였다(고대에는 匕, 匙로 불리웠다).


양한(兩漢)시기에 젓가락의 사용등급은 아주 분명해진다. 서한의 초기에는 대나무젓가락을 주로 썼지만, 동한의 귀족들 묘혈에서는 구리젓가락이 더욱 많이 보인다.


수당,오대시기에 이르러, 적사락의 재질은 더욱 과장된다. 금젓가락, 은젓가락, 옥젓가락, 서각젓가락, 목향젓가락등이 있다. 이것들은 당연히 통치자들이 쓰던 것이고 그들만이 사용하던 식사도구였을 것이다. 수당때의 장인들의 상상력은 풍부했다. 이들 젓가락 중에는 양쪽 끝은 가늘고 가운데는 굵은 신형 젓가락도 나타난다. 그것은 젓가락의 양쪽 끝으로 가시를 발라내고 음식을 집어서 먹기 위해서라고 본다.


명청에 이르러, 젓가락의 칭호는 '쾌자(筷子)'가 된다. 명나라 성화11년(1475년), 육용(陸容)은 <숙원잡기(菽園雜記)>에 이렇게 쓰고 있다:

"민간에서는 풍속으로 꺼리는 것이 각 지역마다 있다. 오중(吳中, 강소성 오현)은 심한 편이다. 예를 들어, 배를 탈 때는 '주(住)'자나 '번(飜)'자를 꺼린다. 그래서 '저(箸)'를 '쾌아(快兒)'라고 부르고, '번포(幡布)'를 '말포(抹布)'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모두 항간의 풍속으로 가소로운 점이 있지만, 지금은 사대부들도 마찬가지로 '쾌아'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 글의 의미는 강남지구의 뱃사공들은 배를 몰 때 빨리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해서, '주(住)' 즉 멈추다. '번(飜)' 즉 뒤집어지다와같은 불길한 글자는 입에 담지 않는다. 그리하여, 저(箸)는 주(住)와 발음이 같아서, '저'를 '쾌아'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급속히 퍼져가서 사대부들까지도 따라한다. '쾌아(快兒)'에서 대나무 죽자를 덧붙여 "쾌자(筷子)"로 된다.


명나라 융경 연간에 이예형(李豫亨)은 <추봉오어(推篷寤語)>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나쁜 글자를 피하고 좋은 글자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저(箸)는 막힐(滯) 것을 꺼려해서 쾌자(快子)라고 부른다. 오늘날 유행한지 오래되어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쾌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청나라에 이르러, '쾌자'라는 단어는 널리 보급된다. <홍루몽> 제40회에도 '봉저와 원앙이 상의를 마치고, 한 쌍의 오래된 사릉상아양금의 쾌자를 유모모에게 준다."


그러나, 이때는 "저"와 "쾌자"는 같이 쓰였다.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쾌자"로 통일된다.


만일 중국인에게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을 가르키려면, 한끼 식사를 먹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만일 서양인에게 젓가락을 쓰도록 가리키려면, 아마도 몇 끼의 식사정도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젓가락이 고대에는 산수도구이기도 했다(짧은 젓가락은 수학연산에 쓰였다). 그리고 사고훈련도구이기도 했다(길고 짧은 젓가락으로 팔괘를 표시했다). 그것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의 학문이다. 우리는 한 손으로 두 개의 젓가락을 쥐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동작으로 음식을 집어서 입에 집어 넣는다.


중국인은 자고이래로 먹는 것을 중시했다. 이에 상응하여, 음식도구에도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젓가락은 칠촌육푼(七寸六分)의 길이인데, 이는 사람의 '칠정육욕(七情六慾)'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동물과 다르다는 점을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 일깨워서 부정한 욕망을 절제하도록 한다. 

젓가락이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다. 네모난 것은 땅을 상징한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중국인의 세계관이다. 

그외에 손으로 젓가락을 쥘 때, 엄지손가락을 식지의 위에 둔다. 무명지는 새끼손가락의 위에 둔다. 중지는 가운데 있다. 이는 '천지인'의 삼재를 나타낸다. 이는 중국인의 사람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소박한 이해이다.

마지막으로 젓가락은 쌍으로 나타난다. 중국인들의 태극, 음양이념과 부합한다: 태극은 1이고 음양은 2이다. 하나를 나누면 둘로 된다는 것은 만물이 두 개의 대립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을 합치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음과 양이 겨합하면 하나의 완벽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의 <브리타니카백과전서> 권4(1985년 중문판)에는 젓가락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다: "중국은 젓가락으로 서방 식탁의 포크와 나이프를 대체한다. 이는 학자를 문화영웅으로 무사보다 높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젓가락은 풍부한 과학문화적 의미와 광범위한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어 문명적인 예의지국의 식사도구이기 때문이다.


젓가락은 먼저 중국에서 조선, 일본과 월남등 한자문화권국가로 전파된다. 이어서 동남아의 일부 국가들로까지 퍼진다.


젓가락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상나라가 멸망한 후, 유신(遺臣)인 기자(箕子)가 사람을 데리고 조선반도로 들어갈 때 전해주었다고 한다.


서한이 한반도의 북부에 군현을 설치했던 기간(기원전108년-기원전24년), 많은 한족 관리, 학자, 장인과 농민이 그곳으로 가서 정착한다. 젓가락도 따라서 전래된다. 양한때(1세기전후), 한민족은 고구려, 백제와 신라의 세 개 정권을 건립한다. 역사에서 삼국시대라고 칭하는 시기이다(기원전57-668년). 고구려는 중국요동에서 국경을 마주했고, 대륙의 북방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백제, 신라는 중국남방의 육조와 해상교류를 가진다. 삼국시대의 한반도 주민들은 이미 젓가락을 식사도구로 썼다. 한국어의 "저(箸)"는 'Jeo'로 발음하는데, 발음이 중국의 '저(箸)'와 유사하다. 


젓가락이 일본으로 전래되기 전에, 일본인들은 거의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사서 <위지.왜인전.에는 고대일본인들이 "수식(手食)"했다고 적었다.

통상적인 주장에 따르면, 젓가락은 야요이(彌生)말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대나무로 만들어 족집게(鑷子)와 비슷한 물건이었고, 현재의 젓가락처럼 쌍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어에서는 "절저(折箸)"라고 부른다. 이때 일본인이 절저를 사용한 것은 주로 제사활동때였고, 그래서 신기(神器)로 여긴다. 일본인들은 이때도 여전히 '손으로 먹었다'


일본은 고분시대 중기(392-504)에 이르러, 한반도의 백제인들이 대거 넘어온다. 이때 선진적인 중국의 동진문화와 기술을 전해준다. 아스카(飛鳥, 592-710)시대에는 수나라와 정식관계를 맺고 유학생을 중국으로 파견한다. 고고학계의 자료에 따르면, 5세기때 일본 이세신궁, 이즈모대사등에서 제사활동을 할 때, 이미 일종의 "신저(神箸)"라고 부르는 젓가락을 사용했다. 그것은 두개가 한쌍으로 한쪽 끝은 원형이고 다른 쪽 끝은 뾰족하여, 현재의 젓가락에 상당히 접근했다.


"저"자가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나라(奈良)시대(710-794)이다. 초기의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呂, 664-723)가 쓴 <고사기>(712)에서 일본어로 하시(hashi)라고 적었다. 쇼도쿠태자(聖德太子)는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 이름은 여자같지만 남자임)를 견수사(遣隋使)로 중국에 보낸다.

오노노 이모코는 중원에서 조야상하가 모두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탄복한다. 그리하여 젓가락을 일본으로 가져간다. 그리하여 쇼도쿠태자는 배세청(裴世淸)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사신단을 맞이할 때, 오노노 이모코의 건의에 따라 젓가락으로 손님을 접대한다. 그때 일본인들은 이전에 젓가락은 오로지 제사때나 쓰던 것이라는 것을 거의 잊어버린 듯했다. 젓가락은 귀족사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민간으로도 천천히 퍼져나간다.


8세기, 젓가락은 일본에서 이미 상당히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각계각층에 모두 즐겨쓰는 음식도구가 된다. 당시에는 그것을 "당저(唐箸)"라고 불렀다. 그 의미는 당나라에서 온 젓가락이라는 의미이다.


길이를 보자면, 중국의 젓가락이 가장 길고, 한국이 그 다음이고, 일본이 가장 짧다.

그외에 중국의 젓가락은 족부(足部)가 왕왕 둥글고 굵은데, 한국의 젓가락은 몸이 가늘고, 족부가 편평하다. 전해지는 바로는 콩을 집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또한 작은 접시의 김치를 가르기 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일본의 젓가락은 머리가 날카롭고, 길이가 짧다. 이는 일본인이 물고기를 즐겨먹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래야 가시를 바르기 쉽다고 한다.


세 나라 가운데, 한국의 젓가락은 재질이 가장 특별하다. 금속으로 만든다. 이는 그 역사문화와 큰 관계가 있다. 한국은 금속을 숭상하고 더더욱 신분의 등급제를 숭상했다. 상류사회는 금, 은으로 만든 젓가락을 쓰고, 보통민중은 쇠젓가락을 썼다. 나중에는 기본적으로 스테인레스로 만든 젓가락으로 바뀐다. 금속젓가락은 한국의 음식문화와 잘 맞는다. 고온을 잘 견디고, 변형이 잘 되지 않는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요리가 불고기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일본의 젓가락은 모두 나무젓가락이다. 보기에 평등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광산자원이 적은 것과 관련이 있다. 에도(江戶)시기(16세기), 일본에서는 젓가락에 도칠(塗漆)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를 통해 돈이 있는 사람들이 부유함과 존귀함을 나타낸 것이다. 나중에는 칠젓가락이 실용적으로 발전했을 뿐아니라, 공예품으로도 발전하여 일거에 친구들에게 주는 선물로 쓰였다.


동아시아지역을 제외하고, 17세기말 청나라초기에 젓가락은 유럽에 전해진다. 르네상스후 일찌기 손으로 식사를 하던 유럽인들은 비로소 포크와 나이프로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명나라 만력10년, 이탈리아사람인 마테오 리치가 중국으로 오고, 그의 회고록 <중국여행기>에서는 중국인의 연회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 포크나이프나 스푼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주 빛나는 젓가락을 사용한다. 길이는 손바닥 1개반 정도의 길이이다.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어떤 종류의 음식도 집어서 입으로 넣는다. 손가락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젓가락은 오목(烏木) 혹은 상아 혹은 기타 내구적인 재료로 만든다.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음식을 접촉하는 한쪽 끝은 통상적으로 금이나 은으로 감싼다."


청나라때, 선교사를 제외하고도, 많은 외교사절, 상인, 관광객이 유럽에서 중국으로 온다. 그리고 중국인들도 서양으로 간다. 이렇게 하여 젓가락이 서방에 전해지게 된다.


강희22년(1681년), 남경사람인 심복종(沈福宗, 1657-1692)는 벨기에 에수회 선교사 백응리(柏應理)를 따라 40권의 중국서적을 가지고 유럽으로 간다. 1684년 두 사람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국왕 루이14세를 접견한다. 심복종은 프랑스국왕과 만난 최초의 중국인이다. 국왕의 질문에 대답을 잘 하고, 언행과 행동거지가 국왕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다. 파리의 <풍류신사>잡지 1684년 9월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백응리 신부가 데려온 중국청년은 라틴어를 아주 잘 말했다. 이름은 마이클 심(沈)이다. 이번 달 25일, 그들 두 사람은 베르사이유궁전으로 가서, 국왕폐하를 접견했다. 그후 그들은 세느강에서 유람했고, 다음 날에도 다시 연회에 참석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국왕이 연회에서 왕공대신들의 앞에서 심복종에게 중국식사도구를 써서 식사하는 법을 시범보이게 한 것이다. 심복종은 오른 손으로 중국에서 가져온 상아젓가락을 가지고, 연회석에서 한편으로 설명하며 한편으로 시범을 보였다.


루이14세는 중국물품을 아주 좋아했다. 비단옷을 입은 것 외에 베르사이유궁전과 퐁텐블로궁에 많은 중국자기, 칠기, 가구와 일용품을 전시했다. 지금은 다시 중국젓가락을 배운 것이다. ㅡ랑스인은 그것은 bâtonnets라고 불렀다. 작은 막대기라는 의미이다. 이후 프랑스궁정과 상류사회에서는 중국젓가락을 쓰는 것이 유행한다. 이어서 영국, 독일과 네덜란드등에서도 따라한다.


강희32년(1693년) 러시아의 짜르인 표트르1세는 네덜란드인 이타이스(伊臺斯)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중국에 보낸다. 2년후(1695년) 모스크바로 돌아가는데, 이타이스와 사절단구성원인 독일인 볼란드는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여행기를 각각 남겼다. 1704년과 1695년에 출판된다. 볼란드의 여행기는 1695년 영문으로 번역되어 출판된다. 두 여행기에서는 반복하여 젓가락이 언급된다.


강희32년 팔월십사일(1692년 9월 13일), 러시아사절단이 흑룡강 눈강에 도착한다. 청나라조정이 파견한 시독학사가 영접하고, 장내에서 연회를 베푼다. 사절단의 구성원인 볼란드는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식사를 할 때 포크와 나이프를 쓰지 않고, 두 개의 뼈로 만든 젓가락을 썼다. 중국인들이 포크와 나이프를 대체하는 젓가락은 아주 가늘고 길다. 일반적으로 오목, 상아 혹은 기타 경질의 재료로 만든다. 젓가락이 음식과 접촉하는 한쪽  끝은 금이나 은으로 감싼다. 중국인이 이런 젓가락을 사용하여 빨리 음식을 입안에 집어 넣는데 손가락이 더러워지는 법이 없다."


구월이십이일(10월 21일), 사절단은 직예경내의 한 성에 도착하여 식사를 한다. 두 사람이 1탁자에 앉는데, 칠목탁자에는 비단으로 식탁을 둘렀다. 사절단을 이끈 네덜란드인 이타이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중국인은 식탁보, 찬건(餐巾), 포크와 나이프 혹은 접시를 쓰지 않는다. 식탁 위에는 그저 1쌍의 상아 혹은 오목으로 만든 stokjes(막대기)를 ㄴ호아둔다. 이것이 식탁에 놓여진 전부이다. 중국인들은 이런 젓가락을 잘 쓴다. 특히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들이 젓가락을 이용하여 대두침의 머리를 집어서 올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식지와 중지를 사용하여 젓가락을 쥔다. 모든 음식 예를 들어, 탕, 쌀밥, 요리등은 모두 자기그릇에 담긴다.


사절단은 모두 22명이었다. 사신이 네덜란드인인 것을 제외하고, 그중 12명은 독일인, 9명은 러시아인이었다. 그들이 귀국한 후, 자연히 중국인의 음식먹는 방법과 젓가락사용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이렇게 하여 17세기에 중국의 젓가락은 이미 중국과 유럽 쌍방인원의 교류를 통하여 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독일과 러시아등 유럽국가에 전파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인은 젓가락을 발명했고, 다른 나랴에 전파했다. 서로 다른 형태와 문화특색이 각 지방마다 나타난다. 그러나 음식문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식사방법도 차이가 있다. 이는 원래 문화다양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의 존중을 표시해야 한다.